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 에서 나타난 한국의 시위문화, 이대로 좋은가
Ⅰ. 문제의 제기
민주사회에서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위는 일종의 정치참여나 사회참여로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한 민주주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동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민주사회의 자유로움과 다원성을 보여주는 표시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려주는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민주사회에서 국민의 불만이나 민심의 소재를 알 수 있는 비상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위는 제도적인 참여와는 다르지만, 정당한 정치참여의 한 범주로 간주되어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도적인 참여는 아니기 때문에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일정한 질서와 규범, 및 시민적 예의가 필요하다. 집단시위에서는 다중(多衆)이 참여하고 또 다중의 목소리가 표출되기 때문에 원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특별히 폭력적인 양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위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중들의 시위에는 엄격한 제약조건이 따른다. 만일 그렇지 않고 개인이나 집단이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이른바 시위공화국 이 될 수는 있겠으나, 시위공화국 이란 명칭은 교통사고왕국 이라는 말처럼 부끄러운 오명의 대명사일 뿐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현상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체감할 수 있는 현저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시위가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권위주의시대에는 시위자체가 민주화를 위한 운동의 중요한 범주로 평가되었다. 그러므로 항쟁 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시위는 일상적인 것이 될 만큼 양적으로 늘었을 뿐만 아니라 강도도 상당히 세졌다. 그 결과 시위의 빈번한 발생과 그 강도에 대하여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을 뿐, 민주주의의 추동력으로서 누리던 신성성이나 희귀성의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다. 최근에 있었던 미국산 쇠고기 반대를 위한 촛불집회를 둘러싼 논란이야말로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니겠는가. 금년 5월부터 시작하여 8월 까지 계속된 촛불집회는 그 지속성에 대하여도 논란이 되었지만, 의사표출의 형태에 대하여도 여론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시위의 여러 가지 행태 가운데서도 특히 경찰의 물대포를 가로막은 유모차부대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자녀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하여 나섰다는 어머니가 정작 자녀의 안전을 위험에 빠트리는 역설적 행위를 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또 복면을 쓰고 경찰차를 부수며 경찰의 옷을 벗기고 폭행을 하며 염산까지 던진 시위의 양태는 민주시민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전한 상식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촛불집회를 보는 시각은 우리사회의 다른 많은 정치 사회적 쟁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입장, 특히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 따라 찬반양론이 갈리고 있다. 반미주의를 표방하며 이명박 정부에 비우호적인 사람들은 오죽하면 유모차부대가 나왔겠느냐고 주장하는가하면, 한편 과연 그런 유모차부대의 어머니의 행위가 진정한 모정의 표현일까 하며 의구심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유형의 찬반 논란이 유감스러운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에서 진실이나 정론(正論) 은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는 이득이 되고 누구에게는 손해가 된다는 식의 손익계산법이나 정파적 입장만이 있을 뿐이라는 상대주의적 입장만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야의 입장이나 정치적 이념, 혹은 가치관이나 입장 차이를 떠나 하나의 정론 이 있어야하는 중차대한 사안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민주사회에서의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 이나 공동선(common good) 의 개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행위라도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에게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모두 초래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공동선 의 개념존재자체를 불신하기는 쉽다. 그러나 공동선 이라는 것은 없고 모두가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나 손해의 범주로만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가 그 구성원이 되어 살고 있는 민주공동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사회에 바람직한 시위문화에 대한 정론이 형성되어있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지금이야말로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는 우리 시위문화의 현 주소를 돌아보고 냉철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다른 모든 행위처럼 집단시위도 민주적인 틀과 법 질서안에서 이루어져야지 자신들의 요구만은 정의롭고 신성하다는 독단적 사고나 아집에 빠져 우리 모두가 합의한 민주공동체의 가치나 민주주의적 규칙을 넘어서는 초법적이며 극단적인 형태를 때는 행위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폭력이나 피해를 함의하는 위압적인 성격의 시위는 금물이다. 그것은 말로는 평화시위지만, 실제적으로는 위협적인 시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노사분규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시민들이 참여하는 시위는 주로 정부나 정부의 정책에 대한 항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엄밀한 위미에서 시위에는 단순히 시위참여자 대(對) 정부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위참여자 대(對) 일반시민들과의 관계가 있으며, 특히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동료시민들에게 불가피한 영향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민적 예의(civility) 나 시민적 우정(philia politike, civic friendship) 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동료시민들에게 미치는 파장이 크다면, 이 문제는 시위하는 사람들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논의에서는 최근에 있었던 촛불시위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적 입장에서 한국의 건강한 시위문화정착을 위한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Ⅱ. 한국의 시위상황
우리사회에서 집단시위는 어느덧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경찰청이 최근 자유선진당의 한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5년간 집단시위 현황'에 따르면,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한 해 평균 1만1161건의 집단시위가 전국에서 발생했고, 시위 참가자 수는 연평균 272만7411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단시위는 2004년 1만1338건(하루 평균 31.0건)에서 2006년 1만368건(하루 평균 28.4건)으로 줄었다가 2007년에는 1만1904건(하루 평균 32.6건)으로 다시 늘어났다. 올해에는 8월 말까지 총 9180건, 하루 평균 38.3건으로 지난해보다 증가 추세에 있다.
경찰청은 "집단시위는 노사문제가 가장 많고 각 지역별 이해관계나 다양한 이익집단의 민원과 관련된 집회도 많다"면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각 계층의 민원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집단시위 중 불법 폭력시위에 대해서는 "2004년 91건, 2005년 77건, 2006년 62건, 2007년 64건으로 줄어들다가 올해에는 이미 77건이 발생해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이처럼 올해 들어 집단시위가 늘어난 것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의 영향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 4월까지 매월 700~800건이던 시위 건수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5월에 1222건, 6월에는 1773건으로 급증했다.
그렇다면 그 시위비용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이와 관련, 흥미로운 보고서가 최근에 나왔다. 촛불시위로 인해 우리 사회가 지불한 직 간접적 비용이 모두 3조7500억원으로 추정된 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촛불시위의 사회적 비용'이란 제목의 연구보고서에서 직접비용 1조574억원과 간접비용 2조6938억원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한경련은 촛불시위가 발생한 5월 2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사라진 8월 15일까지 106일간의 비용을 산출했다.
