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③〕동행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3년 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 ‘우수’ 글임. (편집자 주)
1. 만남 전
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올 초부터 외교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공익근무요원이다. 평소에 국제관계나 외교문제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내 공익생활이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외교부를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이곳에서 나는 동북아 1과로 배정받았다. 동북아 1과는 동북아시아국에서 일본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뉴스에서 일본에 대해서 보고 들은 게 어느 정도 있어서, 조금은 친숙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서기관님들을 도와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더 잘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국제적 동반자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일제 강점하에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일본의 아베 총리와 그를 따르는 극우세력은 아직까지도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회피하기만 한다.
예전에 과장님께서는 “역사에 눈감은 자 미래를 볼 수 없다.”는 명언을 인용하셨는데, 일본인들도 이 말을 가슴 깊이 명심했으면 좋겠다. 사과가 늦어질수록 그만큼 역사의 무게는 납덩이처럼 불어나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우리 부서는 추석을 맞아 직원분들과 함께 위안부 피해 할머니 몇 분이 계신 나눔의 집으로 가서 장관님의 서한이 든 편지와 선물을 드리고 위로해 드리기로 했다. 나눔의 집에 가기 전 날, 선물과 편지들을 포장하고 부치느라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비워낼 수 없는 억울함을 안고 계신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가끔씩 근무 중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몇 분인지 컴퓨터 알림창으로 뜨는데 그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마음이 아팠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남아있는 모든 이의 가슴속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나눔의 집 가기 전날 밤에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할머니들과 인연이 닿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의 침략 행위는 우리 민족에게 쓰디쓴 상처를 준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나는 앞만 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내일은 뒤돌아서 민족의 거대한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혀왔다.
혹자는 나에게 낡디낡은 골동품 냄새가 난다고 침 뱉을 수 있겠다. 하지만 어쩌면 공익요원 신분으로 복무 중에 할머니들을 만나 아픔을 알아주는 것은 군인이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명예로운 일이 아닐까 자부심이 생겼다. 이러한 낯선 느낌은 내 영혼이 자부심으로 빛나는 듯한 황홀감을 주었다.
2. 만남
다음 날이 다가왔다. 출근해서 대충 일을 마무리 짓고 직원 분들과 경기도 광주로 출발했다. 직원 분들은 아직도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이끌어 내지 못해 할머니들께 어느 정도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우리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른 오후의 따스하고 고른 햇살이 야속하기만 했다.
2시간 정도를 달려 드디어 광주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일상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의 짙은 향기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간단한 점심을 마치고 바로 나눔의 집으로 향했다.
나눔의 집은 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후의 맹렬한 햇살에도 할머니들의 동상과 추모비는 차갑기가 그지 없었다. 그 어떤 여름도 이 곳에서는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들의 보금자리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할머니들을 도와드리는 복지사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나는 준비해온 과일과 선물을 드렸고 그 분들은 잘 오셨다며 할머니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하였다.
복지사 중 한 분은 여승이었는데, 조계종 측에서 할머니들을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분들은 따로 떨어져 힘들게 살아가는 할머니들을 모아 돕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들이 모이면 상처도 공유하고 아무래도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듯 싶었다.
신기한 점은 많은 일본사람들이 봉사하러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일본 사람들이 안에서 봉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를 대신해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문득 모든 일본인이 다 잘못되고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훈훈한 모습이 진전된다면 언젠간 할머니들의 오랜 숙원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뚜렷한 확신도 생겼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할머니들이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첫 만남은 어색하고 경직된 분위기였다. 할머니들도 우리가 굉장히 낯설어 보이는 눈치였다. 우리는 이 침묵을 깨고 인사를 드렸고 그렇게 우리의 대면은 시작되었다. 얘기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았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할머니들이 지닌 감정의 가치와 그 깊이는 5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는 일본의 사과를 이끌어낼 것이고 그동안의 책임에 사과한다는 장관님의 편지를 직접 읽어드렸고 할머니들은 박수를 치셨다. 한 국가의 자존심과 힘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고 이것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지느러미가 잘려 무기력하게 해류에 몸에 맡길 수 밖에 없는 물고기들에게 새로운 힘을 달아준 것만 같았다.
우리는 서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심의관님의 고향과 같은 고향 출신인 할머니가 있으셔서 고향 이야기도 하셨다. 할머니들은 당신들의 건강상태도 알려주셨다. 치매 기운이 있으신 할머니도 있으셨고, 폐암을 얻으신 분도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할머니 한 분이 청년이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전날 노래를 준비하긴 했었는데,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려니 여간 쑥쓰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남행열차를 부르긴 했었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청년 노래 연습 좀 더 해야겠어 허허’ 라고 기분 좋은 면박을 주셨다. 동행한 연구원 누나들도 노래를 불렀고 할머니들도 답가를 불러주셨다. 할머니께서 장윤정 노래를 부르셨을 때 참 신세대시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분은 배춘희 할머니였는데 기분좋게 노래를 부르셨지만 괜히 나 혼자서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할머니의 흥겹게 노래 부르는 모습에서 청춘의 꽃처럼 활짝 핀 그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나 인생에 한번 밖에 오지 않는 젊음을 시대의 시련에 다 바친 데 대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아쉬울 때 더 빠르게 다가온다. 우리는 곧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할머니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고 아쉬움의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헤어짐의 시간을 즐기지 않는다. 그동안 살면서 체득한 경험이랄까? 나도 모르게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래야만 아쉬움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 헤어짐
우리는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들렸다. 그곳은 일제 강점기 때 위안소를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 의지할 데 없던 할머니들의 아픔과 극한의 고통에 맞선 절망의 흔적이 느껴졌다. 하루에 30명 이상의 일본인들을 상대했다고 하니 믿겨지기가 않았다. 그 좁디 좁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견뎌야만 했던 고통스런 숨결이 떠올랐다. 실제로 보니 충격은 더 했다. 왜 일본인들은 과학에 대한 교육, 훌륭한 사상에 대한 교육은 그렇게 하면서 반성과 고개 숙임은 왜 배우지 못했을까?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본 것 만큼 가슴이 떨려왔다.
그 곳에서는 할머니들이 표현한 그림도 전시되어 있었고,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생전의 육성도 녹음되어 있었다. 특히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가는 날”이라던 작품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우선, 나에게 이렇게 값진 경험을 하게 해준 외교부에 감사했다. 진정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오늘 봉사를 통해 모든 종류의 모욕과 폭력의 위험성을 깨달았고, 내가 당한 것은 아니지만 내 뿌리에 흐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피가 느껴졌다.
결국 과거의 엉켜있는 실타래를 푸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화해 국면이 찾아올 것이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한 철학자는 잘려진 줄기에서 자란 새 싹은 결코 똑같은 나무가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아니다. 나는 믿는다. 과거의 반성과 화해 속에 진정한 한-일 관계가 올 것이라고. 이를 위해 공익요원인 나 자신이 조금의 보탬이라도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Konas)
최재훈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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