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돌아보고 내일을 생각한다'
6·25전쟁 59년을 맞아 북한연구소와 북한학회는 16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6·25를 돌아보고 내일을 생각한다'는 주제의 전반기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 날 학술회의에서는 '6·25전후사의 재인식'(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 겸 재향군인회 안보교수), '6·25의 성격과 개전의 주도자'(이완범, 한국학중연구원 교수), '북한의 위협과 한미동맹'(송대성, 세종연구소장)을 내용으로 주제발표 및 토론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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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에 앞서 개회사를 한 민병천 북한연구소 이사장은 '6·25 관련 주요쟁점'과 관련해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논쟁화 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다섯가지 쟁점을 제기하고 제기된 쟁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가미했다.
민 이사장은 쟁점 제기에서 먼저 '6·25가 내란이냐 전쟁 또는 사변이냐의 문제'를 두고는 "전쟁이나, 사변 등은 외국군의 찬전 등을 생각하면 '한국전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사변은 전투상황을 담은 군사적 용어가 아니기에 적절치 않고 내전도 마찬가지"라면서, 그런 면에서 "6·25전란이나 6·25동란이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고 제안했다.
또 '남침이냐 북침이냐'에 대해서는 1950년 6월25일 11시 북한의 평양방송에서 한 '남조선 군대가 사리원, 금천 지역 등으로 침공해 왔다'는 방송이나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 남침유인설 등 좌익들의 주장을 제기하고는, 그러나 남침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후르시초프 회고록 내용이라고 인용하면서 "날짜까지 밝힌 후르시초프의 회고록을 믿어야하지 않겠느냐"고 좌파들의 북침설 등을 일축했다.
'자유조국 수호 방위전쟁인가 해방전쟁인가'에 대해서는 "좌익은 선제전면남침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반전쟁론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으로서는 해방을 명분으로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한 '자위전쟁'으로 규정해야 한다"면서 "침략을 받고 맞서 싸우는 것은 정당방위로서 자위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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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민 이사장은 6·25에 대해서도 그 정확한 실상을 우리 국민들에게 올바로 알려야 한다 강조했다.
다음은 이 날 민병천 이사장의 학술회의 개회사 전문 내용임.(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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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관련 주요 쟁점]
한반도에서 민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지도 벌써 59년이 되었다. 그러나 6·25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전란은 끝나지도 않았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군사적 미봉에 그친 상태이지 매듭짓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언제 다시 비극이 재현될지 모르는 가운데 또 다시 6월 25일을 맞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종결을 보지 않아 전쟁재발의 염려를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6·25를 경험한 세대가 줄어드는 가운데 북한과 일부좌익세력이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 더욱 문제인 것이다. 왜곡된 주장이 그치지 않았으니 6·25가 끝났다고 하겠는가.
매듭지어야 할 쟁점으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즉 6·25비극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누가 6·25를 일으킨 책임자냐, 어떤 성격을 갖는 것이며, 특징이 무엇이냐, 6·25전쟁이 통일과 평화에 순기능을 했느냐 역기능을 했느냐 등이다.
첫째 쟁점은 6·25가 내란이냐 전쟁이냐 사변이냐의 문제이다.
전쟁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많지만 동란이나 전란 또는 사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외국에서는 대체로 「한국전쟁」이라고 말한다. 국내에서는 한참동안「6·25사변」이나 「6·25동란」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던 것이 외국의 영향과 당국자들이「한국전쟁」이라고 사용하는 추세에 따라 지금은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 듯 하다.
그러면 과연「한국전쟁」이라고 불러야 할까. 전쟁의 규모로 보나 남북한만이 아니고 다수 외국군의 참전 사실 등을 생각할 때 한구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이라고 부른다고 해도「한국」이라고 할 때는 남한만을 지칭하는 듯 오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사변이라고 해야할까? 사변은 전투상황을 담은 군사적 용어가 아니다. 큰 사건을 뜻하는 일반 용어이다. 따라서 「6·25사변」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6·25가 국가(남북한 포함)간의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남북한 주민 또는 민족내부의 갈등이 겹친 내쟁(내정)적 성격도 갖는 것도 사실이다. 내쟁성에 무게를 두고 「내전」또는 「내란」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산집단이 경신년에 내란을 일으킨 것이라 하여 '경신공란'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볼 때 「6·25전란」「6·25동란」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떨까?