직접 피해액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서울 강북 지역 상인들의 영업손실로 9042억원이었다. 한경련은 서울 소공동과 을지로, 종로 1 2 3가에 위치한 2만6603개 업체의 피해 금액을 추정했다. 경찰이 촛불시위 때문에 지출한 비용도 839억원에 달했다. 이는 시위 관리 활동으로 인해 시위 이외의 치안과 법질서 확립 같은 경찰 본연의 업무가 소홀해진 것에 따른 기회비용과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입은 상해에 따른 치료 비용 등을 합친 것이다.
촛불시위로 인한 간접피해는 직접피해 규모를 압도했다. 사회 불안정에 따른 거시경제적 비용만도 1조8378억원이고 공공개혁 지연에 따른 비용도 8561억원으로 산출됐다. 한경련은 "시위와 집회 등은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투자 위축과 경제성장률 감소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01년 이후 집회가 많았던 해에는 경제성장률과 설비투자가 감소되거나 정체됐다. 집회가 많았던 2003년의 경우 설비투자 증가율이 마이너스 1.2%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경련은 "촛불시위로 사회 불안정이 1년 이상 지속되면 거시경제적 비용은 3조7000억원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분석들과 통계치는 우리집단시위가 고비용의 현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비용만의 문제는 아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제도다. 그런 점에서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비용보다 중요한 것은 시위의 철학이다.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는 이유와 철학이 건강한지가 문제인 것이다. 만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한 이유나 명분이 비교적 합당하다면 고비용은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동기나 명분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또 참여양태도 정도(正道)를 벗어났다면, 중대한 성찰거리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Ⅲ. 촛불시위참여자들의 인식의 틀 은 무엇이었나
이번의 촛불시위는 일반적인 노사분규와 관련된 시위나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시위와 달리, 적어도 초기에는 청소년, 주부, 직장인등,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 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참여 는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이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았던 로빈슨 크루소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나,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디엔가 참여하고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 참여 에 대한 개념규정은 어렵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일이나 활동을 함께 하거나 문제의 일이나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운동경기, 수채화 그리기 등과 같은 각종 취미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가하면, 가족이나 직장, 동호인들의 모임과 행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주거조건이나 환경문제, 교육문제 등을 다루는 각종 공청회나 토론회에 참여할 수 있다. 때로는 정당에 가입하여 정당 활동에 몰두하는가 하면 특정 지지후보를 위해 자발적 봉사요원으로서 선거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참여행위 모두를 시민의 정치참여 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민의 정치참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고 하겠다. 첫째, 직업정치인이나 정치전문가가 아닌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의 행위이다. 둘째, 공공문제에 관한 영향력 행사를 목적으로 한다. 셋째, 단순한 정치비전이나 소견을 표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명시적이고 직접적 행위에 의한 참여를 말한다. 넷째, 정부에 대한 지지행위 및 투표나 정당가입과 같은 관행적 참여행위(conventional participation)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환경보호활동 등, 각종 합법적인 활동은 물론, 심지어는 불법적 시위활동과 같은 비관행적 행위(unconventional participation) 를 포함한다. 합법이냐 불법이냐 하는 문제는 관행이냐 비관행이냐 하는 문제의 구분처럼, 모호하고 불명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정치참여는 오랫동안 비관행적 이었고 또 불법적 이었으나,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면서 관행적 이고 합법적인 범주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정치참여는 적어도 공공선이나 공공정책과 연관된 시민의 관행적 행위 나 비관행적 활동 을 포괄하는 정치적 참여행위를 함의한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 개인은 참여를 통해 법적 사회적으로 정치공동체와 연결된다. 시민참여의 필요성은 바로 개인이 특정한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이자 공동체가 부여하는 권리와 책임의 담지자(擔持者) 라는 점에서 성립한다. 소극적으로는 권리주체로서 국가의 권위와 권력의 부조리한 속성에 의해 침해받지 않기 위해 국가권력의 오 남용을 견제해야할 필요성을 들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시민 개인 자신의 요구와 견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자신의 정치적 선호를 공공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특히 공리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주장해왔던 내용이다.
즉 최대다수의 행복 을 정치적 선 이라고 상정하고 개인을 자기 자신의 이익과 선호를 추구하는 자율적 존재로 전제한다고 할 때, 참여를 통해 시민 자신의 정치적 선호를 공공정책에 반영하게 되는 현상은 적극적 선 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극적으로나 적극적인 차원에서 시민참여가 현실화된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실제 간의 당혹스러운 괴리도 상당부분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주주의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좋은 정치적 권위 의 기준이라면, 통치의 주체로서 시민들의 정치적 선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권위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시민들에게는 무책임한 대의민주주의 의 작동양태 등, 의민민주주의 의 이상과 모순되는 현실의 각종 제도와 행태들에 직면할 때 마다 문제의 부조리와 모순들을 인식하고 참여를 통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민주시민성(democratic citizenship)과 관련하여 그에 걸맞는 자질(quality) 을 거론할 경우 그 중요한 가치로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은 시민 , 혹은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 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물론 공리주의적 논변이 모든 것은 아니다. 비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치참여의 또 다른 현저한 효과를 거론할 수 있는 여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참여를 통해 시민의 자질과 품격이 높아질 수 있다면, 비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놀라운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앙적 참여를 통하여 종교인의 자질이 개선될 수 있다는 이치와 유사하다. 시민의 자질향상이 중요한 이유는 자명하다. 두말 할 나위 없이 민주주의의 질(質) 은 시민의 질(質) 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이 통치의 주체가 된다고 할 때 시민의 질 이 좋아야 민주주의의 질 도 높아질 수 있다. 전자는 후자의 충분조건 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필요조건 은 된다. 이 맥락에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온다 는 준칙의 은유적 의미를 음미해 본다면, 양질의 시민들로부터는 양질의 민주주의가 나오고 저급한 시민들로부터는 저급한 민주주의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참여가 시민의 자질향상과 관련,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점을 꼽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자율적 시민 혹은 개화된 시민 을 만드는데 유효하다. 이것은 루소나 밀로부터 유래하는 고전적 주장이나,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시위문화가 저비용의 선진국형이 아니라 고비용의 후진국형에 머물러 있는가. 또한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의 시위는 왜 법과 질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차원이 아니라 법과 질서 그 자체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에게 고유한 역사적 배경이나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인식의 틀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시위의 패러다임에 관한 문제로, 이번의 촛불집회와 관련, 네 가지의 흐름이 현저하다.
