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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그 자체가 한국전 재발가능성 막아주는 최선의 방책임을 증명

북한의 오랜 전술은 원하는걸 얻을때까지 시간두고 기다리는 것
Written by. 톰 코이너   입력 : 2009-01-15 오전 10: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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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는 오늘의 6者 회담에 이르는 긴 역사적 事緣이 있지만 그에 비해 미국은 南北韓 즉 한반도와 좀 특이한 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과 한반도간의 이러한 특별한 관계 史가 없었다면 현재의 6자회담 같은 것은 물론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辛未洋擾로 시작된 한미관계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6자회담을 제대로 논평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와 미국관계 전반을 돌이켜보고 그런 관계로 인해 어떻게 오늘의 6자회담이 필요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6자회담에 起伏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한국(Korea=한반도)간의 관계에도 많은 기복이 있었다. 미국과 한국(Korea=한반도)의 첫 접촉은 1853년 미 해군 戰艦 사우스 아메리카 호(the USS South America)가 부산에 입항했을 때 였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부산에서 한국(Korea=조선)지방 관리들과 우호적인 접촉을 가졌으며 10여일 후 그곳을 떠났다.

 그 후 수십년 동안 이따금 있었던 사소한 미국 선박의 遭難이라든가 救助, 미국인 송환 등이 있엇지만 많은 미국인들이나 한국인들은 미국과 한국의 실질적이고 중요한 첫 접촉은 1866년 不運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the General Sherman)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강제로 통상을 요구 하다가 조선 軍民의 火攻으로 불타고 침몰되었을 때의 접촉이라고 생각한다. 당초 한국인들의 대응은 정중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통상교역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했으며 셔먼호가 돌아가도록 요구했다.

 매우 낭만적인 朝美우호통상조약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든 것이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오해와 터무니없는 판단 착오로 제너럴 셔먼 호는 수심이 얕은 강에 좌초되었으며 선원들은 극도의 경솔한 행동으로 조선인들을 격분시켰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조선인들은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모두 살해했던 것이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1871년 해군 5백여 명과 해병 1백여 명을 태운 군함 5척을 동원한 對韓, 砲艦 외교에 나섰다. 훗날 이른바「1871 미국의 對韓武力시위 - 辛未洋擾」로 불리는 이 강화도 사건으로 조선인 3백5십여 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조선개항과 통상조약 체결이라는 목적달성에는 실패했다. 미국은 일본이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지 5년 후인 1882년에야 간신히 조선-일본 조약의 경우와 비슷한 통상조약 체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것이 朝美修好通商 조약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韓美관계가 한국과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좀 특이한 성격을 갖는 것이며 그러한 특수성이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과 미국간의 이 첫 번째 조약에 대해 당시의 조선인들은 友好조약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조약은, 공격을 당할 경우의 朝美우호 및 상호방위, 조선인들이 미국으로 이민할 수 있는 자격과 통상 면에서의 最惠國지위 부여, 한국에서의 미국 시민들에 대한 治外法權부여,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 내 기독교 宣敎활동 불간섭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한미관계의 시각차 불균형의 첫사례

 전문 14개조로 구성된 조약의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는 제1항은 한국에서 어떤 영토도 요구하지 않고, 弱者의 권리를 존중하는 이상주의적인 미국에 대해 얼마간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하는 내용이였다.

 더욱이 당시의 많은 한국 지도자들은 필요할 경우 미국인들을 일본인이나 중국인, 러시아인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한편 미국인들은 그 조항을 한국인들보다는 훨씬 덜 중요시했으며 시간이 가면서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것은 韓美관계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갖는 시각차, 불균형의 첫 사례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1905년 러-일 전쟁종결 평화조약 협상 때 미국이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다는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5년 후 미국정부가 일본의 조선병합을 반대하지 않자 그 충격은 절망으로 변했으며 이로서 조미(한미수호) 통상조약은 사실상 終焉을 고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은 얼마간 정신분열적이고 모순적인 것이었다. 미국정부 측에서는, 일본을 많은 미국 정치인들이 진취적인 아시아 국가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범 국가로 보았다. 그밖에도 일본과의 통상은 또 막대한 사업기회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1910∼1945년 사이「한국」(KOREA)은 없었다

 한편 미국 관리들은, 당시의 조선이 통상이나 무역 등의 사업적 상대로서 아무 쓸모가 없는, 후진적이고 지나치게 보수적인 나라로 보았다. 그러나 기업인, 선교사, 저널리스트 등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인들은 그들 정부 측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제와 협력하던 미국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생각에 동정적이었으며 워싱턴 당국이 동북아 외교정책을 재검토하도록 자주 로비를 하기도 하고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그들 나라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엔 한국(KOREA)이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을 무렵 대부분의 미국지도자들은 지구상에서 한국(KOREA)이란 나라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독일 패망 후 소련(USSR)이 미국과의 약속대로 對日선전포고를 하자(그것도 눈치를 보며 히로시마 原爆 이후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미군 지도자들은 한국(KOREA)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재빨리 찾아내야 했으며 소련 赤軍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군사분계선을 신속히 결정해야 했다.

