그대들은 참군인이오
며칠 전, 백선엽 장군님을 모시고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을 다녀왔다. DMZ 지뢰사고로 입원한 하 하사를 위문하기 위해서였다. 96세의 노영웅은 “참으로 장하다. 부상의 고통을 잘 이겨내라”며 하 하사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리고 65년 전 낙동강 전선에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숨 바쳐 싸운 이야기를 하셨다.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초기 1사단장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켰는데 북한군의 총공세로 한미 연합군이 고전하고 있었다. 이때 계속된 격전에 지치고 고립된 고지에서 식량까지 끊겨 더는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는 부하 병사들에게 달려간 백선엽 장군은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땅이 없다. 더 밀리면 나라가 망한다.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물러나면 너희가 나를 쏴라” 하고는 앞장서서 싸움으로써 낙동강 전선을 끝내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다. 노영웅은 하 하사를 보며 낙동강 전선에서 목숨을 바치고 부상당했던 부하들의 모습이 떠오른 듯했다.
백 장군님은 평생토록 오직 나라와 군을 위해 살아오신 참군인이시다. 그런데 그날 나는 그런 참군인을 한 명 또 보았다.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우리 일행을 맞은 하 하사의 그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을 보며 마음이 숙연하고 뭉클해졌다.
하 하사는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에 두 발을 잃었다. 오른쪽 무릎 위와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지금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20대 초반인 그는 앞으로 남은 날을 다리가 없는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 한 점의 찡그림이나 어둠을 보지 못했다.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군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군인이 나라를 지키다 부상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듯했다. 오히려 책이나 TV에서만 보았던 전쟁영웅께서 찾아준 것을 감사하며 백선엽 장군님과 사진을 찍고 평생 간직하겠다고 했다.
문득 전에 보았던 전쟁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두 다리를 잃은 병사가 마취에서 깨어나자 군의관이 “안타깝게도 두 다리를 잃었네”라고 말하자 “잃은 것이 아니라 나라에 바친 것입니다”라고 그는 답했다. 병실을 떠나면서 하 하사와 부모님에게 그 말을 똑같이 해주었다.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한 김 하사도 병원 사정으로 위문을 못 했지만 “치료가 끝나면 다시 전방으로 가겠다”며 불굴의 군인정신을 보여준 참군인이다.
이게 군인이다. 하나뿐인 목숨보다 임무를 먼저 생각하고, 다리를 잃고도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색내지 않는 바보 같은 사람이 참군인이다.
국립묘지에 가면 그런 나라 바보들 16만여 위(位)가 계신다. 평생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사는 군인들은 더 많다. 우리는 안다. 나라는 말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온몸으로 사랑하는 나라 바보들에 의해 지켜진다는 것을.
참군인을 만난 가슴 벅찬 감동을 안고 병원을 나서며 어떤 군인이 적에게 잡혀 사형을 당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을 떠올렸다.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뿐인 것이 오직 아쉬울 뿐이다.”
임관빈 (예)육군중장 (육군협회 지상군연구소장)
* 국방일보 8월19일 17면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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