둘째 쟁점은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문제이다.
6·25관련 쟁점 중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논쟁이다. 전통주의 학파는 남침설을 주장하고 좌익과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을 내세운다. 냉전시대 구소련의 멸망 전까지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제법 기세를 올렸으나 그 뒤로는 계획적 남침설 또는 남한과 미국에 대한 오판에 따른 무모한 남침설로 담론이 기울고 있다.
남침에 대해 공산측이 인정한 것들을 들어본다. 옐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볼코고노프장군)에 의하면 1950년 1월19일 슈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김일성의 요청으로 남침을 승인해 달라고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김일성의 건의를 모택동과 협의한 뒤 50년 2월9일 김일성에게 「귀하의 계획에 동의한다」고 전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남침을 뒷받침한 권위있는 책은 후르시초프 회고록(1990년 4월)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50년 2월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보완하여 소련을 방문해서 스탈린과 토의했는데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지만 모택동은 미국개입이 없을 것으로 회답해 왔고 모택동의 견해를 들은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면서「남침 개시일을 1950년 6월25일」로 합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날짜까지 밝힌 전 수상 후르시초프의 회고록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북한과 좌익세력은 전쟁초기 또는 미·소 공존이 있기 전까지는 6·25가 한국군의 북침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1950년 6월25일 11시에 평양방송은「오늘 새벽 남조선군대가 사리원, 금천, 철원지역으로 침공해 왔으므로 인민군대가 이를 되받아 공격 중」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좌익의 논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 한미음모에 의한 남침유인설, 38선상에서 계속된 남측 군사도발의 확산 전쟁론 등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은 군사원조를 얻기 위한「대미압박용」으로 강조되었을뿐 구체적 계획과 행동이 없었다. 그리고 6·25 직전 덜레스 고문의 방문, 1950년 1월 애치슨 장관의 미국방위선에서 한국제외 발언, 맥아더의 아시아 중시전략 등을 들어 북침을 주장하나 그것들은 추론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다.
셋째 쟁점은 6·25가 내란이냐 남북전쟁이냐의 문제이다.
내전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수정주의자의 논거는 이러하다. 해방 후 동족내부의 갈등이 심각했던 점, 6·25전까지 38도선을 가운데 두고 끊임없는 충돌(국지전)이 있었던 점, 남한 내의 공산유격대 활동이 계속되었던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므로 6·25가 전면남침전쟁의 시작이 아니고 38선상의 국지전과 남한 내 유격전의 종착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6·25를 「내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항들은 6·25웅 규정함에 있어 간접적 배경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직접 요인이 될 수 없다. 논리의 비약이거나 사태의 왜곡이다. 내전(Internal War)은 기본적으로 통일국경 내에서 무장집단(정부군과 반란군)간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1950년 당시 한반도에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기 정부가 존재했으므로 내전으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해방 후 남한 내에서 좌익주도의 폭동 또는 여순반란사건 및 유격대 활동이 있었으나 내전으로 남한 내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며 그 세력도 6·25전에 거의 괴멸되었던 것이다. 6·25는 남침으로 일어난 북한 공산집단과 한국간의 전면 총력전쟁 즉 「남북전쟁」이다. 인적, 물적 피해만 보아도 6·25전쟁은 전면적이고 총력동원의 남북전쟁이라고 규정될 것이다.
넷째 쟁점 6·25는 이념과 결합된 남북전쟁이면서 국제전의 성격이 크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당시 공산세계를 주도했던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참전했으며 그들 공산측의 적화전략에 맞서 자유수호를 위해 반공국가들이 나섰다는 점에서 이념이 결합된 남북전쟁이며 국제전이다.
6월27일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한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하였다. 그리고 10월에는 중국의용군이 공산 북한을 돕기 위해 대거 참전했다. 공산권과 자유세계간에 전개됐던 냉전이 열전으로 바뀐 국제전인 것이다.
자유, 공산세계의 주도국들이 참여한 전쟁이었는데도「국지제한전」의 특징을 갖는 전쟁이기도 하다. 맥아더 장군은 군사전략상 만주폭격을 바랬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정치적 고려로 전쟁지역을 한반도에 국지적으로 제한시켰기 때문에 국지제한전으로 보아야 한다. 제한전의 성격을 갖는 전쟁이라는 것은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자제한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한적 국제전일 뿐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이 참전한 국제전쟁이기도 하다.
