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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방위 조약 50주년, 어제와 오늘

Written by. 동아일보 김정안기자   입력 : 2003-10-01 오전 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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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은 6.25 전쟁 종전 직후인 1953년 한미 상호 방위조약이 체결된 지 꼭 50 주년이 되는 날이다. 양국은 조약 체결 이후 반세기 동안 ‘변함없는 혈맹’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올해 초부터 ‘미래 한미동맹’의 성격을 재조명하려는 작업이 공개적으로 이뤄질 만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도 전통적 형제국인 중국 내부에서 ‘북-중 군사동맹 관계’ 수정론이 제기 되는 등 한반도 전체의 정치 군사적 지형이 재편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익에 입각한 친소(親疎)관계만 있을 뿐 영원한 우방이란 있을 수 없는 냉엄한 국제 사회의 현실에서 한국과 미국처럼 반세기가 넘게 공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해 온 사례는 흔하지 않다.
한미동맹이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버팀목’ 때문이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최근 대북 인식의 변화와 반미 감정의 증폭 등으로 한미동맹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지만 동맹의 근간인 한미방위조약이 한국의 안보와 외교에 큰 기여를 해 온 점은 분명하다.

▶ 한미방위조약의 체결 배경=한미방위조약의 탄생은 역설적이게도 반세기 전 정전 협정을 둘러싼 한미의 첨예한 대립이 발단이었다.
6.25전쟁 당시인 1953년 미국 주도의 유엔군은 공산군측과 정전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정부는 구소련과 중국의 세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정전 협정의 체결은 유엔군의 철수와 함께 북한군의 재 남침을 초래한다며 크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정전 협정체결이 대세가 되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간에 체결된 조약과 같은 수준의 한미방위 조약 체결과 경제 원조를 미국에 요구했으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그 해 6월 유엔과의 사전 협의 없이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 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실력행사’에 나섰다.
이를 보고 한국을 무시한 정전협정의 체결은 힘들다고 판단한 미국은 국무부 특사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잇달아 한국에 파견, 교섭을 통해 그 해 8월7일 한미 방위조약을 가조인하고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식을 가졌다.
조약체결로 양국은 1882년 조미통상 협정체결 후 71년 만에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지킨다는 공동이해에 기초한 동맹관계를 맺게 됐다.

▶ 한미방위조약의 성과와 의미= 한미방위조약은 강력한 군사동맹으로 반세기 동안 한국 안보의 큰 축을 담당해 왔다.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부침과 미국의 국방정책에 따라 53년 당시 7만여 명에서 2003년 현재 3만 7000여명으로 감축됐으나 여전히 대북억지력의 핵심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최전방에 배치된 미 2사단은 1만 4000여명의 병력과 각종 첨단장비를 보유하고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trip wire)’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해 왔다.
최근 일각에선 자주국방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주한미군의 전력대체비가 연간 140억 달러이고, 북한의 전략전술에 관한 정보의 90%를 미군의 감시장비에 의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설익은’ 자주국방론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한미방위조약은 한국의 외교적 지위상승에도 큰 기여를 했다. 세계 초강대국과의 혈맹관계를 ‘지렛대’로 한국은 러시아와 일본 등 주변국은 물론 국제무대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연세대 국제 대학원 이정민교수는 “미국의 확고한 방위공약을 뼈대로 한 한 미방위 조약이 없었다면 안보위기가 상종하는 한국이 지금과 같은 오교적 위상과 협상 능력을 꿈꿀 수 없었을 것”이라며 “91년 거센 반미시위로 미군 철수한 뒤 군사적 외교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필리핀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中 “北 객관적 대우” 혈맹서 동반으로러 우호조약 파기 “남북한에 등거리”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의 동맹을 한미동맹의 대항마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 같은 동맹은 냉전 체제 붕괴 이후 관계 재설정의 과정을 걸쳐왔다.

▶ “이제는 혈맹이 아니다.” = 북-중관계는 전통적인 혈맹관계에서 ‘이중적인’동반자 관계로 바뀌고 있다. 중국에선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북한을 객관적으로 대우하자”는 기류가 형성됐다. 그러나 그 후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 제기되자 중국은 94~96년 차관협정 및 대북 무상원조 협정을 맺었다.
61년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북-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 남북한 등거리 외교=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은 80년대 말 이후 몇 차례 바뀌었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 북한을 지원했던 친북한 정책은 러시아의 88년 서울올림픽 참가와 91년 한-러 수교를 거치면서 뚜렷한 친한 정책으로 바뀌었다.
61년 체결한 북-러 우호조약은 35년 만인 96년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파기됐다. 대체 조약은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러시아 정부는 2000년 국가 두마(의회)에서 “남 북한에 균형관계를 유지한다(등거리 외교)”는 원칙으로 채택했다.


[한미방위조약 모호성 논란]자동 군사개입 조항 명시 안돼

반기문(潘基文) 대통령외교보좌관은 30일 한 오찬간담회에서 “전 세계에서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나라는 10개국도 안 된다. 한국은 그 중에서도 세 번째 동맹국이다”고 말했다. 이라크 추가파병을 놓고 논란이 거듭되고 있지만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반 보좌관의 말처럼 한국은 독일(7만2005명) 일본(4만1626명)에 이어 세 번째로 미군 주둔 규모가 큰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이다.

미국의 군사 및 안보동맹은 한국 일본 등 개별국들과 체결한 ‘동맹 조약’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국들과 맺은 ‘집단안전보장조약’의 형식으로 대별된다. 독일과는 NATO조약을 통해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 일본 외에 호주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과 안보동맹(또는 군사적 우호관계)을 맺고 있다.

동맹의 가장 강력한 형태인 ‘자동군사개입’을 명시한 조항은 미국과 NATO간의 집단안전보장조약에만 명시돼있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한미동맹은 이보다 ‘동맹의 수준’이 떨어진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는 ‘(유사시)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한다’고 돼있을 뿐 자동군사개입 조항은 없다. 다만 휴전선에 배치된 주한미군이 유사시 이른바 ‘인계철선(trip wire)’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도록 돼있어 한국 국민들이 한미동맹을 ’영구불변한 혈맹’이라고 믿어온 것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조약 체결의 목적을 ‘태평양 지역의 안정’이라고만 밝히고 있어 성격이 모호하다는 비판론도 없지 않다. 양국 내 일각에서 방위조약 개정론이 일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안보조약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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