 1940년대 후반기 중 미국은 남한이 북한과의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한국군이 국가 치안유지용 경찰력 수준 이상이 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제약했다. 그것은 북한군의 南侵으로 증명되었듯이 미국이 범한 또 하나의 誤判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전쟁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승만 한국(ROK) 대통령이 전쟁을 계속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휴전협정 서명을 거부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북한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북한은 한국(ROK)을 미국의 한낱 괴뢰국가로 간주했으며 전쟁은 기본적으로 그들과 양키(미국) 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대부분의 전투는 미국과 中共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북한인들의 감정과 생각은 1882년 조선인들과 닮아

 기억해야할 것은, 한국전쟁이,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한반도 유일합법 정부라고 생각하는 DPRK(북한)과 오만무례한 서방 제국주의 국가라고 간주하는 미국 두 나라간의 전쟁이었으며 두 나라간에 최종 해결 되어야할 문제라고 북한이 오랫동안 주장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지금도 한반도와 그 주변 해역에 대해 아무런 영토권이 없는 초강국 미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북한의 감정 내지 생각이 한 세기전, 1882년 朝美수호통상조약 당시의 한국인 조상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음을 간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간략히 하기 위해 남북한이 유엔이 가입했던 1991년으로 돌아가자. 북한은 고립의 껍질을 벗어나려 했으며 그 다음해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는데 동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다음 2년 동안 북한은 핵무기생산이 의심되는 지역의 접근을 거부했다. 1994년은 그 어느해 보다 중요한 한해였다.

 우선 북한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김일성의 아들이며「친애하는 지도자」김정이리 그를 계승해서 국가수반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북한은 미국과 일본, 한국으로부터 50억 달러 상당의 重油 무상 지원과 1기의 輕水爐 공급에 대한 대가로 핵 개발계획 凍結에 동의했다.

 1995년, 미국은 핵무기 제조 수준에는 못 미치는 플루토늄 생산 현대식 원자로(경수로) 2기의 對北제공을 돕기로 공식 동의했다. 동시에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국은 김정일이 북한을 통치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고의로 대북 약속의 이행을 지연시켰다.

 패배의 문턱에서 승리 거둔 북한외교

 그러나 사실은 1980년 이후 이미「친애하는 지도자」김정일은 북한의 일상사를 실제로 다스려 오고 있었다. 미국의 정보 당국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북한은 미국이 협상 합의 이행을 지연시키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고 자주 비난했으며 적어도 그러한 비난의 얼마간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처럼 북한의 對美 不信은 미국의 對북한 무시와 거이 비슷한 것이었다.

 그 다음 이정표는 2000년 평양에서 개최된 김정일-김대중 간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이것은 일부 관측통들의 눈에는 순수하고도 획기적인 남북 외교관계의 성공적 돌파구로 보였다. 그러나 다른 관측통들은 이러한 남북관계의 변화가 한국(ROK)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도 북한이 한국으로 부터의 원조를 증대시키는 2중 효과의 방편으로 보았다.

 그러나 양국 관계에 실질적 혹은 추측상인 어떤 큰 진전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2002년 1월 부시미대통령의 연두교서 연설로 큰 타격과 후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연두교서 연설에서 죠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惡의 軸"의 일부로 선언했던 것이다. 북한의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부시의 거의 對北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 해 늦게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김정일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했다.「친애하는 지도자」김정일은 1970∼80년대의 일본인 납치유괴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나 일본 대중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었다.

 같은해 10월 미국은 북한이 비밀핵무기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對北 중유 船積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2002년 12월 북한은 영변원조로의 재가동을 시작하고 국제 감시위원들을 추방했다. 다음 달 북한은 핵 확산금지 조약에서 탈퇴했다. 그렇게 돼서 2003년 4월 북한, 미국, 중국 대표단이 북한의 핵 야심에 관한 회담을 베이징에서 시작했다.

 그런 회담은 북핵위기 시작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다음 8월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관한 6개국 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으나 미국과 북한간의 견해차 간격을 메우는데 실패했다. 10월 북한은 핵폭탄 6개를 만들기에 충분한 핵물질을 재처리 가공했다고 발표했다.

 6자회담은 2004년 6월 공식 재소집 되었으나 결론 없이 끝났다. 그 후 북한은 9월로 예정된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 제4차 북핵 6자회담은 2005년 9월 북한이 안보와 원조를 보장받는 대신 그들의 핵무기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북한이 민간용 원자로를 요구함으로써 외교가 다시 한번 패배의 문턱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2006년은 아마도 6자회담에서는 가장 논란이 심했던 한 해였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 문제 미결에 대한 일본의 고조되는 분노문제를 다루어야 했을뿐만 아니라 북한은 군사적인 과시를 했다. 첫째로 7월에 성능이 의심스러운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으며 그리고 10월에는 핵무기 기준으로 볼 때 별 것이 아닌 원자무기로 세계를 화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북한의 오랜 전술은 원하는걸 얻을때까지 시간두고 기다리는 것

 그 다음해 2월 베이징 6자회담 중 북한은 중유 지원과 교환조건으로 북한의 主 핵원자로를 폐기하고 그다음 6월 국제 감시위원들의 북한 영변 핵 단지 복귀에 동의했다. 2007년 7월 IAEA(국제원자력기국) 감시위원들은 영변 원자로의 폐쇄를 확인했다. 10월 북한은 3개의 핵시설 불능화와 모든 핵 계획의 연말종결선언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2008년 1월 미국은 북한이 2007년말까지 모든 핵 활동 종결선언 시한을 지키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중국은 북한이 약속들을 지키도록 촉구했다.

