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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㉕〕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 사회복무요원

Written by. 권익현   입력 : 2016-09-11 오후 12: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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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6년 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 ‘입선’ 글임. (편집자 주)

 나는 공익요원이다. 아니, 2013년 부로 공익요원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니 정식 명칭은 사회복무요원이다. 하지만 “공익”이라는 명칭이 입에 더 착 달라붙고 남들이 알아듣게 설명하기에도 편하다. 친구들이나 지인들, 어른들에게도 열에 아홉 번은 “사회복무요원입니다. 그게 뭐냐고요? 공익입니다. 하하.” 하고 설명한다. 그때 마다 친구들에게는 질투 섞인 야유를, 어른들에게는 어딘가 몸이 많이 안 좋은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스런 시선을 받곤 한다.

 처음 사회복무를 할 근무지를 선택할 때는 걱정이 되었다. 사회복무요원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근무지인 KTX 포항역의 복무 분야가 안전·재난지원이었다. 안전· 재난지원이란 어감에 철도 사고가 나면 그 현장을 수습하는 일을 하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재난에 준하는 상황이 발생한 적이 없고 직원분들을 업무를 보조해 드리는 일을 하며 복무를 하고 있다.

 직원분들도 사회복무요원들을 잘 챙겨주시고 잘 대해 주셔서, 사회복무요원들도 기분 좋게 고객들을 안내하고 직원분들의 업무를 도와드린다. 이제 내가 할 이야기들은 이러한 복무환경 속에서 겪은 일들이다. 나만의 특별한 사회복무요원 경험, 또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나누려 한다.

 개인적으로 코레일 역에서 사회복무요원이 하는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업무는 휠체어를 타신 분들, 시각장애인분들, 몸이 불편해 움직임이 힘드신 분들을 각각의 방법으로 안내를 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조그마한 실수로 그 분들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복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서툴렀던 그 때는 하나하나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휠체어 리프트를 기차에 대는 것도 신경이 쓰였고, 휠체어를 몰고 경사 진 곳을 갈 때 손잡이를 놓치진 않을지 걱정됐고, 시각장애인분들을 옆에서 인도할 때는 그 분들이 벽에 부딪칠까봐 불안했다. 하지만 역시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 슬슬 경험이 쌓여가자 그 분들을 안내하는 것이 편해지고, 부담이 덜 되었다.

 그날도 퇴근 전 마지막 열차 시간대에 시각장애인 한 분 있다고 출발역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까지 안내했던 시각장애인분들은 모두 KTX를 이용했지만 그 분은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처음으로 무궁화호를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기 위해 타는 곳으로 나가 그 승객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때까지는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시각장애인분들을 안내했지만 그 승객은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옷도 세련되고 멋있게 입어 안내인인 나만 없었으면 평범한 대학생으로 보일 것 같았다.

 조금의 호기심을 가지고 어디까지 안내를 하면 될지를 질문하자 역으로 질문이 왔다. 포항에 온 것이 처음인데 한 사거리에 있는 어느 안마소로 가려하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보통 시각장애인분들은 가족이나 지인이 열차 시간에 맞춰 데리러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질문을 받자 복무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교통편에 미숙했던 나는 당황하며 포항역의 관광안내소에 질문을 했고 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는 정확한 답변을 얻게 되었다.

 그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분은 원래는 시각장애인이 아니었지만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해 두 눈이 실명 되었다고 했다. 나이를 들어보니 나보다 서너 살 많은 형이었고 지금은 대학을 다니며 안마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술을 배우며 다니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취직을 돈을 벌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취직에 필요한 정보도 본인이 알아보고 그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본인이 부담한다고 했다.

 짧은 시간 속, 짧은 대화에도 그 형은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현재 그 형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 형과는 반대로, 나는 평소에도 느긋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로 부모님의 걱정을 샀었다. 사회복무를 하면서도 그저 출퇴근만 제때 하고 집에 가서는 마음껏 쉬는, 너무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록 몸이 좋지 않아 사회복무를 하고 있지만, 그 형에 비하면 큰 장애물도 아니었다.

 이 만남을 통해 무엇인가 깨달은 나는 이것저것 목표가 생겨 여러 가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통해 공인영어시험에서 목표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고, 현재는 한국사 검정능력시험, 비즈니스 중국어, 운전면허시험 등을 준비하고 있다. 비록 아직 얻은 결과는 많지 않지만 소집해제가 되었을 때는 여러 가지 자격증이나 공인 시험의 점수를 취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짧은 만남이 준 긍정적이고 큰 변화다.

 몇 번 씩 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해 낯이 익은 고객들도 있지만, 그런 고객들과 달리 그 날 이후로 그 형을 보지 못했다. 혹여나 소집해제가 되기 전에 그 형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면, 날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그 날 짧은 만남으로 큰 교훈을 줘 고맙다고, 그 교훈으로 많은 것을 얻어 간다고.

