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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대한해협 해전 승전이 주는 의미

낙동강 전선 방어하던 국군에게 반격 발판 마련해 주는데 결정적 기여
Written by. 김성만   입력 : 2015-06-26 오후 1: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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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우리해군이 6·25전쟁 대한해협 해전에서 승리한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백두산함(PC-701, 285톤)은 1950년 6월 26일(월) 새벽 부산앞바다에서 북한 상륙군수송함(1천톤)과 교전하여 이를 격침했다. 이를 대한해협 해전이라 부른다.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노먼 존슨(Norman Johnson) 박사는 그의 저서 ‘6·25 비사’에서 대한해협 해전을 “6·25전쟁의 승패를 가른 분수령”이라고 표현했다.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북한군을 전멸시키고 유엔군 증원병력과 군수물자를 안전하게 양륙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는 초석을 놨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일)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역을 기습 남침하여 6·25전쟁을 도발했다. 북한 해군은 6월 25일 새벽 3시30분경에 이미 동해안 3개소에 기습상륙을 감행했다. 강원도 옥계해안에 약 1,800명, 삼척해안에 약 800명, 경북 죽변과 임원해안에 약 500명이 상륙을 했다.

 ▲ 백두산함(PC-701).ⓒkonas.net

  백두산함 구입 과정과 제원

  한국해군 최초의 전투함이다. 해군장병과 가족, 국민들의 성금 등으로 구매한 함정이다. 함정·함포·탄약 구입, 수리비, 유류, 인건비 등 총 6만 달러가 들었다(702함, 703함, 704함 선체 구입비 포함). 성금 1만5천 달러에 이승만 대통령이 4만5천 달러 국고를 지원했다.

 백두산함은 1944년 7월 미국해군 PC-823함으로 취역하여 2차대전 종전까지 대서양에서 독일잠수함 탐색작전에 참전했다. 우리해군이 1949년 10월 미국 해양대학(뉴욕주) 실습선인 PC-823함을 1만8천 달러에 구매했다. 미국의 조선소에서 수리, 3인치 함포를 장착(하와이)하고 괌을 거쳐 1950년 4월 10일에 진해항에 도착했다. 주요 제원은 배수톤수 285톤, 길이 52.9m, 폭 7m, 최대속력 18노트(시속 33km)이고 승조원은 73명이다. 무장은 3인치(76mm, 최대 사거리 13km) 1문과 중기관총(12.7mm) 2정이다. 레이더(Radar)와 사격통제장비는 없다.

  북한 수송함 제원

  소련해군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약 1,000톤급 선박이다. 길이 70m, 폭 10m, 속력 10~12노트(18~22km)이고 배의 앞부분과 중간에 마스트(Mast)가 있다. 해군과 상륙군 약 600명이 타고 있었고 무기, 탄약과 식량을 적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장은 85mm 전차포 1문과 중기관총 2~4문이다.

  해전 진행 경과

  백두산함은 성금을 낸 국민에게 보답하기 위해 1950년 6월 초부터 부산, 묵호, 제주, 목포, 군산, 인천항을 방문하고 6월 24일(토) 밤 11시30분경 진해항에 입항했다. 백두산함은 6월 25일(일) 오전 9시경 해군본부로 부터 “동해안 옥계·임원 해안에 인민군이 상륙하고 있으니 즉각 출동해 적을 격퇴하라”는 작전명령을 수령했다.

 백두산함은 급히 군수 적재를 하고 이날 오후 3시 소해정 AMS-512정(150톤)과 같이 출항했다. 오후 8시12분 울산 앞바다를 항해하던 중 동쪽 수평선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포착했다. 전속으로 접근하여 배를 발견했다. 선체를 검은색으로 칠한 미식별 선박은 국기도, 이름도 없었다. 백두산함이 30분 동안 국제 발광신호로 국적·출항지·목적지를 물었지만 괴선박은 묵묵부답으로 계속 남하했다. 백두산함은 더 가까이 접근해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다. 미식별 선박은 그래도 응하지 않았다. 최용남 함장(중령)은 적함이 틀림없다고 확신, 포탄 장전을 명령했다. 밤 11시51분 전투배치를 완료한 백두산함은 미식별 함정 우현 100m까지 접근했다. 함수(艦首) 갑판에 함포가, 함교(艦橋) 뒤에는 중기관총을 천으로 덮어 놓은 게 보였다. 갑판에는 완전무장한 군인이 빼곡히 타고 있었다.

