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기념 시설물 소개」 (52) 한강방어선전투 전사자 명비
서울 동작구 노들나루공원에 있는 한강방어선전투 전사자명비를 취재하면서 겪은 일이다.
“나 지금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로 취재왔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더니 갑자기 말을 거셨다.“
“전쟁 당시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고,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지금의 이 시대는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다 퍼주기에 노력하지도 않고,
적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적을 좋아하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야.
옛날에 그 노력들을 다 말아먹고 있어서 마음아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마음이 느껴져서 안타깝기도 하고,
계속 애써주시는 분들이 있구나...감동적...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더욱 노력해야지!“
“오늘이 지금까지의 취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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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방어선 전투는 6·25전쟁 초기 서울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 소장) 예하의 3개 혼성사단 및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한강 남쪽 및 김포지역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는 것을 막고자 벌어진 전투다.
당시 북한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총공격을 단행하여 의정부시 함락, 창동 방어선 붕괴, 그리고 미아리 방어선마저 돌파되어 수도 서울의 중심부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서울 동부의 광나루에서 김포반도를 연결하는 선으로 한강의 남안을 따라 한강방어선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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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중책을 맡게 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은 전방으로부터 무질서하게 철수하는 병력들을 집결시켰다. 대부분 전투 장비를 잃어버리고 조직마저 유지하지 못한 채 철수하였기에 부대들을 500명 단위의 혼성대대로 편성한 후 혼성 수도사단과 혼성 제7사단, 혼성 제2사단을 만들어 3개의 사단으로 재편성했다. 이러한 국군 주력부대들이 새로운 방어선인 한강 남쪽에 배치됐다.
또한 미 지상군 참전이 정해지더라도 한반도에 상륙해 전투 전개를 갖출 시간이 필요하기에 향후 3일 동안 한강 방어선을 지탱해 주어야 미군이 들어올 발판을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홍일 사령관은 ‘앞으로 3일 동안 한강선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북한군의 남하를 6일간이나 저지시켰다. 또한 한강방어선의 돌파상황을 파악하여 예하부대들에게 철수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병력과 장비를 보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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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방어작전은 실패했지만 서울이 함락되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6일간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키는 지연전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초기 남진을 계속하려던 북한군의 남침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주었다. 나아가 미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함은 물론이고, 이후 국군 재편성과 한미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이로써 한강방어선 전투는 패배했지만 승리했던 전투로 새롭게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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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령관 김홍일 장군은 후퇴하던 장병들을 배불리 먹이고 헌병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는 등 지친 장병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용기를 회복하게 이끌었다. 부대와 방어선을 수시로 방문하여 장병들의 전의를 고취하고 미군의 참전을 알려 사기를 복돋았다. 장병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강방어선을 6일간 버텨 낼 수 있도록 한 그의 리더십은 우리가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곳에 새겨져 있는 많은 이름들, 젊은 병사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이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서울이 함락되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다해 싸웠다. 우리는 그러한 사명감을 안고 있는가.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감사하고 있는가. 그들의 호국정신과 헌신을 본받아 현재의 우리가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지 애국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정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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