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대장정 소감⑧]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생각하다.
나는 6·25전쟁 60주년 대학생 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 3기의 대원으로 참가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많은 대학생들이 국토대장정을 가길 원하듯 나 또한 가고 싶었다. 처음 나는 몇 백 킬로미터를 걸으며 체력적 한계를 느끼고 극복할 정신력이 있는지 시험하는 것만을 생각했지만 6·25 전적지를 답사하며 걷는 향군국토대장정을 알고 이렇게 의미 있게 걷고 올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에서 지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합격후 주변에서 할 수 있냐, 괜찮겠냐. 라는 말들도 있었지만 딱히 가는데 큰 두려움이나 큰걱정 없이 국토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6·25 전적지를 답사하며 내가 이렇게 무지했나 싶었다. 과거가 있어야 미래도 있다고 하는데 곧 대학민국의 미래가 될 대학생들이 그리고 내가 과거에 대해 몰랐던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동시에 향군국토대장정에 오게 되어 그러한 사실을 깨 닳게 되고 반성함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배낭을 메고 때로는 빗속을 때로는 내려쬐는 햇빛 속을 걸으며 지나는 하루하루에 점점 커진 생각은 힘들다는 생각보다 고등학교 때 1년 내내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붙잡고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12일 동안 머리로만 알고 있던 6·25전쟁은 마음으로 이해한 느낌이었다.
그저 6·25전쟁이라는 큰 덩어리의 표면으로만 원인, 과정만을 달달 외우며 알아왔지만 내가 그 일부가 되고 개개인이 됨을 느꼈다. 그냥 6.25전쟁이 일어났던 땅에 사는 학생이 아니라 참전했던 많은 군인들 중 하나가 되고 그 가족들 중 하나가 됐다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고 그렇게 되자 저절로 눈물이 나고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들이 생기곤 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이번 국토대장정에서 가장 크게 얻어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한민국이 휴전국가 인 것을 잊고 있었다. 종전이 아닌 휴전임을 말이다. 평소 뉴스에서 북한 관련 기사가 나도 큰 관심도 없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 막연하게 생각했다. 6·25 전적지를 답사하며 많은 전투들과 특히 수많은 인명피해를 몸소 느끼며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6·25를 잊으면 6·25가 다시 온다고, 절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기에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가기 전에 알아보고 갔다면 좀 더 의미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하였다. 집에 온 후 '나는 왜 이때까지 잘 알지 못했나'라는 아쉽다는 생각에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한국전쟁관련 도서들을 빌려보기 시작했고 1차 오리엔테이션때 들었던 이 국토대장정은 걷는 것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이 6.25를 알고가라는 의미를 크게 보자면 이 또한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걷는 도중뿐만 아니라 후에도 많은 것을 얻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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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을 메고 6~7시간 걷다보니 다리에 통증도 생기기도 하고 물집도 생겼다.
이런 상황을 극복해 가며 걷는 나에게 기쁨이 느껴졌다. 걷는 매일 매일이 보람차게 느껴졌다. 참된 경험을 쌓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내가 평생 동안 경험하며 채울 수 있는 책장이 있다면 국토대장정으로 인해 많은 책을 채운 것이다. 또 이 국토대장정을 갔다 온 것이 시발점이 되어 다른 많은 활동들에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루하루가 지나며 줄어드는 일수에 아쉬움이 커져 갔었다.
아쉬울 때 끝냈기에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단 생각을 하지만 계속 이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소감문을 쓰기 위해 하루하루 쓴 일기를 보니 그때의 하루와 기분이 생각난다. 이런 기쁨을 또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국토대장정을 하며 얻어간 중에서 또 하나를 말하자면 인간관계가 아닐까 한다. 처음 시작할 때 국토대장정에 지원하기까지 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같이 힘들면서 정신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12일 동안 24시간 내내 함께 있으며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게 되었다.
내가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다른 이를 생각하며 지낼 수 있고 서로서로 이끌어 주며 지낸 사람들 이렇게 만든 인연들은 쉽게 끊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팀 '평화2팀' 그리고 좀 더 나아갔지만 '평화팀'에서만 얽매여서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 것이 작은 아쉬움이다.
