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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기념] (61) 백마고지 삼용사 추모비

Written by. 인턴기자 김민   입력 : 2026-10-12 오후 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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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폭탄 하나를 건내준 뒤, 살아 돌아올 가망이 없는 임무를 내려준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을 수락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하겠지만, 1953년 정말로 그러한 임무에 지원한 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세 명씩이나.

이 세 명의 흔적은 서울 어린이대공원 경내에 위치한 작은 언덕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등을 보인 채 적을 향해 돌격하는 세 장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이 바로 “백마고지 삼용사”이다.

 ▲ 백마고지 삼용사의 동상 전경 ⓒkonas.net

 

 ▲ 뒤에서 바라본 동상. 용감하게 앞으로 뛰쳐나가는 삼용사의 뒷모습이 장엄하다.ⓒkonas.net

 

백마고지 삼용사, 혹은 삼군신이라 불리는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는 1953년 모든 고지전을 통틀어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다는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백마고지는 주인이 무려 열두 번이나 바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해당 고지를 점령하면 철의 삼각지대를 감제(주위를 두루 내려다 보이는 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952년 10월 12일 국군은 열한번째 공세를 실시해 중공군이 점령중인 백마고지 주봉을 탈환하려 시도했으나, 적이 진지를 건설하고 강력하게 저항해 실패했다. 

진지를 파괴하는데 효과적인 포병 지원이나, 공군 폭격도 기대할 수 없던 상황 속에서, 강승우 중위를 필두로 세 명이 진지를 파괴하는 임무에 자진해서 지원했다.

그렇게 삼용사는 각각 폭약과 박격포탄, 수류탄을 손에 쥔 뒤, 진지를 향해 돌격했고 결국 진지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끝내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진지가 파괴된 덕분에 국군은 다시 백마고지 주봉을 점령할 수 있었고, 이어진 중공군의 공세도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고지를 되찾지 못하고 되려 공세 역량만 상실한 중공군은 고지 점령을 포기하고 물러났고, 전투는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삼용사는 막 배치된 신병이 아닌, 최소 반년 전 입대하여 수많은 전투를 보고 경험한 숙련병이었다. 이들은 폭탄을 손에 들고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달려가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삼용사가 소속되었던 제9사단을 기념하는 부조. ⓒkonas.net

 

하지만 그럼에도 삼용사는 작전에 지원했고, 이들의 희생 덕분에 국군은 백마고지, 나아가 철의 삼각지대 인근을 정전 협정시까지 사수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도 기꺼이 모두를 위해 앞장섰던 삼용사의 숭고한 희생이, 오늘날의 휴전선과 대한민국 국토를 그리는 데 일조한 것이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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