첫째로 시위는 참여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이 있었다. 여기에는 간접민주주의나 대의민주주의만으로는 시민들의 의견이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직접 시민들이 나서는 행태가 그 자체로 바람직하고 또한 이것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라는 것이다. 촛불시위를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라고 생각하고 예찬론까지 나온 데는 이런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로 시위는 정당한 권리주장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기본권에 해당하는 권리들은 어떤 질서나 공권력의 존재이유보다도 선행하기 때문에 그런 기본권에 해당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다른 요구보다도 앞서는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다는 입장이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특히 건강권수호가 주요이슈였다. 정부가 광우병의 가능성이 농후한 미국산 쇠고기수입을 결정하여 국민의 건강권을 심대하게 침해했기 때문에 이 훼손된 권리를 복원시켜야한다는 논리가 작용했다.
세 번째로 시위를 시민불복종의 문제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현저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가치나 뜻에 맞지 않는 정부의 정책을 접했을 때 이를 반대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시민불복종의 범주로 생각한다. 시민불복종은 악법이나 잘못된 정책보다 정의가 우선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결정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불복종의 의미가 컸다.
네 번째로 그런 절박한 기본적 권리를 주장하고 쇠고기 수입정책에 불복종하는 것이 시위의 목적이기 때문에 시위는 법을 초월한다는 시각이다. 특히 평화시위면 그 모든 요건들, 시민불복종, 정당한 권리주장, 참여민주주의의 국민주권 등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흥미로운 것은 평화시위면 됐지, 불법시위와 합법시위의 구분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는 점이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즉 폭력시위가 아니면 정당화된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런 네 가지 입장은 서로 간에 맞물려있었다.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정치의 대표자들이 미국산 쇠고기수입 결정으로 국민의 건강권을 훼손했기 때문에 직접 잘못된 법이나 정책의 수정을 요구하며 불복종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런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을 수정하려는 시위는 직접 민주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에 법의 지배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은 단순히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
Ⅳ. 올바른 시위문화를 위한 인식의 틀
1. 촛불시위참여자들은 참여민주주의의 본질을 잘 이해했는가
시민들이 서울시청앞 광장에 모여 시작된 촛불집회처럼, 광장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연설도 하며 상호간의 관심사를 나누고 때로는 시위를 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전통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곳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러한 곳을 아고라(agora) 라고 했고, 로마인들은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이라고 했다. 이 로마시대의 광장인 포룸 은 오늘날 담론의 장을 의미하는 포럼(forum) 이라고 하는 영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그 동안 우리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은 했지만, 어떤 민주주의모델을 토착화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시민단체의 활성화된 역할에 기대를 걸기도 했고, 또 한 동안 토론공화국 혹은 심의민주주의 라고 하면서 기존의 대의민주주의이외의 대안들이 부분적으로 시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들이 저급한 포퓰리즘을 부추킨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번의 촛불집회참여자들과 동조자들은 촛불집회를 광장민주주의의 구현으로 주장했다. 관심의 초점은 촛불로 상징되는 이 광장민주주의가 양질의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광장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만, 공원과 다른 곳이며, 시장과도 다르다. 특징가운데 하나가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 가운데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온다는 데 있다. 연설가들이 연설을 하면 지나가다가 경청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인기가 있으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된다. 거기서 정치가 가 나오고 선동가 도 나오게 마련이다.
아테네의 역사를 보면 그런 사람들 중에 도편투표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은 데모스테네스가 있었고,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도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받은 알키비아데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광장에서 나라의 일 , 즉, 플라톤이 폴리테이아(politeia) 로 불렀던 것, 혹은 로마의 키케로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로 지칭했던 것들에 대하여 연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청중들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때로는 조국애에 불타오르도록 했으며, 혹은 성난 파도처럼 분노의 함성을 지르게 하기도 했다. 이점과 관련, 페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는 역사에 남을만한 여러 가지 명연설과 명연설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틸레네의 반란과 관련, 서로 상반되는 주장으로 유명해진 아테네의 클레온과 디오도투스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두 사람은 미틸레네의 반란군들을 어떻게 처형할 것인가를 두고 각각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연설을 했는데, 모든 남자들을 처형하자는 클레온의 입장에 비하여 남자가운데 10분의 1만 처형하자는 디오토투스의 온건한 의견이 승리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가 절제력이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의 해전 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충동과 감정, 편견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테네군이 아르기누사의 해전에서 어렵게 스파르타군과 싸워 승리하여 돌아오는 과정에서 전투의 지휘자들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고발자들은 그 장군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주장했으며, 많은 민중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였다. 널빤지를 타고 있다가, 구조된 한 병사가 동료들이 죽어가면서 장군들을 고발해 줄 것을 당부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민중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전투에 참전했던 장군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을 옹호했던 장군들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장군들이 사형을 당했다. 이 투표에서 소크라테스 혼자만이 반대를 했지만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중들은 유능한 장군들을 스스로 죽인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이번에는 장군들을 고발했던 자들을 재판해서 유죄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이 사건과 관련, 순간적인 격정에 빠지는 민회의 취약성, 대중적 결정의 불안정한 기반, 충동적 행위에 대한 견제 체제의 부재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의 잠재성, 변론 기술에 따라 결정되는 행위 방향, 파벌들 간의 충돌 등을 읽을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2,400년이 지났지만, 한국 촛불집회의 참여자들이 경청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인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즉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나 그 발언을 듣는 청중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온전한 이성적 판단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성적 판단능력이 부족하다면 광장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어찌 광장 민주주의뿐이겠는가. 