내가 살아가며 잘한 것이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에 이번 국토대장정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06월 07일
'도전'이라고 하지만 실패해도 큰 손해가 오지 않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전은 쉽지 않다. 나는 평소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잘 시도해 보지 않았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해봤자 안 되겠지.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시도해서 실패했을 때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국토대장정 지원서를 쓸 때 다들 그렇듯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썼다.
하지만 합격자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6월 7일 결원이 생겼다며 전화가 왔고 그때야 나는 국토대장정 3기 대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내 이름이 없었을 때 섭섭함도 있었고 나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의 도전으로 실패했을 때 추스른 법도 경험하고 성공해서 완주까지 하게 되었으니 좀 더 얻어갔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6월 1일 도전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날이었고 6월 7일 성공한 날이었다.
2010년 6월 19일
2차 오리엔테이션은 모든 일정을 통틀어서 제일 신나는 날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팀원들 그리고 물품지급.
나는 평화팀이라 마지막에 물품을 지급받았는데 그 기다리는 짧은 순간조차도 이미 받은 다른 팀들이 너무 부러웠다. 물품 받았을때 절로 나오는 웃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집에 와서 물품을 펼쳐놓고 아 이제 진짜 내가 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평화2팀 천은정이란 명찰을 계속 만지면서 3기 대원에 소속되었다는 행복함을 느꼈다. 반면에 12일 동안 함께 걸을 팀원 12명이 모두 오지 않아 걱정이 되기도 했다.
2010년 06월 25일 1일차
걷는다는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그전에 6·25 60주년 행사가 있었다.
6.25전쟁에 참전한 UN국들에 감사패를 전달하는 것을 보며 남북전쟁이 남한과 북한만의 전쟁은 아니었다. 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를 하고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로 이동하였다. 이때까지 6.25에 대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를 시작으로 12일 동안 우리를 위해서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애써주셨구나 라는 생각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이곳을 시작으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국토대장정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마냥 즐거웠다. 첫 한 시간은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이 불편했지만 금새 익숙해져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국토대장정 오기 전에 다리를 다쳤었기 때문에 온통 거기에만 신경이 가있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다친 다리를 접질려서 많이 당황했었다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았지만 12일 동안 내가 가장 긴장하고 놀란 순간이었다. 기껏 왔는데 돌아갈 순 없다라는 생각에 아파도 걸을 생각을 한구석에서는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큰 부담 없이 첫날의 숙영지인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 도착하였고, 군부대에서 잔다는 것이 남자들은 아니었겠지만 새롭고 즐거웠다. 이미 학교에서 단체생활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국토대장정을 다른 여학생들보다 좀 더 편안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2010년 06월 26일 2일차
이날의 시작은 UN군 초전기념비였다. 2일차부터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해서 출발이란 느낌이 들었는지 이후에 전적지를 답사하며 많은 설명들을 들었지만 가장 머릿속에 남은 곳 이었다. UN군이 최초로 벌인 북한과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라 한다. 안타깝게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타국의 전쟁에 와 목숨을 잃은 많은 장병들에 고마움에 앞서 미안함이 느껴졌다.
아직 2일차인데도 내 의지와는 다르게 물집이 생기기 시작해서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생각이 들었다. 온 날보다 남은 날이 훨씬 많이 남았는데 벌써 난리니 말이다. 물집이 생길정도로 걸어보긴 처음이었지만 아픈 것을 신경 쓰지 않고 평소처럼 걸었더니 물집에도 곧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힘든 것이나 아픈 것을 인정하고 나면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시작부터 알게 된 셈이다.
고작 2일째인데도 모두 쉬는 시간에 아무데서나 눕고 앉아 잘 쉰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걷는 도중 어떤 분이 옆에서 배낭을 메고 걸어가시기에 저분 혼자 국토대장정 하시는 분인가? 알고 보면 우리 팀원 아니야? 하고 우리끼리 장난을 치며 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재향군인회 부회장님 이셨다. 그러고 보니 모자가 우리모자랑 비슷했지. 상상도 못했었다. 언제부터 같이 걸어오신 걸까?
이날의 끝은 공군방포2여단이었다. 부대 설명을 듣는데 인상적인 말이 공군은 비행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었다. 공군이라 함은 당연히 전투기 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방포여단은 공군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는 곳이란다.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를 위해 애쓰시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2010년 06월 27일 3일차
아침 식사 때 식사 시간표를 보니 우리 다음에 군부대의 군인들이 먹게 되어있어서 많은 배려에 감사했다. 아침에 배낭에 넣을 소지품 정리를 잘해야 하루 종일 덜 힘들 텐데 이 날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급한 대로 넣어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비가 오는 바람에 배낭을 트럭에 싣고 몸만 가볍게 가게 되었다.
