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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칼럼]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Written by. 최경선   입력 : 2021-10-26 오후 3: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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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총성이 울렸다. 조선 청년 안중근은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위협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3번 목청껏 외친 후 도망가지 않고 의연하게 현장에서 체포된 후 중국 뤼순감옥에 수감되고 재판을 받았다. 미조부치 일본 검찰관이 이토를 죽인 까닭을 묻자 안 의사는 의연하게 이토의 15가지 죄를 낱낱이 밝혔다. 일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월 7일 재판이 개시된 이후 불과 일주일 만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안 의사는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를 향해 웃으며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소?”라고 물었다. 안 의사는 일본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항소하지 않았고 사형 언도 후 40일 만인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뤼순감옥에서 31세 나이에 사형당했다. 당시 영국의 ‘더 그래픽’(The Graphic)지가 보도한 안중근 의사 공판 참관기에는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돼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고 기록했다.

 ▲ ⓒkonas.net

 

 안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자 모친인 조 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조마리아의 전갈’은 너무나 유명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서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이 글을 본 일본인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라며 신문에 대서특필했다.

 일본이 안 의사의 의거 이후 공판과 사형 집행에 이르기까지의 사정들을 서술한 대목을 보면 안 의사의 의거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은 안 의사에 대한 공판을 1주일간 6회에 걸쳐 속전속결로 진행해 사형대에 세웠다. 심지어 일본은 안 의사의 시신까지도 두려워했다. 당시 안 의사의 시신에 적용되는 감옥법 제74조 '사체·유골의 교부'는 "사망자의 친족이나 친구로서 사체 또는 유골을 요청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라도 교부할 수 있다. 단, 합장된 후에는 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 의사의 동생 안정근·공근이 형의 시신을 인수하려고 뤼순의 숙소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사형 집행 시각까지 두 동생의 외출을 막고 숙소에 묶어두었으며, 집행이 끝난 뒤에는 이들을 감옥으로 불러 시신 불인도 처분을 통지하고 통곡하는 두 형제를 강제로 열차에 태워 귀국시켰다. 당시 조선을 강점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단결해 항일투쟁에 이용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외무성 내부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두려움은 사형 집행일을 변경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원래 사형 집행일은 3월 25일이었으나 그 날은 순종 황제의 탄생일이어서 인심에 악감정을 줄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하루 뒤인 3월 26일 사형을 집행했다.(1910년 3월 22일자 통감부 내부 보고서) 그리고 안 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날 오후 5시, 매장 완료 보고를 받은 안중근 재판의 최고 책임자인 뤼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요시토(平石義人)는 관사에 기생들을 불러‘안중근 사건 관계자 위로 만찬회’축하 파티를 열었다.(국가보훈처가 공개한 1910년 3월29일자 '만주일일신문'과 '만주신보') 또 일본 정부는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안 의사의 사형을 미리 결정하고 재판을 통해 교수형을 선고했는데, 이에 관여한 재판 관계자에게 250원에서 10원까지 일왕의 하사금을 준 사실도 확인됐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는 비석이 있는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묘 옆에 비석이 없는 무덤이 하나 있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유해가 매장되지 않은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다. 안 의사의 유해는 구체적인 매장 위치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중국 하얼빈에 세워졌던 안 의사 동상은 중국 정부의 반대로 철거된 뒤 한국으로 반입돼 부천의 안중근공원에 자리잡았다. 유해를 못 찾는 건 안중근 의사 뿐만이 아니다. 안 의사의 모친과 부인, 두 동생 유해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상하이에서 별세해 프랑스 조차지 안의 외국인 묘지인 찡안쓰(靜安寺)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혔지만 현재 이 묘지는 도시 개발로 사라졌다. 1949년 2월 27일 사망한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1949년 3월 17일 병사한 동생 안정근도 조마리아 여사와 같이 징안쓰 만국공묘에 묻혔으나 이장 이후 유해가 어디 있는지 현재 알지 못한다. 막냇동생 안공근은 1939년 충칭에서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사촌동생 안명근은 ‘105인사건’ 주모자로 10년 동안 복역했지만 유해가 없다. 안 의사의 맏아들 안분도는 1911년 여름 어린 나이에 일제 밀정에 독살당했다.

 지난 8월 15일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1946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유해를 시작으로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까지 총 144위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왔다. 안 의사는 자신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후손들은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을 한 이유는 남의 나라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일백 번을 꺾어도 굴함이 없이 (중략)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 중에서>. 오는 26일, 잠시만이라도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보자.(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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