국가공동체의 전도도 암담한 것이다. 촛불집회를 통해 나타난 한국의 광장 민주주의는 그런 점에서 유감이다. 일상적 사람들이 소박한 꿈을 정상적인 언어로 말하고 절박한 욕구와 필요를 이야기하며 서로 간에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기 보다 저급한 포퓰리스트들 이나 소피스트들 이 만용을 부리며 활동하는 왜곡된 정서의 장이며, 선동가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의 성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시민들이 한 방송사의 PD수첩에서 나온 의도적으로 왜곡된 보도를 근거로 해서 미국산 소= 광우병 이라는 도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체질적으로 광우병에 약하다는 보도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때 아닌 광우병공포가 한국사회를 휩쓸었다. 또 미친 소 에서 비롯된 미친 이라는 서술어는 촛불시위자들이 혐오하는 모든 것에 붙었다. 미친 교육 , 미친 정부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광우병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뿐만이 아니었다. 출범한 지 얼마 안된 정부를 두고 퇴진하라는 주장도 나왔고 인터넷에는 대통령탄핵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이러한 발언은 대선불복종주의자 가 아니면 데마고그 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빛을 발하려면, 그런 부조리한 선동과 자극보다 이성이 살아 꿈틀거려야 한다. 대의민주주의가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나, 선거민주주의가 채우지 못하는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광장 민주주의의 어젠다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근본주의적 성향의 반미주의를 관철하려는 계기로 삼았다면, 반미포퓰리즘 의 광장에 불과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선거로 잃어버린 권력을 길거리에서 다시 찾으려고 했다든지, 이른바 종이돌(paper stone) 에 의하여 심판받은 것을 폭력시위로 되돌리려고 했다면 그리스말로 채울 수 없는 탐욕 을 의미하는 플레오녹시아(pleonoxia) 나 권력에 대한 금단현상에 다름 아니다.
민주사회의 시민들이라면 교회지휘자의 말을 듣는 성가대원처럼 항상 유순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혹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말을 듣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순종적으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이의도 제기하고 비판도 제기하며 혹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침몰하는 난파선의 사람들처럼 상식과 이성을 잃는 등, 무례해서는 안된다. 이성적 판단만 하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을 무책임한 방송에 의한 선동과 충동에 의해 움직였다면, 그리하여 저급한 욕설들을 사방에 써 붙이며 행동했다면, 그런 광장 민주주의라면 이성을 가진 대중 민주주의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민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우중(愚衆)민주주의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촛불시위와 같은 집단시위를 참여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보더라도 심각한 문제는 참여의 양적 문제보다 질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선호에서 배고픈 소크라테스 의 철학적 선호를 기대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TV의 선전, 선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무비판적 충동적 선호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혹은 근본주의자들의 묻지마 선호 에 비견될 정도의 반미주의와 같은 맹목적 선호라면, 그러한 선호를 만족시키기 위한 참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혹은 시민들이 반미주의 등, 이념적 경향이나 집단적 사고에 함몰되어 있고 그 결과 통합적 정체성 보다 파편화 된 정체성 , 심지어 적대감까지 가지고 있을 때, 그러한 상황에서의 정치참여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여기서 나쁜 친구를 갖느니 아예 친구가 없는 편이 낫다 는 준칙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성적 참여 보다 감성과잉의 참여 가 일반적이라면, 그 결과 이성결핍과 감성과잉으로 이어지는 참여가 주류를 이룬다면, 뜨거운 가슴 만 있고 차가운 머리 는 없는 참여인 셈이다. 혹은 정치적 참여로 인하여 시민들이 개화된 시민이나 반성적 자율성의 시민이 되기보다 편파적 시민 혹은 당파적 시민 이 된다면, 시위를 통한 정치참여는 축복이라기보다 저주가 되지 않겠는가.
비록 시위를 통한 시민참여가 정당화될 수도 있겠으나, 선전선동에 의해 현혹되어 참여의 질 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무분별한 참여의 확대는 자칫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을 들어낼 뿐이다. 시민참여가 정치권위의 정당성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양적 참여뿐만 아니라 질적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참여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시민의 참여의지의 강화뿐 아니라 참여능력의 함양이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시위참여자들이 경시했던 원칙: 예의바름 과 위해원리
이번 촛불시위의 또 다른 특징은 시위가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시위참여자들은 서울 시청앞 광장에 모이기도 했고 인터넷에서는 다음 아고라에서 결집된 힘을 과시했다. 특히 촛불시위의 지속성과 역동성은 다음아고라의 인터넷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촛불시위참여자들의 인터넷 의사소통과 의사 표현은 활발함을 넘어서 지나친 공격성과 무례함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촛불시위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인격모욕과 욕설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나 집단사고식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경향을 노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촛불 시위로 말미암아 사이버 테러를 당하는 사람이나 회사들도 생겨났다. 물론 인터넷 소통에는 익명성의 유혹이 있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아고라가 격정과 모멸감, 거친 말들이 오고가는 담론의 장이 된 것은 유감이다.
다음아고라만을 현대판 아고라 라고 지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시민사회는 물론, 인터넷도 공동사회, 즉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의 특성이 들어나지는 않지만, 공손함과 예의, 정중함이 지배해야하는 공동체, 즉 서로간에 낯선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만나는 거대한 아고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낯선 사람들사이의 예의는 더욱 중요하다. 이미 이러한 문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적 우정(civic friendship) , 필리아 폴리티케(philia politike) 라는 말로 표현했다. 서로 간에 모르는 시민들사이에도 우정이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시민들이란 결국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이며 같은 공동체에서 삶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17세기 영국의 샤프트츠베리(A. A. C. Shaftesbury)는 공론의 장이라면 악의와 욕설이 판치는 곳이 아니라 위트와 유모가 있는 논쟁, 즉 온화한 충돌(amicable collison) 에 의해 거칠고 모난 면을 둥굴게 만들어야 하는 장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예의바른 위트(courtly wit) 야말로 시민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의 장에서 필요한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는 언론의 자유도 있고, 표현의 자유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절제없이 다 표현할 수 있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여과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알라신을 비아냥거리는 만화를 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알라신을 비아냥거린다고 해서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알라신을 모욕하는 것은 그 신을 믿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행위는 금지된다.