초반이라 배낭이 없으니 날아갈 것 같아요 같은 건 없었지만 만약 우의를 입고 배낭을 메고 갔다면 찝찝하게 달라붙는 배낭에 힘들었겠단 생각이 든다. 커다란 우의가 입어보고 싶어서 비가 오자 신났지만 막상 입으니 너무 덥고 불편했다. 펑퍼짐한 우의를 뒤집어쓴 모습에 팀원들 서로를 보며 웃곤 했다.
원래 비가 안 오면 오후에는 배낭을 메기로 해서 계속 비가 오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비는 오지 않았지만 배낭은 없이 걸었다. 이왕 걷는 거 빗속에서 배낭을 메고 걷는 것도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마지막 1시간을 앞두고 천안재향군인회에서 얼음생수를 주시고는 함께 걸어 주셨다. 시원한 생수도 너무 신났고 같이 걸어주신다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복불복으로 결정된 우리의 숙소는 병영도서관 한쪽에 책꽂이가 있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냥 방 이었다. 많은 불평불만이 터졌지만 국토대장정에 참여하면서 밖에서 안자는 게 어디야 이 정도는 즐겁게 받아 들여야지 란 생각을 하며 짐을 다 풀고 있는데 숙소를 옮겨주셨다.
고마운 것이 매번 군부대에서 자니 제대로 씻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다는 것 이었다. 이 날 저녁에는 조별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준비물을 구하고 소수정예로 우리 팀 2명이 나갔지만 경악만을 남긴 우리 팀의 장기자랑이었다. 이 시대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앞서나간 개그였나 보다.
2010년 06월 28일 4일차
이 날은 길고 긴 고속화도로였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스팔트의 열기 때문에 배낭과 함께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는 밥차가 조금 늦게 오는 바람에 약 1시간 반 가량을 푹 쉬었다. 밥을 먹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쉬는 그 기분이란. 푹 쉬고 걸으니 신이 절로 났다.
나는 피부가 타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 날만은 햇볕이 너무 강해 꽁꽁 싸매고 다녀야만 했다. 쉬는 시간에 땅에 누웠는데 일어나니 땀자국이 흥건했다. 무료찜질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 걸을 길은 2km라서 짧다고 금방 쉰다고 스태프에게 들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안 나는 거였다.
알고 보니 지도가 잘못되어 5km 이상 남았다고 한다. 희망이 크면 절망도 큰 법이라고 조금만 가면 되네 했는데 2배 이상 남은 거리에 기운이 약간 빠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날은 약 30km를 걸었고 모두에게 제일 힘들었던 날이라고 한다. 가는 도중 한 아저씨께서 우리 팀에게 1.5L짜리 얼음물을 주셔서 너무 신났다. 모르는 분인데 걷고 있는 우리를 예쁘다고 얼음물을 주시다니.
첫날에 걷는 우리를 보고 어떤 분은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지”라고도 하셨는데 이렇게 우리를 대견하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어서 그 자체가 너무 고마웠다. 국토대장정 동안 이렇게 걷는 도중에 물을 주시는 분도 계시고 인사를 해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즐겁게 걸을 수 있었다. 나도 만약 길을 가다 국토대장정을 가는 행렬이 있으면 반갑게 인사해줄 수 있겠지. 도착한 부대에서는 숙소까지가 상당히 멀었다.
그 먼 길을 군인들이 2열로 쭉 서있는데 우리의 ‘대학생 전적지 답사 국토대장정’ 현수막을 보고 한 군인이 “아 나도 대학생인데” 하기에 이렇게 즐겁게 국토대장정 하고 있는 내 상황에 고마울 수 있었다. 자기 전에 카페에 쓰인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가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이렇게 큰 행복이라니, 동생 군대 가면 편지 많이 써줘야지.
2010년 06월 29일 5일차
이 날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그래서 표정이 좋지 않았고 스태프 한분이 내가 아파 보인다며 배낭을 차에 싣자고 하셨다. 괜찮다고 아픈 거 아니라고 들 수 있다고 하였는데 배낭을 가져가 버리셨다.
