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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리멤버 솔저스> 4.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

군번 없는 용사… 어린 나이 불구 애국심으로 뭉쳐
Written by. 국방일보   입력 : 2020-03-27 오전 10: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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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국방일보에서 게재하는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리멤버 솔저스’ 기획 기사를 국방일보와 협조하에 시리즈로 전재한다.[편집자 주]

 매일 일상처럼 다가오는 지금의 평화는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평화의 이면에는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이들의 헌신이 자리 잡고 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참전용사들의 애국과 희생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전쟁 영웅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헌신과 희생을 되짚어보는 국방일보 기획 ‘리멤버 솔저스’, 네 번째 주인공은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다.  

전쟁 발발 후 무방비 강화도 지키고자 소년 2000여 명 자발적으로 결성

 어린 나이에 자발적으로 국토방위에 나섰고 적잖은 공적도 세웠다. 이념의 대립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지만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내 고장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전쟁 후 다시 군에 입대해 국방에 기여했다. 6·25 당시 14~17세 나이로 강화도를 지킨 강화 청소년유격대원의 얘기다.

 ▲ 이용환(맨 왼쪽)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 사무국장이 인천 강화군 강화군재향군인회 1층 사무실에서 벽면에 전시된 사진을 가리키며 동지회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다. ⓒkonas.net

 

 강화 청소년유격대는 전쟁 발발 직후 청년 대부분이 전장으로 나가 무방비 상태가 된 강화도를 지키고자 마을 소년들이 애국충정의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결성한 조직이다. 당시 2000여 명의 소년병은 치열한 격전을 거듭한 끝에 고립된 강화도를 사수했다. 이들은 강화 민간인 특공대로부터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고 마을 순찰, 치안 보조활동, 정보수집, 경계근무 등을 하며 향토 방위에 임했다.

낡은 소총 몇 자루·몽둥이로 정규군 못지않은 활동 펼쳐...향토방위특공대와 방어작전 투입

 소년들은 강화향토방위특공대의 지휘를 받으며 강화 방어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1950년 12월 치안 부재 지역이 된 강화도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순수 민간인 24명으로 조직됐다. 특공대는 면 단위로 3명씩 대원을 파견, 이미 조직된 청소년유격대와 함께 부대를 구성해 강화방어 작전에 나섰다.

 이들에게 무기라고는 낡은 소총 몇 자루와 몽둥이가 전부였지만 정규군 못지않은 활약을 펼치며 우리 군이 1·4후퇴 이후 서울을 재탈환할 때까지 적으로부터 서해지역의 요새인 강화도를 지켜 6·25 승전에 기여했다.

돌머루전투·당산전투서 치열한 격전

 이들은 돌머루전투와 당산전투 등에서 치열한 격전을 거듭한 끝에 고립된 강화도를 사수했다. 한상용(86)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장은 “소년병들은 1·4후퇴 직후 강화 돌머루 포구에서 특공대와 매복작전을 펴 수많은 인민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설명했다. 또 “서울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길목인 당산에서 인민군과 백병전을 벌인 특공대원 14명과 소년병 5명 등 19명이 전사하고 부상병이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끝내 인민군을 물리치고 강화를 사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청소년유격대는 1950년 7월 적의 포화를 맞아 추락한 미 5공군 소속 B-29 폭격기에서 떨어진 미군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당시 마을 주민과 함께 미군 구출작전에 나선 박상인(87)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원은 “평양 폭격에 나섰던 군 B-29 폭격기가 인민군 포에 맞아 남하하다가 강화도 서도면 상공에서 추락하자 낙하산을 타고 바다로 떨어진 미군 7명을 구조했다”며 “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재우면서 건강을 살폈다”고 회고했다.

수많은 인민군 생포하고 강화 사수  

 강화청소년유격대는 그들을 지휘하던 향토방위특공대가 다른 부대로 편입되거나 해산되면서 구심점을 잃고 자연스럽게 해산됐지만, 군번 없는 용사로서 대한민국과 강화도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친 소년병들의 애국과 희생정신은 강화 땅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용환(82)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 사무국장은 “휴전 후 강화가 대한민국에 머물게 된 것은 목숨 바쳐 강화를 사수한 청소년 유격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젊은 세대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우리가 싸워서 지켜낸 이 땅의 역사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터뷰] 한 상 용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 회장

“똘똘 뭉쳐 내 고장 지켜냈다는 자긍심으로 살아와” 

“어린 나이에 힘들고 두려웠지만 내 고장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쳤죠. 6·25전쟁 당시 소년병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강화는 대한민국 지도에 없었을 겁니다.”

 ▲ 한상용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 회장 ⓒkonas.net

 

 인천 강화군 강화군재향군인회 1층 사무실에서 만난 강화청소년유격동지회 한상용(사진) 회장은 “당시 부녀자와 노인만 남았던 강화도를 소년병들이 지켜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회장은 1950년 17세의 나이에 펜 대신 몽둥이를 들었다. 하루에도 산을 몇 번씩 뛰어오르는 유격훈련을 받았고, 추운 겨울 해안에서 숙식하며 경계근무를 섰다. 변변한 무기 없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강화 땅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총으로 무장한 인민군에 맞섰다. 그러다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탈출하기도 했다. 당시 한 회장을 비롯한 소년병 2000여 명이 강화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났다.

 한 회장은 “당시 강화도는 육지와 연결된 다리가 없어 고립된 상황이었다”며 “인민군으로부터 강화를 사수한 것은 소년병들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당시 추운 겨울이라 누더기 솜옷을 입고 있었는데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못해 이가 들끓었다. 항상 굶주렸는데 특공대가 비상식량으로 만든 인절미가 소년들에게도 지급돼 연명할 수 있었다”고 어려웠던 상황을 회고했다.

 한 회장은 “휴전 후 공군에 입대해 수원비행장에서 복무하다가 만기 전역했다”며 “나 같은 소년병 대부분이 대한민국을 위해 두 번씩 군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회장은 “당시 공부는 못했지만, 소년병들이 똘똘 뭉쳐 강화도를 지켜냈다는 것에 커다란 긍지를 갖고 평생을 살아왔다”며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후손들이 국가안보와 평화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한편 조국을 위해 헌신한 소년병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글·사진=안승회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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