인터넷이 자유의 영역이고 평등의 영역이라고는 하지만, 그 익명성이 가지는 위험이 있다. 그것을 고대의 플라톤은 기게스의 반지 로 표현했다. 기게스라는 양치기가 우연히 풀밭에서 반짝거리는 반지를 주웠는데, 그 반지를 끼니깐 공교롭게도 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마술 반지 였다. 그 양치기는 이 반지를 끼고 왕궁으로 들어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왕비를 차지하게 된다. 이와 같은 황당한 사례가 가능했던 이유는 기게스의 반지 로 말미암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되고, 따라서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다음아고라의 많은 촛불시위참여자들은 기게스의 반지 를 낀 상황에서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촛불시위참여자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마음놓고 언론매체나 광고주들을 공격했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기게스의 반지 를 낌으로서, 자신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위협적인 언사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좀 더 시민적 우정 과 예의바름 이 살아 꿈틀거리는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시민적 우정 과 예의바름 이 부족하면 아무리 좋은 문명의 이기라도 결국은 흉악한 무기로 변질되게 마련이다. 전화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문명의 이기라고는 하지만, 전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 대해 위협과 막말을 쏟아 냄으로써 주눅들게 한다면, 전화는 흉기로 돌변하는 셈이다.
또한 소비자들을 두려워하는 생산자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 얼굴없는 다중(多衆) 이 수시로 전화를 한다면, 그 업체의 주인은 어떤 느낌을 가질 것인가? 촛불시위참여자들은 이 점에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공감능력 과 역지사지 하는 능력, 즉 도덕적 민감성moral sensitivity 과 도덕적 상상력(moral imagination) 이 부족했다. 개구리가 죽을지 모르고 연못에서 무심하게 돌을 던지는 아이의 입장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촛불시위참여자들이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라도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금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위해 원리(harm principle) 이다. 물론 위해원리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통용되어야할 중요한 행동원칙이다. 미국산 수입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을 든다고 해서, 또 촛불을 들었다고 해서, 아무런 의사 표현이나 구호를 외칠 수 있는 도덕적 특권을 가진 것은 아니며, 또한 어떤 생산자에게도 불매운동을 벌일 수 있는 도덕적 철인왕 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홉스의 자연상태와 비교될지언정, 같은 시민들이 음으로 양으로 우정을 쌓고 예의와 품격을 지키며 살아가는 시민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의사표현의 구속보다는 의사표현이 자유로운 상태를 원한다. 죄지은 사람을 교도소에 가두어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바로 자유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우리는 새장에 갇혀 있는 새에 대하여 구속되어있는 상태의 답답함을 생각하고 창공을 훨훨 날아가는 새에서 자유로운 존재의 이미지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무한정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가. 왜 자유에 대한 제한과 제약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유의 역설(paradox of freedom) 현상 때문이다. 자유의 역설 이란 모든 사람이 무한정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누구의 자유도 불가능하다는 논리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놓고 하고자 하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기 마련이고 결과는 자기자신에게도 미친다. 내가 주먹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자유는 그대의 코앞에서 그친다 는 준칙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원리는 항상 자유제한의 원리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유를 옹호하고자 한다면, 자유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제한해야하는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제한하는 원리와 관련, 우리는 자유를 크게 구속할 수도 있고 가장 작게 제한할 수도 있다. 이 최소한의 자유구속의 원칙에서 밀(J. S. Mill)의 논변은 주목할 만하다. 밀은 인간의 행위를 자기본위적 행위 와 타인 본위적 행위 로 나눈다. 자기본위적 행위는 그 행위의 결과가 일차적으로 자기자신에게 돌아오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개인 자신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행위 등은 모두 자기본위적 행위 이다. 그 결과가 일차적으로 자기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타인본위적 행위 는 그 결과가 일차적으로 타인에게 돌아가는 행위이다.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자기본위적 행위이나 밤에 사람들이 자는 주택가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행위는 타인본위적 행위이다.
고성방가는 그 행위의 결과가 일차적으로 타인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이 타인본위적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적 행위이고 또 하나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해악적 행위이다. 내가 크리스마스 때 구세군 냄비에 돈을 희사하는 것은 타인본위적 행위이다. 그 행위의 결과가 남에게 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남을 때리고 속인다면 그것도 타인본위적 행위이다. 밀은 이 경우에 한하여 국가나 정부가 개입하여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 밀의 정의를 들어보자.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들의 구성원의 행위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방어이다. 권력이 문명공동체의 어떠한 구성원에게 그의 뜻에 반하여 사용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위해원리의 문제는 특히 포퍼(K. Popper)가 제시한 통찰에 주목해 보면, 설득력이 있다. 무슨 이유로 양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비교하는 것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가. 이와 관련,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적 비대칭성(moral asymmetry) 의 문제다.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 도덕적 비대칭성 이 존재한다는 것은 1건의 즐거움과 1건의 고통이 상쇄될 수 없고 도덕적 호소력(moral appeal)의 측면에서 고통이 언제나 즐거움을 압도한다는 뜻으로 판독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길가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냥 길을 가지 않고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가 왜 우는지 궁금해 한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 가 아니라 도덕적 응답의 발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길가에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만일 멈춘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울음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을 정도의 도덕적 호소력 을 가지고 있으나, 웃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의 촛불집회에서는 비교적 예의바름 과 공손함 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무례함과 과격성이 모습을 들어내기 띠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상에서도 경찰에 대하여 폭력행사를 하는 경우가 있었고 온라인상에서는 반대자들에게 무자비한 언어폭력이 난무했다. 이것은 분명 공손함 과 예의바름 을 강조하는 고전적 아테네의 아고라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정치적 동물(political animal) 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이고 사교적인 동물(sociable animal) 이다. 그런 점에서 예의바름 은 인터넷소통의 대화적 문화(conversational culture) 에서도 필수조건이다. 그럼에도 소통에서 예의바른 기교(polite arts) 를 크게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촛불시위참여자들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3. 시위자들이 주목해야할 권리 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단의 시민들로 하여금 촛불시위에 참여케 만든 명분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를 든다면, 건강권에 관한 개념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결정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건강권이 위협받게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권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권리란 관련된 두 가지 범주의 당사자, 즉 권리 보유자(right-holders) 와 권리 준수자(right-observers)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권리의 개념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권리 보유자 의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권리이며, 또 하나는 권리 준수자 의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권리다. 권리보유자의 관점에서 볼 때 권리란 일정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허용(permission) (R. Nozick)이며 행동하고 존재하고 즐기고 요구할 수 있는 권한 (entitlement) (H. J. McCloskey)이다. 