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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희식 애국지사는 무력적 3·1운동 주도한 분"

보훈처 선정 3월의 독립운동가 '차희식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회 열려
Written by. 강치구   입력 : 2010-03-25 오전 7: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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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회장 이흥종)의 주최로 2010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차희식 선생의 ‘공훈선양 학술강연회’가 열렸다.

 이날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화성 3·1운동의 중심인물’제하 학술강연을 통해, “전국에서 가장 무력적인 3·1운동을 선봉에 서서 주도한 분”이 바로 ‘차희식 지사’라고 역설했다. 박 교수는 ‘차희식 지사’의 이러한 공헌을 높이 사 정부에서도 애국장이 아닌 ‘독립장’을 서훈했다고 덧붙였다.

 ▲ “전국에서 가장 무력적인 3·1운동을 선봉에 서서 주도한 분”이 바로 ‘차희식 지사’라고 역설하는 박 환(수원대) 교수ⓒkonas.net

 박 환 교수는 “차 지사의 강력한 항쟁으로 일제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차 지사를 강력히 탄압했다”며 “일제 순사를 응징했던 차 지사에게 무수한 고통, 무수한 박해가 9년여 감옥생활동안 이뤄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이러한 감옥생활 후유증으로 (차 지사는)1939년에 순국하셨다”며 차 지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렸다.

 박 교수는 ‘차희식 지사’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였으며, 당시 우정·장안면 지역에서 3·1운동을 차 지사와 같이 주도했던 김교철 목사는 기독교, 백낙렬 선생은 천도교였으며 이 지역에는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며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종교집단의 공식적 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박 교수는 차희식 지사가 주도해 우정·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일본 순사를 응징한 곳이 바로 “화성과 안성지역이었다”며 경기도 화성지역이 3·1운동의 중요 항쟁지라고 말할 수 있는 역사적 지역임을 강조했다. 또, 당시 전국적인 3·1운동 중에서 일본 순사를 응징한 두 곳 중 한 곳에 바로 ‘화성과 안성’지역임을 덧붙였다.

 ▲ 애국·보훈 단체장, 차희식 선생 유가족, 시민 약 500여 명이 참석했다.ⓒkonas.net

 경기 화성(갑) 지역구 김성회(한나라당) 의원도 축사를 통해, 차희식 선생 항쟁의 대표적 지역이 화성지역이라면서 “화성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상이군경회 유지철 회장, 특수임무수행자회 김희철 회장, 광복회(회장 김영일) 고문 등 애국·보훈 단체장과 차희식 선생의 유가족, 시민 약 500여 명이 참석해, 의원회관 대강당은 만원을 이뤘다.

 ▲ 이날 강연 후 대한독립군가선양회 합창단의 독립군가 합창이 있었다.ⓒkonas.net

 다음은 3월의 독립운동가 차희식 선생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설명이다.(konas)

코나스 강치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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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 차희식(車喜植)선생
(1870. 11. 10 ~ 1939. 10. 18)
◈화성 3·1운동의 중심인물◈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화성 3·1운동을 주도하여 9년여의 옥고를 치른 차희식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태어나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성장하였다. 장안면은 동리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육과 문화의 수준이 높은 곳이었다. 또한 일찍이 동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어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성장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여러 사람을 인솔하는 자질이 뛰어났고, 3·1운동 당시에는 장년층으로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통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정책을 시행하여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고, 간척공사를 비롯해 송충이 잡는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 노동 착취가 심하였다. 또한 1907년 염업조사를 실시하여 한국인 제염업자의 경영 기반을 해체시켰는데 이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주요 경제적 기반이었던 염업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일제의 수탈정책은 다른 지역보다 소작농의 비율이 높고 여건이 열악한 이 지역민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으로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점점 높아가는 때에 서울의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지역의 지도자들은 구장회의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구체화했다. 선생은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인근 주민들에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우정면 주곡리와 석포리 주민들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4월 3일 군중은 점차 늘어나 1천여 명에 이르렀고 시위 행렬은 인근의 쌍봉산으로 이동하여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선생은 차병혁, 차인범과 함께 군중들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 화수주재소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일본 순사가 쏜 총에 주민이 피살되자 선생을 비롯한 군중들은 격분하여 도망가는 일본 순사 가와바다를 추격하여 처단했으며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화성지역의 3·1운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격렬했다. 우정면을 비롯한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에서의 만세시위는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고 이에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를 벌이는 한편 계획적인 보복만행을 자행하여 4월 15일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을 학살하였다.

시위 후 일제는 장안면, 우정읍내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선생을 비롯한 204명을 시위 주모 혐의로 검거하였다. 선생은 소요 등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형을 언도 받았고 9년 2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6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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