12일 동안 낙오 없이 란 내 결심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대원의 건강을 배려해주셔서 하신 결정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들고 갈수 있는데 못 들고 가게 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점심시간에야 가방을 받을 수 있었다.
아프면 배낭을 다시 실어야된다고 말씀하시고는 내게 배낭을 주셨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걷다보니 오늘의 목표인 계룡대 8.5km 팻말이 보였다. 8.5km라면 많이 남지 않았네. 라며 걸었지만 그 8.5km 에는 계속 되는 오르막길이 있었으니 쉽지만은 않았다. 오르고 오르니 드디어 나온 내리막이다.
오를때는 몰랐는데 내리막을 가니 무게가 앞으로 집중되어 물집들이 살려달라고 난리를 친다. 계룡대 정문을 17:50에 통과해야 된다고 하셔서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거의 가볍게 뛰는 속도로 빠르게 걸었다. 나는 선두라서 괜찮았지만 뒤를 보니 간격이 많이 벌어져있었다.
정문에 다가가니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그리고 평생가도 못 볼 육군 참모총장님등의 높은 분들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이때까지 의무지원 받은 적은 없었는데 팀원 오빠가 지구병원은 한번 가보라기에 갔는데 정말 좋았다. 육군 해군 공군의 본부가 있는 곳이라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치료중 깁스를 푼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통증이 있다 하자 “그럼 지금 다시 깁스를 하셔야 되는데요?” 라고 하시기에 깜짝 놀라서 안 된다고 하자 압박붕대라도 감고 가라고 했다. 순간 집에 가는 줄 알았다. 어떤 분이 상처가 심한 데도 꿋꿋하게 걸어온 것을 보고 나도 절대 중간포기는 없다고 생각했다.
2010년 06월 30일 6일차
오늘 오전에는 계룡대를 구경했다. 계룡대 본부에서 정말 큰 브리핑 실에서 육군 공군 해군에 대한 소개와 6·25에 대한 설명을 차례로 들었다. 생소한 분야라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 후 육군 '명예의전당'에 갔는데 수많은 자료들이 있어서 천천히 보고 싶었는데 그냥 지나치기만 해서 안타까웠다.
벽을 가득 채우는 전사자 명단에 이렇게 많은 이름들이 있지만 여기에 적히지 못한 다른 분들도 많겠지 라는 생각했다. 대체 전쟁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힌 걸까. 그 후 일정은 대전국립현충원 이었다. 이곳에서 향군국토대장정을 만들어주신 전 회장님께 감사드리고 천안함 희생 장병의 묘지로 갔다.
현수막의 46인의 사진과 이름 나이가 있었는데 19, 20이란 숫자들을 보자 마음이 너무 쓰렸다. 나이의 높낮음이 생명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동기 내 친구라고 생각되니 너무 힘들었다. 분명 본인들도 가족들도 평소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뀌다니 그 순간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족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현수막을 보며 천안함과 더불어 그 후 일어난 해군 링스헬기 추락사건이 생각났다. 우리학교를 졸업하신 선배님 이었는데 이런 사건들이 이토록 나와 가까울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이 날은 별로 걷지 않고 숙영지에 도착했다.
2010년 07월 01일 7일차
언제나 아침 첫 출발 1시간이 잠이 와서 가장 힘들다. 팀원이 걷는데 잠이 오냐 라고 묻기도 하지만 언제나 첫 1시간은 나에게 너무 힘들다. 화령장 지구 전적비에 갔는데 보지는 않고 밥만 먹었다.
그리고 이동을 한곳은 한 초등학교. 쉬려고 온곳인가? 했는데 그곳에서 화령장전투가 일어났었고 그 당시 화령장전투에 참여하신 참전용사분으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역사속의 이야기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참전하신분께 설명을 듣다니 역사를 몸으로 느끼는 기분이다.
연락병을 잡는 덕분에 적과 아군의 피해 비율이 150 : 1 라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 그 정도로 대승할 수도 있구나. 역시 정보가 중요하구나. 2일차 방포여단 건물 중에 ‘무심코한 다운로드 적에게는 실크로드’란 포스터가 붙어있었는데 같은 맥락인가 보다. 도착한 숙소에서는 샤워실과 숙소가 멀었다.