 한편 북한은 핵무장 해제와 인권개선을 조건부로 하는 정책의 보수적인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킨 2007년 12월 한국 大選에 따른 남북한 관계의 冷却을 발표했다. 남북한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막후 외교협상이 강화되었다. 2008년 6월 북한은 오래 동안 기다렸던 자신의 핵관련 신고서를 6자회담 참가 국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 후 북한은 미국이「핵포기와 원조교환 거래」의 미국 쪽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북한은 영변원자로의 재가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시대통령은 임기말을 맞고 있으며 아마도 핵 개발 계획을 재개하겠다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보이지만 미국은 북한이 자신의 핵 단지 및 시설 전체에 대한 전면적인 접근을 허용하기로 동의한데 대한 보상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시켜주었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북한 미디어들은 6자회담 재개 용의를 밝힌바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 경험해온 바대로 앞으로의 6자회담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좀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 봐야할 것이다. 북한의 오랜 전술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북한은 미국을 격렬하게 욕하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믿을만한 나라로 간주

 그리고 우리 미국인들은 북한이 6자회담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북한이 한반도 전체의 유일 합법 정부가 된다는 그들의 목적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 북한이 6자회담 참가국중의 어느 나라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북한은 한국이 결국 언젠가는 그들을 흡수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이상 한국을 신뢰할 수 없다. 중국은 언제나 북방 국경의 敵이자 우방이었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일본보다는 좋게 생각하나 러시아의 對北 友誼는 진실되고 순수한 것이기보다는 상호간의 지정학적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록 작은 나라와라도 국경을 접한 경우 러시아는 어떤 다른 이웃 나라들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물론 일본도 수세기에 걸쳐 특별한 敵意를 갖게 해온 나라다.

 6자회담 구조의 존재 자체는 전쟁의 재발을 예방하는 안전판 구실을 하는 것

 이렇게 보면 북한에게는, 그래도 미국이 북한의 잠재적인 파트너 국들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믿을만한 나라라는 아이러니컬한 결론에 우리는 도달하게 된다. 다시한번 1세기전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영토적 위협이 되지 않고 동시에 패권세력에 대한 보호적 대항세력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나라이기도 하다.

 격렬한 反美선전들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다른 나라들과의 연계를 맺는 (말하자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확실하고도 안전한 수단의 하나로서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障碍가 있다. 미국은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어떤 제의를 하더라도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이데올르기 적으로 한반도의「또 하나의 한국정부」를 수용할 수 없다.

 바로 그 가능성이야 말로 북한(DPRK)의 실제적, 정신적 존재 자체에 대한 破門이요 저주다. 이 모든 것이 6자회담의 목표와 핵심 그 자체에 대한 항구적인「외통수 (바둑 장기 등에서 막을 수가 없는 수)」가 되는 것이다. 비록 오늘 지금 당장 어떤 목표가 달성된다 하더라도 내일이면 어디선가 한쪽에서 실망하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6자회담은 엄청난 시간과 자원의 낭비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6자회담의 당사국 모두가 DPRK의 마지막 대단원 때까지 그들 나름의 시간벌기를 하고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6자회담 구조의 존재 자체는 한때 中日전쟁으로 시작되었으며 한국전쟁으로 끝난 전쟁의 재발을 예방하는 안전판 구실을 하는 것이다.

 6자회담은 사실상의 동북아 평화구조 되고 있다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주변 4강이 그들의 관계를 조정하고 있는 동안 계속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잠재적 발화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 즉 1세기 전과는 다른, 오늘의 희망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6자회담이, 북한이 갑자기 내부적으로 붕괴한다든가 동북아의 패권국들에 어떤 예상치 못한 모종의 변화가 발생할 경우 서로 개인적으로 잘 알고 상대방의 의중을 신속히 그리고 정확히 간파할 수 있게 된 외교관들로 구성된 친밀한 다변적 외교관계의 찬넬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6자회담에서 흘러 나오는 거의 상투적인 실망의 소리들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은 그들이 공개적으로 선언한 한반도 비핵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젠 이미 사실상의 동북아 한반도 평화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6자회담은 그들이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이라고 말한 그 사명보다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결국 달성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급변하는 지역에서 6자회담과 같은 외교망은 이미 그 존재 자체가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을 막아주는 세계 最善의 보장 수단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한국논단1월호)

 톰 코이너(기고가·Soft Landing Consultin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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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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