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칼럼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인쇄

경계해야 할 ‘등가<等價>의 오류’

국회의원이 사용하는 폭력은 신성하고 조직폭력배가 사용하는 폭력은 저급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Written by. 박효종   입력 : 2009-08-16 오전 8:57:53
공유:
소셜댓글 : 0
facebook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살고 있던 한 젊은이가 실존철학자였던 사르트르를 찾아왔다. 그에겐 고민이 있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집안에 부양해야 할 늙은 어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면 가뜩이나 병들고 늙은 어머니는 돌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로 결심하면 조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는 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를 괴롭힌 실존적 딜레마의 실체였던 것이다.이 물음에 직면한 사르트르는 그 젊은이에게 말한다. “조국을 위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고, 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자네가 원하는 어떤 대안을 선택해도 좋다.”

그 후 우리는 그 젊은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마음만은 편안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등가(等價)의 상황’이라고 한다. 이 ‘등가의 상황’에서는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도덕적으로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엇비슷한 가치가 아닌데도 엇비슷한 가치라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에는 ‘등가의 오류’를 범했다고 말한다. 즉 ‘등가의 오류’란 두 가지 대안이 경합하는 가운데 비슷한 범주의 가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엇비슷하다고 치부해 비교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노예제 존치를 주장하는 입장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의견이 맞선다고 할 경우, 양자를 엇비슷한 가치의 범주라고 평가해 협의과정에서 그 가운데를 택하거나 혹은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노예제 존치란 인권존중이라는 문명의 척도에서 봤을 때 야만에 해당하는 제도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흔히 토론에서 두 가지 의견이 부딪친다고 할 때 양 의견을 같은 가치, 혹은 엇비슷한 가치를 지닌다고 상정해 그 ‘가운데’를 취하면서 ‘중용(中庸)의 지혜’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많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에서 이 ‘등가의 오류’를 범하는 전형적인 경우라면 폭력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폭력이란 그 자체로 나쁜 것이기에 누구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이 사용하는 폭력은 신성하고 조직폭력배가 사용하는 폭력은 저급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또 약자가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고, 범죄자가 사용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주장도 소피스트의 주장일 뿐이다.

폭력행사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없는데도, 그것을 비폭력과 더불어 대안으로 놓고 그 가운데 아무거나 선택해도 좋다고 말한다면, ‘등가의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자유·인권·평등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반인권, 명령경제, 일인숭배 등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체제를 놓고 양쪽을 엇비슷한 가치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문화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이념의 차이를 넘어 ‘문명과 야만’의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선과 선이 다툴 때는 ‘등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선과 악이 다툴 경우라면 ‘비등가의 상황’이기에 반드시 선은 취하고 악은 버려야 한다. (http://kookbang.dema.mil.kr/)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2026.10.14 수요일
안보칼럼 더보기
[안보칼럼] 한미연합연습 축소에 따른 우리 군의 대책
1. 들어가기2026년 8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습적인 지..
포토뉴스 더보기
핫클릭 뉴스
깜짝뉴스 더보기
공소청·중수청 시대 오늘 개막…
이재명 정부의 검찰 개혁으로 수사와 기소권을 모두 가진 검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