권리 보유자는 권리에 의해서 함의되는 사항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권리 준수자의 관점에서 권리는 이와 관련된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한 의무는 소극적으로, 즉 권리 보유자의 권리 행사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될 수도 있고, 혹은 권리 보유자의 권리행사를 도와주는 적극적 의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권리는 어느 정도로 중차대한가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가장 강력한 권리라면, 물론 절대적 권리(absolute right) 이다. 절대적 이라는 형용사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첫째 절대적 권리는 다른 어떤 고려사항, 예를 들면, 효용 이나 편의주의 등의 가치에 의해 압도될 수 없는 그러한 권리다. 드워킨(R. Dworkin)은 이러한 의미에서 권리란 트럼프 카드(trump card)'라고 규정한 바 있다. 즉 다른 어떤 형태의 고려사항도 압도하는 것이 절대적 권리의 특성이다. 예를 들면 생명권은 절대적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적 원리나 편의주의에 의하여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즉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장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길을 가고 있는 무고한 행인을 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권이외에도 절대성을 띠고 있는 일련의 권리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보다 더 강한 의미의 절대적 권리를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다른 어떤 고려사항은 물론, 다른 어떤 권리 에 의해서도 압도될 수 없는 권리라고 하겠다. 우리가 이러한 의미로 절대적 권리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절대적 권리는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절대적 권리가 두 개 이상일 경우 서로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임산부가 유산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태아의 생명에 대한 권리가 둘 다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택일할 경우 배제되는 권리에 대하여 절대성을 띤다고 단언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절대적 권리의 개념을 부인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거의 모든 권리, 혹은 아마도 모든 권리가 직견적 권리(prima facie right) 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직견성 을 의미하는 prima facie 라는 라틴어는 일견해 보았을 때 라는 의미이다. 특정한 권리가 직견적 권리라고 할 때 문제의 권리는 우선적으로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좀 더 자세하게 고찰해보면 다른 고려사항이 그것을 압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직견적 권리는 문제의 권리가 실제로 상당한 비중을 갖고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적용될 수 있고 압도적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있어 개방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직견적 권리는 추정적 권리(presumptive right) 라고도 지칭되는데, 특히 블래스토스(G. Vlastos)는 모든 권리를 직견적 권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
권리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가운데 하나는 권리들이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의 해법은 무엇인가. 매슬로우(A. Maslow)가 말하는 욕구의 위계질서(hierarchy of needs) 처럼 권리의 위계질서 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구도를 말하기란 어렵다. 물론 그래도 우리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어느 정도의 해법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라면 절대적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범주의 권리도 강력할 수 있겠으나,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처럼 그렇게 강력할 수 있을까하는 점은 의문이다. 생명에 대한 권리도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와 비교해보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때때로 국가는 특정한 중죄인을 적절한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고문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하는 점에 있어 우리는 매우 회의적이다. 또 생명권에 비하여 재산권은 더 약한 권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은 재산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갖고 있음을 로크는 갈파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재산권은 강력한 권리이지만, 다른 고려사항에 의하여 압도될 수 있는 권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재산권 규제 -식수원 보호를 위한 재산권규제 등- 는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이에 비한다면 흡연권은 재산권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훨씬 미약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비흡연자의 맑은 공기에 대한 권리가 더욱 우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는다. 침해가 불확실한 권리와 침해가 확실한 권리사이의 다툼이 그렇다. 미국산 쇠고기의 건강권에 대한 침해는 확실한 사안(sure thing) 은 아니었다. 미국산 쇠고기는 2억3천만의 미국사람들을 포함하여 그보다도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일상적이며 안전한 식량으로 제공되었던 식품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왜 우리에게는 위험한 식품이 될까하는 점에는 가능성(possibility) 은 배제할 수 없지만 개연성(probability) 은 아주 낮은 불확실성의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맬라민처럼 확실하게 건강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일부 촛불시위 참여자들이 저지른 재산권침해나 인격모독에 관한 것은 확실한 권리의 침해였다.
뿐만 아니라 촛불시위참여자들이은 건강권을 명분으로 과격성까지 정당화하려 하였던 것은 문제다. 과연 권리의 주장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권리의 개념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권리주장이 만능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엄슨(J. O. Urmson)의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행위를 네 가지로 나누어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금지된 행위 , 의무적인 행위 , 허용되는 행위 , 칭송받을만한 행위 이다. 예를 들면 도둑질 등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금지된 행위에 속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행위는 의무적인 행위이다. 또한 자신의 처지도 어려운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행을 한다면, 칭송가능한 행위 로 초과의무적인(superogatory) 행위 가 된다.
이 세 가지의 범주를 뺀 모든 인간의 행위는 허용가능한 행위 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위를 추구하는 행위,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는 행위, 취미생활 등, 많은 것들이 허용가능한 행위 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권리란 허용가능한 행위 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즉 내가 어떤 행위 x를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은 내가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허용된다 라는 의미와 같다. 따라서 권리의 개념과 선의 개념사이에는 밀접한 내적 관계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 A가 어떤 행위 x를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라고 하는 명제는 A가 어떤 행위 x를 행하는 것이 선하다 는 윤리적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고 또한 그러한 판단을 함의하고 있지도 않다. 실제로 우리는 선한 행위의 모두를 행할 권리를 갖는 것도 아니고 선이라고는 반드시 말할 수 없는 행위를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유나 권리가 부인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태아를 중절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악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 지라도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절수술을 받는 것에 대한 권리는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정되고 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사례는 많다. 이혼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혼이 분명한 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분명한 선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혼에의 권리는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권리의 범주에 해당된다. 노동3권이나 시위의 권리, 표현의 권리도 분명한 선의 범주는 아니다. 다만 허용가능한 행위 의 범주라고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권리가 분명한 선(善)이 아니라면, 그럼으로 허용가능한 행위 의 범주라면, 때에 따라서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촛불시위자들이 건강권을 주장하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올바른 생각은 아니다.