 앞서 기차를 자주 이용해 여러 번 도우미 서비스를 신청하여 익숙한 고객이 있다고 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한 노부부가 그렇다. 할아버지의 거동이 불편하셔서 할머니께서 부축을 하시고 포항역으로 오시면 막내였던 내가 휠체어로 모시고 가 열차에 태워 드렸다. 대구에서 오실 때는 열차를 기다리다가 다시 휠체어로 시내버스를 타는 곳까지 모셔다 드렸다. 이 노부부는 거의 매주 월요일 아침에 KTX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가시고 저녁 즈음에 무궁화를 타고 오셨다.

 매주 월요일마다 모셔다 드리게 되면서 반갑게 인사도 하고 안부도 여쭙게 되었다. 이것저것 궁금한 점도 많았지만 혹시라도 질문이 무례할까봐 여쭙지 못한 질문도 많았다. 조금 알게 된 바로는 할아버지께서 머리에 혹 같은 것이 생겨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셨고 후유증으로 말씀도 제대로 못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증상을 치료하시기 위해 포항에서 대구까지 기차를 타고 가셨다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치료가 끝나면 포항으로 돌아오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도우미를 해드릴 때마다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해 주시고 한참 어린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씀 해 주시니 당연히 해드려야 할 일을 한 나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 더욱 신경 써서 휠체어 도우미를 해 드렸다. 자주 오시니 월요일에 그 분들을 모셔다 드리는 것이 일과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월요일에 그 노부부가 보이시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무슨 일 있으신가, 치료가 다 끝나셨나 하는 궁금증이 따라 왔지만 몇 주 뒤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다.

 어느 월요일에 휠체어 서비스 요청이 있어 휠체어를 들고 나가보니 그 노부부가 서 계셨다. 오랜만에 뵙는 것이 반가워 인사를 드리고 열차까지 모셔 드렸다.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해 주시는 모습이 잘 지내신 것 같아서 조금 안도했다. 항상 이용하시던 열차를 그날도 이용한다고 하셨다.

 열차를 타시는 것까진 별 다른 것이 없었다. 그날 오후가 되어 무궁화호를 타는 곳으로 모시러 갔고 휠체어에 앉으신 후 여쭈었다. “오늘도 시내버스 타는 곳으로 모셔다 드리면 되죠?” 그러자 할머니는 “오늘은 내가 차를 몰고 왔으니 먼저 가 주차되어 있는 차를 역 앞으로 가지고 오겠다. 천천히 할아버지를 모시고 역 앞으로 와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먼저 출발하시고 나는 처음으로 할아버지만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안보이시니 불안하신지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처음 들어보는 나로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할아버지께서 안심하실 수 있게 할머니는 먼저 차를 가지러 가셨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시기 시작했고 급기야 내가 몰고 있는 휠체어에서 갑자기 일어서시려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휠체어 모는 것을 멈추고 이렇게 일어나시면 위험하시다고, 앉아 있으시면 할머니께 모셔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차가 다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할머니와 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할아버지께 서는 계속하여 일어나려고 하시며 더욱 큰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나에게 하고 계셨다. 그러다 심지어는 다른 열차를 타고 오신 승객들에 게도 삿대질을 하시며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당황했지만 그 분들께 대신 사과를 드리며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려고 노력 하며 할머니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시질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상황에 대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왜 먼저 가셔서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드시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왜 나에게 이렇게 소리를 치시는지’ 등등의 생각이 드는 순간 휴대폰으로 후임에게 전화가 왔다.

 그 후임은 할머니 또한 나와 할아버지를 못 찾으셔서 매표창구로 오신 후 혹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지 물어보셨다고 말했다. 그렇게 연락이 된 후 겨우 만나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가져오신 소형 트럭에 태워드린 후 드디어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할머니께서 내 손을 잡으시더니 손가방 안에서 대구에서 사오신 소보로빵 하나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우리 도와 줄 때마다 너무 고마워서 오늘 빵 하나 사왔어요. 맛있게 먹어요.” 이러한 말씀을 듣자 그 순간 짜증이 사라지고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셔서 이렇게 대구에서 빵까지 사오셨지만 나는 그 짧은 시간을 못 참아 짜증이 나 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순간 멍해진 나를 앞에 두고 노부부의 트럭은 출발해 포항역을 떠나고 있었다.

 이분들은 이 날 이후로 한 번도 월요일에 포항역에 오셔 도우미 서비스를 신청하신 적이 없다. 가끔씩 이분들이 생각날 때마다 잘 계신지, 할아버지의 몸 상태는 좋아지셨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다음번에 뵐 때 꼭 인사드리고 싶다. “건강하시죠? 그 때 주신 빵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더라고요!”

 2015년 기준으로 사회복무요원은 50,000여명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사회복무 경험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은 나밖에 하지 못한 것들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회복무요원들이 특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그들이 만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업무는 그들이 아니면 아무도 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50,000여명의 사회복무요원들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자부심을 가집시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사회복무요원들이니.”(konas)

권익현(한국철도공사대구본부 포항역)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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