 최 함장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추적할 것을 지시한 후 해군본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6월26일 새벽 0시10분 사격명령이 내려졌고, 20분 후 3인치 함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미식별 함정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조준사격이 아닌 위협사격이다. 미식별 함정은 85mm 주포와 중기관총으로 대응했고, 이로써 적(敵) 함정이라는 게 밝혀졌다.

 백두산함은 즉각 격파사격에 돌입했다. 포 요원들은 가랑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포탄을 발사하는 데 구슬땀을 흘렸다. 20여 발 중 5발이 적함에 명중했고, 선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최 함장은 적함을 격침시키기 위해 근접사격을 명령했다. 백두산함은 적함 1.7km까지 접근해 3인치 포탄 10여 발을 발사했다. 포탄은 칼로 찌르듯 선체를 타격했고, 불꽃과 검은 연기가 적함을 뒤덮었다. 백두산함은 거리를 900m로 좁히고 화력을 집중했다. 12.7mm 기관총탄도 춤을 추듯 날아가 선체 곳곳을 때렸다. 이때 3인치 포탄이 직경 30cm에 불과한 적함의 마스트 꼭대기를 박살냈다. 최첨단 장비를 보유한 현대 해전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26일 새벽 1시10분. 적함이 20도 정도로 기울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적함이 최후 발악으로 발사한 85mm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 조타실 왼쪽 밑부분을 관통, 승조원 4명이 다쳤다. 백두산함과 적함의 거리는 불과 400m이었다. 최 함장은 사격권 밖으로 침로 변경을 지시했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함포 고장을 응급조치한 백두산함은 새벽 1시35분 다시 격전의 현장으로 향했다. 4시간에 걸친 탐색에도 적함은 보이지 않았다. 옷가지와 기름 등만 떠다닐 뿐이다. 백두산함은 6월26일 새벽 1시38분 적함이 완전히 침몰한 것으로 판단, 해군본부 명령에 따라 새벽 5시45분 동해안 묵호 근해로 북상했다.

 치열한 전투 결과 우리해군은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북한군 수송선이 침몰하고, 병력과 무기·식량·탄약 등이 수장(水葬)된 것으로 추측된다.〚1950년 6월 26일 해군 단독 첫 승전보전쟁 승패 가른 분수령. 호국보훈의 달 기획 6·25전쟁 11대 전투 <5> 대한해협해전,『국방일보』, 2014.6.17 및 권주역,『바다여 그 말하라!』(대구: 도서출판 중앙, 2003)〛에서 인용.

  승전의 의미

  비록 소규모의 해전이나 그 의미는 크다. 북한군상륙군 수송함을 상륙 바로 전에 해상에서 격침함으로써 북한의 후방교란 기도를 차단했다. 만일 북한군 특수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면 부산을 포함한 후방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특히 개전 초기 불리한 전세를 생각하면 전쟁의 양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우리해군이 부산을 지켜 안전한 해상수송로를 확보하게 되었고 곧이어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던 국군에게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실제로 서울이 함락된 1950년 6월 28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美)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총포탄 300만 발을 실은 탄약수송선 2척이 사세보항을 떠나 7월 1일 부산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제34연대, 제21포병대대 등이 속속 부산항에 입항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미 본토와 일본-부산항을 연결하는 ‘레드볼(Red Ball) 특별수송작전’을 개시했다. 부산은 남한에서 군수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다. 따라서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할 보루다. 미국-일본-부산항을 잇는 굵직한 파이프-라인은 3년여의 전쟁기간 동안 유엔군 190여만 명과 군수물자 5천5백만 톤을 들여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됐다. (Konas)

김성만 예비역해군중장 (재향군인회 자문위원, 前 해군작전사령관)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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