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사건이 발생한 지 5년이 되었다. 진주만 기습 사건보다 더 큰 인명 피해를 내고,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을 무너뜨리고, 국방부 건물 일부를 파괴한 9·11은 국제체제의 급격한 변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정도의 충격이었다. 9·11 이후 야기된 국제체제의 급격한 변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첫째는 국제체제의 주요 행위자들이 바뀌었고, 둘째는 국제정치의 경기 규칙이 대폭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국제체제의 주요 행위자는 강대국들이었다. 그런데 9·11 이후 국제체제의 주요 행위자 중에는 나라도 아닌,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조직들이 포함돼 있는가 하면, 이라크·이란·북한 등 상대적으로 허약한 나라들이 국제 무대에 더 자주 오르내린다.

 이처럼 새로운 종류의 국제정치 행위자들을 상대하는 나라는 미국인데, 미국의 행동 역시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미국은 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대국이요 패권국이다. 패권국은 그 정의상 국가안보의 문제가 해결된 나라를 말하며, 패권국은 당연히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현상유지국가(Status Quo Power)다.

 그러나 세계의 패권국인 미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나라가 됐다는 역설에 직면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의 모든 대외 정책은 역설을 정상 상태로 되돌려놓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미국은 국제체제의 재편 없이, 미국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는 나라들을 변화시키기로 결심했다. 현상에 만족해야 할 패권국인 미국이 현상타파국으로 돌변한 이유다.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가 한반도에 초래한 충격파는 미국의 현상타파정책에 북한이 대상국으로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1994년 10월 미국은 이미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두 발 정도의 핵은 눈 감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북한의 핵을 ‘동결’시키는 선에서 북한과 핵합의를 이룬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의 핵은 ‘핵확산의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었고, 이는 동결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잖아도 북한이 1994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의심 하던 차에 2001년 9·11이 발발했다. 미국을 향한 최악의 테러는 핵무기 또는 대량파괴 무기에 의한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 미국은 북한을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보기 시작했다.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정교한 국제정치학 논리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9·11의 충격 속에서, 미국은 가장 반미적인 나라들 가운데서 대량 파괴무기를 만들려는 소수의 국가들을 서열 매겼고, 미국이 싸워야 할 반(反)테러전쟁의 표적이라고 밝힌 것이다.

 미국의 목표는 북한이라는 국가를 제거하는 게 아니다. 미국의 목표는 북한을 미국에 테러 위협을 가하지 않을 나라로 바꾸는 데 있다. 북한은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에 핵을 만든다고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핵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북한이 핵만 포기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있지만, 미국은 북한에 테러리스트들에게 핵과 대량 파괴무기를 건네줄 수 있는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더욱 큰 문제로 생각한다. 9·11의 절박한 상황에 처한 미국은 중동 국가들에 미사일을 포함, 다량의 무기 거래를 할 뿐 아니라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는데도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북한 정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9·11이 초래한 국제체제의 비정상적, 비전통적 논리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올바른 대북 정책도 대미 정책도 세울 수 없을 것이다.(문화일보, 9,11)

 이춘근 (政博·자유기업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