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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기념 시설물 소개」㉕ 뉴질랜드 참전기념석

Written by. 대학생 인턴기자 조승찬   입력 : 2021-11-16 오후 2: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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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뉴질랜드는 그 해 6월 27일 결정된 유엔안보리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안에 전폭적인 지지을 표명하면서, 7월 3일 푸카기(Pukaki)호와 투티라(Tutira)호를 출동시켰다. 이어 7월 14일 뉴질랜드는 유엔사무총장으로부터 지상군 파견을 요청받았다. 당시 뉴질랜드 육군은 제한된 정규군만 보유하고 있어 해외파병을 실시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뉴질랜드 정부는 국방위원회 토의를 거쳐 7월 26일 1개 포병부대를 새로 창설해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7월 27일 뉴질랜드 육군은 신규창설 파병부대 이름을 ‘Korean Force(Kayforce)라고 짓고 장교 38명과 병사 640명으로 제16야전포병연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그 해 12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 부산시 서구 암남공원에 마련된 뉴질랜드 참전기념석. 1950년 12월 31일 부산에 도착한 뉴질랜드 SS올몬드 군함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konas.net

 

 이들 뉴질랜드군의 주력부대를 수송한 SS올몬드 군함을 기념하는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기념석’이 부산에 있다. 뉴질랜드군의 첫 번째 군사캠프가 세워 졌던 곳이 송도여서 이곳에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기념비와 함께 그 뜻을 기리고자 2001년 5월에 건립하였다. 뉴질랜드군의 참전역사를 살펴보고 그들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부산 서구 암남동에 있는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기념석에 다녀왔다. 기념석에 도착하면 안내판과 기념석에 쓰인 거북바위를 볼 수 있는데, 이 거북바위와 기념패는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용사회가 부산시에 기증한 것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그리고 안내판에는 뉴질랜드의 참전과정이 적혀 있다.

 ▲ 이 거북바위는 1950년 12월 31일 이른 아침 7시 30분 부산에 도착했던 SS올몬드 군함을 기념하기 위해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 용사회가 부산시에 기증하였다. ⓒkonas.net

 

 뉴질랜드 해군은 한국전 참전 결정에 따라 우선 프리깃함 두 척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조기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뉴질랜드 해군은 1950년 7월 3일 오클랜드군항을 출발하여 1950년 7월 30일 한국 해역에 도착했다. 이후 뉴질랜드 해군은 본격적으로 유엔군의 해상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총 8척의 프리깃함이 임무를 교대하면서 수송선단 엄호, 해상초계, 기뢰 제거 작업 지원, 지상군 함포 사격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50년 12월 31일 부산에 도착한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는 1951년 4월 가평전투에서 영국군 미들섹스(Middlesex) 연대 제1대대와 아길(Argyll) 연대 제1대대, 호주연대 제3대대에 대한 화력 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중공군 공세를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뉴질랜드 포병연대는 마량산 전투, 제임스타운선 방어 작전 등에서 영연방 제28여단에 화력 지원을 수행하면서 큰 전공을 세웠다.

 ▲ 거북바위 기념패. 뉴질랜드군은 가평전투를 비롯하여 마량산과 고왕산, 그리고 후크고지 전투 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23명이 전사 및 사망하고 79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명이 실종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konas.net

 

 특히 제16야전포병연대는 가평전투에서 3,000∼10,000m 사정권 내에 드는 각종 표적에 약 10,000발의 25파운드 탄을 발사하여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이로 인해 중공군은 호주대대 진지에서만 약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전투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은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하에 3일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다. 연대장 무디 중령은 사창리에서 중공군 대부대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단 1문의 포도 잃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철수시킨 전투지휘능력을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전 참전기간 동안 뉴질랜드의 병력파견은 약 1,000명 선을 유지하는 가운데 1951년 6월 30일에는 797명을, 그리고 1년후인 1952년 6월 30일에는 1,111명을 기록하였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7월 31일의 병력현황은 1,389명이었다. 1개 포병연대와 프리깃함 2척을 파견한 뉴질랜드는 기간 중 연인원 3,794명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뉴질랜드군은 가평전투를 비롯하여 마량산과 고왕산, 그리고 후크고지 전투 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23명이 전사 및 사망하고 79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명이 실종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뉴질랜드군은 휴전 이후 임무를 수행하다가 지상군은 1954년 11월에, 해군 함정은 1954년 3원 2일에 최종적으로 철군했다.

 뉴질랜드는 수교이전부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온 우방국이었다. 뉴질랜드군이 한국전 참전과정에서 보여준 용맹성과 자유수호의지는 대한민국이 존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뉴질랜드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바탕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우리나라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의 마음으로 그 뜻을 기리고, 그 분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새기며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조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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