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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병 지원입영 롤 모델 수기집-28〕내 인생의 밑거름이 되어준 군대

Written by. 정동욱   입력 : 2014-01-27 오전 11: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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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청장 박창명)이 2013년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현역병 복무를 마친 예비역을 대상으로 지원입영 복무 후 취업 또는 학업에 도움이 된 사례를 모은 ‘현역병 지원입영 롤 모델 수기집’ 『내청춘에 충성2013』에 실린 글임.(편집자 주)

  2010년 9월, 카투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나는 병무청 홈페이지에 카투사 모집공고가 뜨자마자 지원서를 제출했다. 가장 인기가 높은 월 중에 하나인 2월에 지원을 했는데, 치솟는 경쟁률을 보며 떨어질까 봐 걱정도 했지만 차분히 결과를 기다렸다.

 시간은 흐르고 11월이 되어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다. 합격자들에게 문자로 통보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휴대폰만 붙잡고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오후 3시쯤, 문자가 도착했다. 직감적으로 합격 통보 문자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기쁜 마음으로 휴대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3000만원 까지 대출가능 – 김미영 팀장’.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대출문자라니... ‘카투사는 물 건너갔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 한 통의 문자가 다시 한 번 휴대폰을 흔들었다. ‘카투사 합격. 2011년 2월 28일 논산훈련소 입영’ 대충 이런 내용의 문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카투사로 선발되었고 약 3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에 군에 입대하게 된다.

 논산훈련소에서 5주, KTA(Katusa Training Academy)에서 3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부대에서 헌병으로 자대생활을 시작했다. 이등병 시절엔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영어공부라곤 수능, 토익공부 밖에 해본 적이 없던 나였기에 미군들과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고 이런 나를 미군들은 답답하게 생각했다. 나 역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기에 죽기 살기로 영어공부를 하고 낯선 미군부대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미군들에게 말 한마디 더 걸어보려고 했고 헌병업무에 필요한 내용들도 웬만하면 미군들에게 질문하고 배웠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카투사 선임들을 찾아가 한 번 더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미군부대에서 우수한 군인이 될 수 없었다. 미군들의 대부분이 동양인들보다 체격이 크기 때문에 많은 카투사들이 신체적인 부분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매일 일과가 끝난 후에 체육관에 가서 부대원들과 함께 체력단련에 힘썼고 결국 일병으로 진급한 직후에 PT MASTER(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2MILE달리기 모든 항목에서 90점 이상 받으면 부여되는 명칭)까지 딸 수 있었다. 모든 일에 열심히 임하다 보니 2인 1조로 투입되는 근무에 많은 미군들이 나와 일을 하고 싶어 했고 나를 하이스피드솔져(뛰어난 군인을 일컫는 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군생활의 초반기는 사회에서의 습관을 버리고 뛰어난 군인이 되기 위해 분골쇄신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실력이 많이 늘어 미군들과 대화하는데 불편함이 없어졌고 헌병으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군인이 되어갔다. 이렇게 노력하던 시절이 지나가고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고 군 생활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돼서 목표도 사라지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우리 소대 카투사를 대표하는 선임병장(Senior KATUSA)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때가 상병 5호봉이었다. (선임병장은 소속 부대 카투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카투사와 미군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제반 문제들을 사전에 파악, 조정하는 등 중재자 역할을 함과 동시에 부대 카투사들을 총괄, 통솔하는 일을 한다.)

 나는 이등병, 일병 시절에는 선임병장은 정말 편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계급이 높고 직책이 있기 때문에 힘든 일이 없을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임병장이 되자마자 카투사에 관한 규정들을 모두 공부하고, 부대원들을 관찰하고 관리하고 미군들과의 일도 처리하는 등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우리 부대 카투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이었다. 마치 군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낯선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능력 있고 멋있는 선임병장이 되고 싶었다. 모두가 유능하고 동시에 서로 잘 어울리는 부대를 만드는 것이 내가 세운 목표였다.

 나부터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고, 후임병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선임이 되려고 노력했다. 때때로 카투사들이 미군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미군 책임자를 찾아가 카투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기도 했다. 평소에는 카투사들과 미군들과의 운동경기를 주선하고 서로 한식과 양식을 만들어 파티를 여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군 생활 초반에 업무와 영어 등 기술적이고 지식적인 것들을 배웠다면, 후반기에는 리더의 역할을 연습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21개월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군 생활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하고 많은 깨달음을 얻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외국에 나가본 경험이 전무했던 내가 미군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훈련받고 전투식량을 까먹었던 시절이며, 개인적인 삶을 살아왔던 내가 책임감을 가지고 후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들과 싸워보기도 한 시절이기도 하다. 나라의 소중함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내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해 힘들어도 이 악물고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특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에게 군대란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지식과 지혜를 배울 수 있었던 너무나도 감사한 곳이다.

 실제로 입대 전에는 795점이었던 TOEIC점수가 전역 후 곧바로 친 시험에서 945점으로 상승하였고, 복학 후 외국인 교수님의 수업을 무리 없이 들을 수 있고 참여할 만큼 영어실력이 많이 늘었다. 또한 요즘 많은 다툼이 일어난다는 팀프로젝트를 분쟁 없이 잘 이끌어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전역 후에 다시 학교를 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했던 나였지만, 실제로 부딪혀보니 입대전보다 내 자신이 더 성숙해졌고 인내심과 책임감은 늘었으며, 군대에서의 경험들이 학업을 수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대는 어디를 가든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뿌듯함을 얻는 것은 기본이고 인생에 필요한 경험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입대를 앞둔 후배들이 군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버리고, 군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워 진정한 대한민국의 남아로 태어나는 것이 이 땅의 모든 예비역들의 바람이다. 이글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konas)

정 동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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