4. 촛불시위자들이 경시했던 법치 의 본질은 무엇인가
촛불시위자들이 집시법과 같은 법을 무시한 것은 법에 대한 불복종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집시법은 최근 한 판사가 촛불시위자를 다루는 재판과정에서 위헌심판을 요청했을 정도로 쟁점이 되고 있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쟁점이 되는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이점과 관련, 법의 엄숙성을 말하는 고사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페르시아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군과 조우했을 때 페르시아의 크세르케세스는 레오니다스의 항전의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스파르타에서 망명했던 데마라토스에게 자문을 구한다. 도대체 300명밖에 되지 않는 군대가 5만 명의 우리군대와 싸우겠다는 것이 허풍이 아니고서야 말이 되는가. 이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그 역사에서 데마라토스의 대답을 전하고 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선 그리스에 예속을 강요하시는 전하의 제안은 절대로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설령 다른 그리스인 모두가 전하의 뜻에 따르게 된다 하더라도 스파르타인만은 반드시 전하께 맞서 전쟁을 벌이리라는 것입니다. 병력면에서 대체 그들이 어느 정도가 되길래 그러한 행동으로 나올 것 같은가 하고 묻지 마십시오. 예컨대 1천의 병력을 가지고 출격할 수 있을 경우에는 그 1천명을 가지고 싸울 것이며, 또한 1천보다 적든 많든 상관 않고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와 같이 스파르타인은 일 대 일 결투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더구나 단결할 경우에는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됩니다. 그들은 물론 자유스럽습니다만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법(노모스)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정도는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여하튼 그들은 이 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이 왕이 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즉 어떠한 대군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을 제압하든지 자신이 죽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테르모필레의 전투는 데마라토스의 예언대로 결말이 났다.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전사가 모두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과 관련, 세모니데스의 2행시를 통해 지나가는 길손이여, 가서 스파르타인들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그들의 법에 복종하여 여기에 누워있노라고
우리한국은 어떤가. 그동안 우리사회는 민주화 는 되었으나, 법치화 는 되지 못했다. 법치는 공안정국 이나 억압 이라는 말과 오버랩 될 만큼 종이호랑이 가 되었다. 우리는 법을 사랑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법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준법투쟁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법은 희화화 되었다. 그러기에 시위대가 경찰에 격렬히 맞서는 현장에서 공권력의 사용만으로 법치가 살아 꿈틀거릴 수 없다. 경찰을 시위대가 포위하여 구타와 욕설을 해대는 상황에서 공권력의 왜소함이 느껴질지언정 어떻게 공권력의 엄숙함이 느껴질 것인가. 물대포로도 법치는 살아날 수 없다. 유모차를 모는 엄마가 물대포 앞을 막아서는데 어떻게 물대포가 위력을 가지겠는가. 또 연일 공권력을 과잉진압 이라고 주장하는 야당과 방송이 있는데, 시위대가 쇠파이프와 쇳조각을 사용한다한들 어떻게 죄책감을 느낄 것인가.
법과 질서는 무법상태를 걱정하는 언론의 논조나 논객들의 힘으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대선불복종 세력이 저항권을 들먹이며 법을 강조하는 언론이나 논객에 보수 라는 딱지를 붙여 비아냥거리는데, 어떻게 질서가 아름답다 는 말이 먹히겠는가. 한국사회에는 오히려 법을 폄훼하는 담론이 지배담론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악법은 법(dula lex sed lex) 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치를 비아냥거리는 대표적 논리는 법치보다 법불복종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논리이며 촛불시위자들이 행동의 준거로 받아들였던 논리이기도 하다. 즉 법을 존중했다면, 어떻게 4 19민주혁명이 가능했겠으며, 또 6 10항쟁이 가능했겠는가하는 반론이다. 이러한 사례는 항상 법치를 경시하는 사람들에게 전가의 보도 처럼 되었다. 2000년 총선때 낙천낙선운동을 벌이던 시민단체들도 이런 논리를 폈고, 이번 촛불시위참여자 가운데 일부 폭력시위대도 이런 논리로 자신들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생각해야할 점이 있다. 권력을 갖고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이건 그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이건 모두 인간 개인의 나약한 본성과 불충분한 선에 대한 동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강한 존재가 아니며,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일상생활을 하면서 진절머리가 날만큼 익숙한 사실이다. 모름지기 나 는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또한 남에 대한 칭찬에는 인색하고 비난에는 사정이 없다. 내가 한 것은 로맨스 고 남이 하는 것은 불륜 이다. 혹은 배고픈 것 은 참아도 배아픈 것 은 참을 수 없다. 내가 배가 아픈 것 은 사촌이 땅을 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한 톨스토이의 부활 에서 귀족장교인 네프류도프가 자신의 한때의 불찰로 인하여 윤락의 길을 걷고 급기야 중죄를 진 카츄사의 재판에 참석한 심각한 상황에서도 자기 잇속에 낀 가시 때문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재판에 신경을 못쓰는 것처럼, 남의 커다란 고통보다 자신의 작은 고통에 더욱 더 관심을 갖는다.
