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주한미군서 31년 외 길..김영규 공보관
판문점.동맹현장 누벼.."판문점은 남북관계 체온계"
"한미동맹 1991년 기점으로 큰 변화"
"주한미군에 몸담고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한미동맹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남북 분단의 최전선인 판문점과 한.미 연합훈련장 등을 누비며 31년째 한국과 주한미군의 가교역할을 해오고 있는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김영규(60)씨. 그는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관, 유엔군사령관 등 3개의 `모자'를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3개 사령부의 공보관을 겸하고 있다.
김 공보관과 지난 1일 창설 50주년을 맞은 주한미군의 인연은 30세 때인 1976년 입대, 카투사(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병사)로 차출되면서 시작됐다. 연세대에서 역사학(67학번)을 전공한 그는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 공보실에 배속돼 2사단 기관지인 `인디언 헤드' 기자로 활동했다.
당시 미군 병사들과 함께 쓴 국내 혼혈인 문제 등에 대한 기사가 한국 언론에까지 반향을 일으켰고 이 덕분에 그는 제대 후 미 2사단 공보실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1985년 서울 용산에 있는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실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환갑을 맞은 올해까지도 주한미군의 대(對) 언론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김 공보관은 그동안 내외신 취재진을 이끌고 남북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을 문턱이 닳도록 다녔다. 매주 수요일에 이뤄지는 정기방문과 남북 간 접촉 시 등 수시로 이뤄지는 방문을 합치면 지난 31년간 적어도 1천 번은 판문점을 찾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판문점의 산증인인 셈이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이 때문에 `제일 남쪽 끝에서 태어나 제일 북쪽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판문점에 얽힌 기억도 그만큼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등병으로서 갓 인디언 헤드 기자로 활동하던 1976년 8월18일 이른바 북한군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고 그는 방탄복과 카메라를 지급받은 채로 미군들과 함께 현장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가 탔던 헬기는 결국 공동경비구역 내 사건 현장까지는 접근하지 못했지만 그는 "당시 죽으러 가는 줄 알았다"며 생생한 기억을 전했다. 그는 "당시는 일촉즉발의 준 전시상태였다"며 "미군 탱크들이 동두천 길거리로 나와 북쪽을 향한 채 출동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1989년 `통일의 꽃' 임수경씨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석하고 판문점을 통해 귀환할 당시의 기억도 생생하다.
"임씨가 실정법을 어겼지만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것을 보면서 젊은이들의 통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봤다"고 그는 회상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당시 이 같은 느낌을 누구에게도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수녀님을 찾아 일종의 고해성사를 했다고 전했다.
김 공보관은 평생을 지켜본 판문점에 대해 1985년 남측 이산가족들이 판문점을 통해 북측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판문점은 오로지 대결의 장이었다고 말했다. 일례로 우리 측 대성동과 북 측 기정동에서 남북이 깃발 높이 달기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판문점 회담장에서도 서로 큰 깃발을 달아 체제경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는 "1985년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판문점에서도 남북 간 대화와 화해가 꿈 트기 시작했다"며 "그러나 판문점은 이 시간 현재도 대결과 화해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판문점이 곧 남북관계의 체온계"라고도 했다.
김 공보관은 한미동맹에 언급하면서 1991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1991년 이전에는 주로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이후에는 상당 부분 지원역할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 1991년 휴전선 일대 콜리어 초소와 오울렛 초소 운영 책임이 주한미군에서 한국군 1사단과 유엔사로 각각 넘어오고 같은 해 3월 기존 미군 장성이 맡던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 수석대표(소장)에 한국군 장성이 임명된 것과 1994년 평시 작전통제권 이양 등을 들었다.
김 공보관은 또 1980년대까지는 주로 한.미 간 군사, 안보문제가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부터는 주한미군의 범죄와 환경오염 문제 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면서 "한미동맹은 6.25전쟁을 통해서 맺어진 혈맹의 관계"라며 "가끔은 오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한미동맹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그는 "한.미 간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이를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며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이 한미관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숨진 효순.미선양 사건과 관련,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었다"며 "이를 계기로 주한미군도 `좋은 이웃'(good neighbors) 프로그램 등을 통해 한국사회에 더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배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31년간 주한미군에 몸담으면서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공보관은 "아직은 얘기할 때가 아니다"며 은퇴 이후로 답변을 미뤘다. 그는 올해 정년을 넘겼지만 주한미군 측과 계약을 통해 앞으로 적어도 5년 이상은 주한미군의 입 역할을 계속 할 예정이며 은퇴 후에는 자신의 체험담을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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