그런데 팀원 언니와 내가 빨래를 안 가져 오는 바람에 우리 둘만 그 어두운 산길을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부르며 뛰어갔다 왔다. 12일 동안 재밌었던 일중 하나일까. 무사히 빨래도 했지만 때문에 같은 팀원들이 좀 늦어지게 되었다. 단체생활에서 중요한 시간이 깨지는 바람에 미안했다.
2010년 07월 02일 8일차
오후부터 비가 왔다. 저번에도 비가 왔을 때 얼마 안와서 괜찮겠지 했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가방에 넣어놓은 샌들이 그리워졌다. 운동화에 물이 고여서 걸을 때마다 질척질척 소리가 났고 나중에 보니 물에 발이 퉁퉁 불어서 신발이 벗어지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마침내 버스가 보였을 때는 조금 기뻤다. 자존심상 많이 기쁘다고는 못하겠다.
계속 비가 온다면 정신이 없어서 내 몸 하나 움직이는 것에만 급급했을 텐데 호국의 다리로 이동했을 때는 비가 그쳐있었다. 그 다리에는 전투지원, 의료지원한 나라들의 국기와 지원내용이 쓰여져 있었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적은 지원이 온 나라에서는 살짝 섭섭함이 들기도 했다. 타국의 전쟁에 지원을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를 해야 될 텐데 말이다. 그 후 왜관전적기념관에 갔다.
기념관을 관람하는데 그중 발굴된 유해의 사진이 있고 가족의 품에 돌아가서 웃고 있는 호국영령 이런 식으로 쓰여 있었는데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저게 말이 되냐 전쟁 나서 자기 목숨을 잃었는데 웃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든 생각은 처음에 목숨을 잃었을 때는 정말 원망스러웠을 것 같지만 그게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죽음이 인정되고 자기 시신만이라도 발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칠곡대대 숙영지에 도착해서는 국방부 유해발굴단이 발굴하여 DNA 조사중인 6·25 참전용사들의 관과 유해를 볼 수 있었다.
하나하나 태극기로 쌓여진 수많은 관들을 보니 태극기가 이 분들은 나라를 위한 사람들이였습니다. 라는 것을 인정 해주는 것 같아 그 분들께 위로가 되길 바랐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이렇게 유해가 나오고 있다면 그 당시의 피해는 숫자로만 어림잡아도 너무 크다고 생각됐다.
2010년 07월 03일 9일차
오늘도 차에 배낭을 실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오르막길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배낭을 메지 않았는데도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니 땀이 줄줄 나곤 있었다. 그 상태로 베이비파우더를 바르고 있는데 국군방송이 와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제 정신이 아닌 채로 답변을 했는데 다행이 영상에는 나오지 않았다. 오르막길을 한참 걸었으니 내리막길도 한참 이었다. 내리막길의 끝은 다부동 전적기념관 이었다. 어제 왜관전적기념관보다는 실내 자료가 적었지만 야외전시장비들이 많아서 밖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편지 쓰는 시간이 이었는데 동생에게 편지를 쓰며 너도 꼭 국토대장정을 해봤으면 좋겠다. 라는 내용을 보냈다. 다부동전투에서는 군인들만이 아닌 경찰들도 전투에 참여 했다 한다. 졸업 후 해양경찰시험을 보려고 계획 중인 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나라를 위하겠다는 마음으로 전투에 참여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고맙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고마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될 수 있을까.
12일 동안 가장 환대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육군 제2작전사령부에 갔을 때는 군악대는 물론 의장대 시범까지 보게 되었다. 그것도 사령관님과 함께 사열대에 앉아서 말이다. 이렇게 많은 배려를 받으며 우리는 가고 있다.
2010년 07월 04일 10일차
아침에 항상 고민 되는 것은 오늘의 날씨다. 운동화를 신을까 샌들을 신을까 빨래를 꺼내야 할까 배낭 속에 넣어둬야 할까. 쉬는 시간에 앉아서 쉬고 싶지만 땅이 젖어버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다.