사람들이 공익을 명분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도 찬찬히 뜯어보면, 이기주의적 의도를 가지고 임하는 사례가 많다. 즉 정치인이 유권자들 앞이나 의회에서 정의와 공익을 외쳐도, 실은 재선 전망 극대화 나 득표 극대화 의 숨은 의도가 도사리고 있고, 관료들이 정부부처의 개혁과 구조조정을 외쳐도 자기자신의 부서 영향력을 늘리기 위한 의도가 꿈틀대고 있다는 점이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인, 관료들 뿐 아니라, 일반 이익단체나 시민단체, 혹은 시민 개인들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문제의 경향은 국가의 법이나 제도에 대한 평가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흔히 개인이나 집단은 자기자신에게 실익(實益)이 돌아오는 법이나 제도에 대해서는 정의로운 법으로 단정하고 불이익이나 희생을 강요하는 법이나 제도에 대해서는 불의한 법이나 불공정한 제도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특정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입장에서 일단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을 쓰고 문제되는 사안의 공익성을 판단하는 경우는 얼마나 희귀한가? 군경력 가산점제도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여성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불공정한 제도로, 남성의 입장에서는 이득을 보기 때문에 공정한 제도로 간주하는 경향도 이에서 예외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소한 불의를 담고 있는 선거법에 대한 불복종문제를 4 19민주혁명이나 6 10항쟁과 같은, 거대한 국가의 불의에 대항하는 불복종행위수준으로 평가절상시켜 정당화시키기도 하고, 지역이기주의나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되는 시민불복종행위를 공동체전체의 공공선 진작을 위해 벌인 소로우의 불복종행위나 간디의 불복종행위와 논리적으로 연계시키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인용이나 비교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사실적 비교보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희망사항일 뿐이며, 침소봉대(針小棒大)나 과대망상(誇大妄想)일 경우도 허다하다. 참을 수 없는 불의 에서 참을 수 없음 을 해석하는데 있어, 당사자 개인들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접근하게 마련이다.
과연 방송사의 왜곡된 보도에 의해 건강권을 지키겠다며 미국산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에서 나타나는 시민불복종행위들을 간디의 모델이나, 소로우의 모델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촛불시위주도자들이 이번 시위를 온전한 의미의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행위 로 생각했다면, 경찰수배를 피하여 조계사에 숨기보다는 당당히 경찰조사에 응하고 법의 절차를 받아들였어야한다. 시민불복종행위 에서 함의되는 시민성 이란 예의 바름(civility) 을 함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로우나 마틴 루터킹 등도 그런 모범을 보였다. 그런데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를 했을 뿐이라면서 자신들의 불복종행위에서 기인하는 불이익은 한사코 받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의바른 불복종 정신에 벗어나는 것이다.
Ⅴ. 결어
촛불시위는 끝났다. 지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과연 그런 것이 있었는가하는 흐릿한 기억정도다. 그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현상은 우리 냄비근성 의 소산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창 때 촛불시위의 위력은 대단했다. 최대의 관심사가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촛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00일이나 지속된 촛불시위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미네르바의 올뺌이 처럼 뒤를 바라보고 성찰해야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촛불시위는 그 시작이 일반시민들의 참여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노사분규와 같은 시위와는 달랐다. 따라서 촛불시위와 관련, 광장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예찬론도 나왔고 건강권을 지키겠다는 결의의 표명은 그동안 시위현장에서 유례가 없었던 유모차부대의 출현 등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대규모 시민들의 참여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정부의 정책에 동의할 수 없다는 시민불복종 행위 의 의미도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찰의 대상은 적지 않다. 특히 직접민주주의 예찬론자들은 직접민주주의나 광장민주주의의 빛만 보고 어두움을 보기를 의식적으로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 점에서 과다민주주의 는 민주주의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보비어(N. Bobbio)의 경구(警句)가 경시된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시기동안 대의민주주의는 식물민주주의 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민들의 애환과 애로사항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해결해야할 국회가 야당의 거부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의원들중에는 국회보다 촛불집회현장을 배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가하면 촛불시위는 단순히 정부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부와의 대결상황만은 아니었다. 촛불시위반대자들이나 다른 동료시민들과의 관계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촛불시위자들의 인터넷을 자처했던 다음아고라가 시민적 우정 이나 예의바름(politeness) 이 실종된 전쟁터와 같은 공론의 장이 된 것은 유감이다. 그들은 인격모욕, 명예훼손, 불매운동 등, 여러 가지의 과격한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은 개인들과 언론에 대하여 우리 편 아니면 적 이라는 단순 논리, 즉 전쟁터의 적대적 논리를 원용했을 뿐이다. 그 결과 헤라클레토스의 말대로 전쟁이 모든 것의 아버지가 되는 상황이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법불복종 뿐만 아니라 법의 정신에 대한 훼손경향이 팽배했다. 사실 우리사회는 지속적으로 심각한 법치의 위기에 직면해왔다. 공동체를 움직이는 공적 가치에 대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참여민주주의와 광장민주주의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정작 절차민주주의의 핵심인 법치에는 무관심하고 냉소적이었다. 한동안 토론공화국 을 내세웠던 정권도 있었지만, 합의와 토론은 공허하며 참여는 포퓰리즘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평등, 참여, 권리의 담론은 절제된 민주주의의 본질에서 멀어져 갈등과 혼란, 분열로 다가왔을 뿐이다.
우리의 민주공동체가 품격있는 공동체 가 되려면, 시민적 우정과 시민들사이의 예의바름과 공손함, 즉 낯선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예의바름 이 없고 위해원리 와 같은 중차대한 행위의 원칙들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새로운 유형의 소통민주주의를 외치더라도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열악한 상황에 직면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는 행동 의 범주를 넘어서서 법을 존중하는 정신 이 필요하다. 우리가 부모를 말할 때 좋은 부모냐, 나쁜 부모냐 를 따지기 전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는 준칙을 상기하는 것처럼, 법을 말할 때도 악법이냐, 정의로운 법이냐 를 말하기 전에 법에 대해 존중해야한다 는 법의 정신을 가슴에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촛불시위가 예의 바름과 절제있는 민주주의, 법의 정신 등, 시민적 가치들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촛불집회는 우리공동체의 품격과 민주주의의 품격 및 법과 질서의 품격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런 기회를 무산시켰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촛불집회는 일련의 시민적 가치들의 소중함을 깨우쳐준 반면교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Konas)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 2026.10.18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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