다섯째 쟁점은 6·25가 자유조국 수호의 방위전쟁인가 해방전쟁인가
북한과 공산측은 6·25가「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한다. 이 말속에는 외부 제국주의 또는 식민지배로부터 우리민족을 해방시킨다는 개념과「파쇼매판정권」의 압제롤부터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가 일으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불의(불의)의 전쟁이라고 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수행하는 해방전쟁은「정의의 전쟁」으로 정당시 하고 있다. 좌익은 선제전면 남침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방전쟁론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1949년 봄에 완전 철수한 상태하에서 민족해방을 하려는 전쟁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독재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이다. 전국초기에 모든 신생국이 강력통치를 하였고 한국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은 더 철저한 공포정치를 했지 않았는가.
결국 한국으로서는 해방을 명분으로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한「자위전쟁」으로 규정하여야 한다. 침략을 받고 맞서 싸우는 것은 정당방위로서 자위전쟁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쟁점은 전쟁으로 통일보다는 분열과 분단만 심화되었다는 의견에 대해
좌익의 관점에서는 외세의 간섭(참전)이 없었더라면 6·25전쟁 때 통일되었을 것인데 라고 아쉬워 할 것이다. 그 때 상황으로는 유엔(미국)군이 자유 한국을 돕지 않았다면 적화통일이되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좌익은 6·25전쟁을「통일전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사실 북한공산집단의 목표는 남한에서 우익정권을 몰아내고 좌익정권을 세워 적화통일을 하겠다는데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목표와 꿈은 버리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북한의 관점에서 보면 6·25남침전쟁은 통일을 위한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통일방해꾼은 유엔(미국)이 될 것이다.
「민족해방」을 하려 하는데도 또「조국통일」을 하려는데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미국이라고 생각하는 좌익으로서는 주적(주적)이 미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와 좌익 및 그 아류들이 미국을 우리의 주적으로 설정하고 교육하게 된다.
6·25때 미국의 도움이 없어 적화통일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북한의 모습에서 상상해 보면 끔찍하지 않은가. 가난과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겠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적이 아니라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 아닌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을 저질러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6·25는 공산측이 뜻한 통일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민족분열의 골만 깊게 파놓았다. 전쟁 때문에 민족이 좌우로 쫘악 갈리면서 증오의 분열을 했고 분단이 완전히 고착화 되었다. 휴전선을 가운데 둔 남북분단이 더욱 굳어졌고 적대감이나 불신 경계심이 커졌으니 이 어찌 민족분열과 국토분단의 심화라 하지 않겠는가.
<6·25를 올바로 알려야>
6·25와 관련하여 주요 논점이 되고 있는 것들을 요약 재정리해 본다.
첫째, 우선 전쟁의 도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김일성이 주도했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즉 전쟁이 북한 공산집단의 기습적 전면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공산측의 남침작전은 소련의 군사교리에 따라 수행되었는바 속전속결과 대규모의 기습침공이었다.
셋째, 전쟁은 남북한 양쪽이 모두 전 역량을 기울인 총력전으로서 역사상 초유의 민족상잔의 비극적 남북전쟁이었다.
넷째, 남북간의 전쟁이면서 유엔 창설이래 최초의 유엔군 참전과 남북한을 지원하는 미군 및 중공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쟁이기도 하다.
다섯째, 남북한과 주요 국가가 참전했지만 전선(전선)이 한반도에 국한됐고,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국지제한전 이었다.
여섯째, 이념과 결합된 공산집단의 침략전쟁이며 자유진영의 자유수호의 방어적 자위전쟁이었다.
일곱째, 좌익은 해방전쟁 또는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하나 그런 주장이「남침」을 정당화하지 못하며 6·25로 오히려 민족분열과 국토분단이 더욱 심화되었다.
여덟째, 주로 좌익에서 6·25를 내전으로 규정하려 하나 공산군이 남진했을 때나 국군이 북진했을 때 배후에서 군사봉기가 없었고 6·25전에도 산발적 반정부활동만 있었을 뿐이다.
결국, 6·25는「6·25동란」이나「6·25전란」으로서 발발(기원)에 있어서나 군사적 결과에 있어서나 소득은 별로 없고 민족분열과 분단 고착화만 가중시킨 비극의 사변이라고 평가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2의 6·25가 일어나지 않도록 과거사를 정확히 알리고 거기서 귀중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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