10일차나 되다보니 걷는 것도 익숙해져서 걸을 때도 심심한 것 같았다. 매번 지역이 바뀔 때 마다 그 지역 재향군인회에서 간식과 물을 주셨다. 오늘은 영천시 재향군인회였다. 그저 걷기만 하는 우리들에게 매번 이렇게 많은 것을 해주시니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쯤 영천 지구 전승비에 도착하였다. 영천 지구 전투는 최초의 방어선을 회복한 전투라고 하는데 이 전투를 이끈 백선엽장군에 대한 설명을 읽는 도중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고 하신 말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솔선수범 하시는 분이 전투를 지휘하셨으니 당연히 질 리가 없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타의 모범이 되다 는 말은 이런 분을 두고 한다는 것 같다.
이날의 도착지는 육군3사관학교이다. 팀의 오빠가 이 학교 휴학중이라는 얘기를 듣다보니 괜스레 반가운 느낌이었다. 저녁 식사 후 강의실에서 영천전투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래도 이제 막막하지 않은 것 보니 10일을 아무 생각없이 걸어온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저녁에는 롤링페이퍼를 썼는데 이제 이 정도로 왔으니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07월 05일 11일차
12일은 걷지 않으니 걷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끝마무리 잘하라고 그런지 날씨도 좋았다. 오늘의 장소는 국립 영천 호국원. 높은 위치에 참배를 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까지 올라가야 한단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밑을 보니 다 올라왔다. 라는 생각과 동시에 엄청난 수의 묘비들이 보였다.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해 주신 수많은 분들이다. 국립 영천 호국원은 정말 넓었는데 이곳이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에서 만든 곳이란다. 나는 엄청난 곳에서 국토대장정을 하고 있구나. 마지막이라는 느낌 때문인지 나도 힘들긴 힘든가 보다. 머릿속으로 남은 거리를 계산하는 것 보니 말이다.
드디어 계산한 거리가 끝나니 행군 끝. 솔직히 끝난 기분이 안 들었다. 그냥 잠시 쉬는 것뿐 계속 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 끝이라니. 숙영지인 포항해병1사단에 가기 전에는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 갔는데 이럴 수가 오늘 문을 열지 않았단다. ‘학생’ 신분으로 전투에 참여 했다는 생각 때문에 일정중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이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부산에서 많이 멀지 않으니 개인적으로 가봐야겠다. 해병대에서는 국토대장정을 마무리 하는 밤의 전야제가 있었다. 이때까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수고했단 말을 건네며 각자 한마디씩 하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면 끝나겠지
2010년 07월 06일 12일차
새벽에 차는 부산으로 달렸다. 도착한 곳은 재한 UN 기념공원. 이곳은 고등학교 때 친구랑 우연히 온 적이 있었는데 6·25 전적지 답사라는 의미를 담고 오니 새로웠다. 추모관에서 육군사관학교 생도 신분으로 6·25에 참전하게 된 참전용사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6.25의 역사를 또 한 번 책이 아닌 경험으로 느끼게 되었다.
안에 있는 기념관이 너무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시간 때문에 답사 하지 못했다. 12일 동안 아쉬운 점이 이것이었다. 어느 전적지 이든 제대로 보고 나오지 못한점.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뒤쪽에 2~3면이 더 있었고 거기에도 빽빽하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가야할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나 같으면 억울한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장소인 해군작전사령부로 이동을 했다. 부산사람이라서 그런가 조금 익숙한 모습에 마음이 편안했다. 대조영함을 견학후 점심식사를 하고 해단식을 하였다. 한명 한명 수료증을 받고 회장님과 사진을 찍고 재향군인회분들과 악수를 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스태프를 포함에서 약 120명이 수료증을 받는 동안 군악대에서 연주를 해주었다. 마지막까지 정말 고마움만 남았다. 6·25 전쟁 60주년 대학생 전적지 답사증 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이제 끝났구나!”란 생각. 아쉬움과 뿌듯함 자부심 여러 감정들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타의가 아닌 내 의지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것 그리고 6·25 전쟁에 대해 경험으로 알아간다는 것 소중한 것들을 많이 가져간다.
많은 전적지와 기념비들을 보며 그래도 6·25에 대해 잊지 않기 위해 6·25를 위해 희생한 많은 분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런 많은 기념물을 남긴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비록 이 곳에 오기 전에는 몰랐지만 알아가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며 이러한 기회를 주신 재향군인회에 감사드린다. 이곳에 올 수 있었던 나에게도 고맙고 함께 걸었던 우리 팀 그리고 3기 모두에게 고맙다.(konas)
천은정(한국해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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