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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⑧] 제3의 인생

Written by. 배상훈   입력 : 2017-09-17 오후 8: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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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 공모에서 당선된 글임.(편집자 주)

 “드디어! 나왔다!!” 2015년 6월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태양을 마주하며 논산훈련소를 박차고 나왔다. 호주 영주권자인 나는 8년 동안의 호주생활을 마치고 30살이라는 늦은 나이가 돼서야 군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한양대학교 2학년까지 나의 제 1의 인생 이었던 야구선수생활. 신일고등학교 시절 시합도중 불의의 사고로 2번의 팔꿈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었고 결국 나의 10대를 바쳤던 야구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야구 이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는 무작정 호주 유학길에 올라 제 2의 인생을 위해 달려왔다. 그로부터 8년이라는 시간동안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고 예체능이 아닌 경영학 전공으로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맥쿼리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나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였다. 언제부턴가 호주의 생활이 한국보다 편해졌고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제 2의 유승준” 이 될 수도 있었던 나에게 군입대는 제 3의 인생을 도약하는 첫 걸음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나에게는 큰 숙제가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지 못한 상태로 21살에 호주로 넘어가 2014년 1월 1일 내 나이 28살이 되는 해까지 한국으로 돌아와서 입대를 하지 않으면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병역기피로 병역법을 위반한 범죄자가 돼야 했고 결국 호주 시민권자로 호주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민이 많았다. 30살의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와 군복무를 하게 되면 최소 2년 동안의 공백이 생긴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힘든 유학생활을 거치며 쌓아왔던 나의 커리어와 앞으로의 불투명한 미래를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건가라는 의문점이 계속 생겼었다. 주변지인들은 내가 한국에 돌아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여겼고 나또한 2년의 공백 기간을 감수하며 한국에 들어올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면 할수록 대한민국의 국적을 포기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 이었으며 더군다나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떠나 앞으로 내 조국에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불효라 생각이 되었다. 결국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앞으로 떳떳하게 살아가려면 꼭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일생에 2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군복무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의 호주 생활을 잠시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내 인생의 또 다른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30살의 군입대는 제3의 인생의 시작이었고 도전이었다.
 
마포구청 사회복무요원

 나는 이전 야구선수 시절에 불의의 사고로 팔꿈치 수술을 두 차례 받게 되어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다. 2015년 5월 14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4주훈련을 마치고 서울 마포구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2년 전 처음 마포구청에 출근하여 사회복무요원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배정된 문화관광과에서 짧은 기간 동안의 낯설었던 기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늦은 나이에 군복무를 시작한 덕분에 청사 내 8,9급 공무원은 나와 나이가 비슷했고 내 옆자리는 나보다 나이가 적은 9급 공무원이었다.

 점심식사 시간에는 각 팀끼리 외부에서 식사를 하다 보니 청사 내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국 뮤지션 스팅의 대표곡인 “Englishman in Newyork“의 가사를 보면 ”I am an alien, I am a legal alien, I am an Englishman in New york“ 이란 후렴구가 있다. 영국 사람인 스팅이 미국 뉴욕을 돌아다니며 똑같은 언어를 쓰지만 다른 엑센트를 쓰는 자신을 보며 마치 Alien(이방인) 같았다고 표현한다.

 내 기분이 딱 그랬다. 내 주변에는 그 어렵다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30대 공무원이지만, 함께 일하고 있는 나는 파란 유니폼을 입은 30대 사회복무요원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한 열등감이였는데 그땐 왜 그렇게 속상하던지.. 2년의 복무기간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 족쇄와 같다고 생각했다.

행사 전문요원

 내가 근무하는 문화관광과는 구청사 내에서도 굉장히 업무비중이 높은 과에 속한다. 마포구는 외국인 관광객의 유명관광지인 홍대를 중심으로 문화재와 유적지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관광산업이 굉장히 발달한 수도권 내 지역으로 손꼽힌다. 매년 1월1일 하늘공원에서 열리는 ‘신년 해맞이 행사’, 10월 중순에 3일간 열리는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 등 마포구 주관의 크고 작은 문화관광 행사가 많다.

 그러다보니 문화관광과 직원분들과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진행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과거 호주에서 부업으로 관광지 안내가이드 일을 했었고 대학교 시절 학생회 활동 등 활발한 성격에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 했던터라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참여 했던 경력이 있어 행사준비를 하는 게 어색하진 않았다.

 또한, 작은 역량이나마 방문 외국인관광객을 위해 필요한 안내문 번역과 현장에서 통역도 하며 자연스럽게 문화관광과 직원분들과 팀원으로 함께하며 내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던 사회복무요원은 ‘아웃사이더’란 단어가 차츰 지워졌다. 어색한 나의 복무생활은 길지 않았다. 공무원들과 같이 커피도 마시며 일상적인 농담도 하고 사석에서 식사도 함께하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기에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신 게 아니라 처음 문화관광과에 배정된 그날부터 항상 밝게 인사하며 나를 따듯하게 대해 주었고 친절했다. 하지만 ‘나는 공무원이 아닌 사회복무요원이야’ 라는 작은 열등감으로 잠시 선을 긋고 내 자신을 잠시 아웃사이더로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사회복무요원으로서 맡은 업무분장이 공무원분들께 많은 도움을 드릴 수는 없었기에 필요한 곳에 쓰일 때마다 뿌듯함을 느끼고 이것도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내 상황을 알아주고 이해하길 원한다면 그건 이기적인 마음가짐이다. 나의 가치는 나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의 폐암 선고

 2015년 6월 논산훈련소에서 곧 훈련이 끝난다는 벅찬 마음으로 4주 훈련의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퇴소하기 이틀 전 저녁식사 후 내무반으로 들어오고 있던 중 내가 있던 25연대 9중대 중대장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고 전해주셨다. 부득이한 일정으로 퇴소일에 논산훈련소로 마중을 못 나올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입소 전 아버지가 논산훈련소로 데려다 주신다고 하셨지만 30살에 군입대가 자랑이 아니라는 생각에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논산훈련소에 들어 왔었다. 부모님과 동행하여 논산훈련소 앞에서 같이 식사하고 사진 찍는 전우들을 보며 약간은 외롭고 적적한 마음이 들었지만 퇴소일에는 아버지가 마중 나오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입소하였다.

 사실 갑자기 못 오신다는 소식에 약간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지.. 퇴소 후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으셨다. 집에 도착 후 어머니는 나를 반겨주시며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더니 얼마 전 있었던 아버지의 건강검진에서 폐암의 조짐을 발견하여 정밀검사를 받으셨고 며칠 뒤 아버지와 함께 검사결과를 확인하러 강남세브란스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며칠을 선잠을 자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건만.. 결과는 폐암 확진, 그리고 임파선과 뼈 전이 상태였다. 좌절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평생 든든한 아버지로 내 옆에 당당히 서 계실 줄 알았는데.. 혹시라도 내가 군복무를 기피하고 한국에 못 들어오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민다.

 아버지는 15년 동안 영유아 전집 출판사를 운영해 오셨다. 최근 출판업계의 불황으로 아버지 회사도 예전만큼 좋지 못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맘 편히 여행도 못 다니시며 오로지 일만 해오셨다. 나의 야구선수 시절 해외 전지훈련과 개인훈련 등 굉장히 많은 비용이 들었음에도 묵묵히 지원을 해주셨다. 아버지의 나를 위한 시간과 금전적인 투자가 이전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철없던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죄송스럽기만 하다.

 아버지가 폐암선고를 받으시고 건강을 돌보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양주에 한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회사 일을 내려놓게 되어 부득이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업무를 맡아야 했고 병무청과 마포구청 복무기관장님의 배려로 겸직허가 승인을 받게 되었다.

 구청에서 근무가 끝나면 잠시 회사에 출근하여 업무를 볼 수 있었고 아버지의 부재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거래처 직원분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현재는 회사가 원만하게 정리가 되었다.

 비록 아버지의 피땀으로 일궈놓은 회사는 이전처럼 활발하게 운영이 되고 있지는 않지만 더 이상 회사일로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어졌다. 현재 아버지는 아직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암세포가 많이 줄어들어 긍정적인 마음으로 몸을 돌보고 계신다. 건강이 최고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야기를 마치며..

 나는 2017년 5월 13일 32살의 나이로 사회복무요원을 만기전역 하게 된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시간을 헛되이 보냈을까? 나는 최근 며칠 동안 지난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나에게 되물어 보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사회에 있는 내 친구들은 지난 시간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결혼을 하였고, 새내기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하였고, 그리고 나의 고등학교 야구 동기는 미국으로 넘어가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럼 나는 사회복무요원으로서 보낸 지난 시간이 헛된 나날들 이었고 군복무는 나의 인생에 가치 없는 시간이었을까?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너 자신이 되어라” 스팅의 노래 끝 소절이다. 나는 과감히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인생을 배웠다고.

 30대에 군복무를 하는 동안 열심히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노력하는 주변사람들을 보며 열등감으로 내 상황이 너무 하찮아 보일 때도 있었고 갑작스런 아버지의 폐암선고로 가장이되어 가족을 책임져야 했었다. 그 동안 쌓아왔던 나의 커리어는 잠시 멈췄을지 몰라도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고 그 어떤 힘든 일이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동안 어려운 일도 많았고 30대의 사회복무요원으로써 창피하단 생각으로 시작한 나의 모습은 어느 덧 2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더 당당한 대한민국 청년이 되어 전역한다. 나를 위해 좋은 근무환경 만들어 주신 구청 주무관님들과 군복무를 하며 만난 좋은 인연에 감사하며 무엇보다 언제나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에게 사랑한단 말 전하고 싶다. 앞으로 날개를 활짝 필 나의 모습을 응원한다.
 
배상훈(마포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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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미소(pjw3982)   

    애썼어 젊은이도

    2017-09-18 오전 9:21:29
    찬성0반대0
1
    2021.1.24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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