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에 만난 사람들
"이제 몇 번이나 더 나올지 몰라. 갈수록 힘은 떨어지고 한번 올적마다 몸이 쑤시고 아픈지 몰라요. 그래도 이맘때 여기 나와서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 옛날 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은 편안해 져요".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월남 참전 전사자 묘역(1099번) 故 조진우 해병하사의 묘비 앞에서 만난 조 하사의 어머니 표정에는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지난 세월에 대한 안타까운 풍파가 한눈에 느껴지는 듯 했다.
"글쎄 '며칠후면 고국에 돌아가서 어머니를 만나 뵙게 되겠습니다' 하고 편지가 왔는데 막상 돌아온 것은 아들의 전사통지서와 뼛가루 뿐 이었어요". 그윽한 눈길로 아들의 묘비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망울에는 눈 속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늠름한 청년 조진우 군이 보이는 듯했다.
"아 그러게 세상에 이런 기막힌 경우도 있겠어요. 제대를 1주일 남겨놓고 전사를 했으니.." 함께 자리한 같은 참전용사인 조하사 삼촌의 말이 이어졌다.
가만히 앉아서 듣고있기만 해도 안타까운 심정이 가득해진다. "제가 진우를 본게 어디서인줄 아십니까? 진해 월남 파병 교육대에서 마지막 교육을 받고 삼랑진 교육대로 가기 전 화장실에서 본게 전부입니다. '너 왜 여기 있니' 하고 물으니 삼촌 따라 월남에 가기 위해 입대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결국 삼촌과 조카가 동시에 월남전 참전용사가 된 것이다.
"우리 청룡부대 1진은 그야말로 총알받이였습니다. 상륙작전을 하다보면 열에 아홉은 적의 총탄세례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남편도 6·25 전쟁 당시 유격대원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일찍 돌아가셨고, 아들 4형제도 큰아들 조진우씨를 비롯해 3형제를 먼저 보내고 이제는 손자와 단 둘이서 살고있다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한껏 배어나고 있었다.
할머니의 강권(?)에 못 이긴척 하며 자리에 앉아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조카되는 참전용사와 묘비에 따라놓은 퇴주와 소주로 잔을 기울이자 어느새 얼굴이 화끈해진다. 서너잔 마신술로 얼굴은 달아올랐지만 마음속으로 합장하며 생면부지 모르는 가신님의 명복을 빌었다.
이제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에 차려진 과일이며 제수품을 한사코 가져가라고 하기에 대추 두알만을 공손하게 받아들고 묘역을 떠났다.
이 날 제 50주년 현충일이던 6일 정오 경, 월남참전 전사자 묘역에는 '짜빈동' 전투참전 전우회원을 비롯한 월남참전 용사들과 전사자 가족들이 묘비를 찾아 헌화 분향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역 앞에서 개최된 안보단체의 기자회견 현장을 취재하고 현충탑을 찾아 분향한 뒤 월남참전 전사자 묘역을 찾았다.
묘역에 들어서자 가지런하게 정돈된 묘역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숨져간 님들을 위해 조화와 생화들로 장식되어 엄숙함을 더 자아내게 하였다.
한 묘비 앞에 당도해 사진촬영을 하고있자 누군가 한 사람이 곧 다가오며 "유가족 되느냐" 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저는 여기 뭍힌 분과 월남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입니다" 한다.
서로 통성명을 나누고 선 채로 말문을 열어갔다. 최인봉(58세. 사업)씨. 그는 파월 교체1진으로 66년 7월에 캄란으로 파병된 해병 청룡 부대원 이었다. 그리고 묘비의 주인공은 당시 청룡 포병대대 7중대 선임하사인 故 김충일 해병상사였다.
그는 월남의 '츄라이' 지역에서 벌인 '투망작전'에 투입돼 작전을 전개하고 복귀하던 중 베트콩과 대규모 교전을 전개하다 전사했다고 한다. 당시 작전에 62명이 투입되었다가 생존해 돌아 온자는 18명에 불과했다며 몸서리치듯 당시를 기억하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전쟁이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이 어디인지 분간이 되질 않습니다"하면서 "여기 이분은 우리 분대장 이셨습니다". 한 사람 건너 묘비를 가리키는데 거기에는 송관석 중사가 영면(永眠)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금 다녀갔는지 묘비아래 수박과 소주한잔이 정갈하게 따라져있다.
최인봉씨는 현재 베트남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업가였다. 최근 업무차 귀국하였다가 현충일과 겹치게 되어 현충원 묘역을 찾았다고 한다.
사업을 벌이면서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옛 기억은 다만 하나의 아픈 추억으로 잊혀지고 서로가 협력하며 열심히 사업 번창을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다만 현충일이나 술 한잔하고 울적해 질 때면 생사를 함께 했던 옛 전우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는 말과 "다시는 우리와 같은 세대가 이 땅에 또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하는 말을 남기고 뒤 돌아섰다.
다시 몇 걸음을 더 옮기자 이번에는 하얀색 정장을 입고 양산을 받쳐들고 서너 살 또래의 여자아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한 아주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묘비에는 '고 양병수 병장 지묘'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먼 친척 뻘이라고 답을 한다. 거리가 멀고 이제는 찾아올 만한 가까운 사람도 없는 데다 서울에 살고있어서 매년 한번씩은 찾는다고 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정답게 나누냐고 웃으면서 묻자 "손녀인데 할아버지 되는 분이 어떻게 여기에 계시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면서 자리에 앉아 함께 먹기를 권유했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현충원 곳곳은 참배객들로 줄을 이었다. 현충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에서 젊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온 고사리 손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마다 우리는 현충일이면 나라를 위해 숨져간 호국영령 앞에 옷깃을 여기며 그 위훈을 기린다. 그러나 그분들을 기리는 행사는 국력신장에 비해 오히려 퇴색되어 가는 느낌 지울 수 없다.
호국의 수호신들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고, 그 분들의 고귀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청소년 교육에서부터 범국민적 계도와 홍보가 절실한 때가 아닌가 한다.
반세기를 맞이한 현충일을 기해 국가와 국민이 적극 나서서 호국정신을 더욱 계승 선양하며 님들의 명복과 더불어 그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진정한 현충일이 되기를 기대해 본 현충일 하루였다.(Konas)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월남 참전 전사자 묘역(1099번) 故 조진우 해병하사의 묘비 앞에서 만난 조 하사의 어머니 표정에는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지난 세월에 대한 안타까운 풍파가 한눈에 느껴지는 듯 했다.
"글쎄 '며칠후면 고국에 돌아가서 어머니를 만나 뵙게 되겠습니다' 하고 편지가 왔는데 막상 돌아온 것은 아들의 전사통지서와 뼛가루 뿐 이었어요". 그윽한 눈길로 아들의 묘비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망울에는 눈 속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늠름한 청년 조진우 군이 보이는 듯했다.
"아 그러게 세상에 이런 기막힌 경우도 있겠어요. 제대를 1주일 남겨놓고 전사를 했으니.." 함께 자리한 같은 참전용사인 조하사 삼촌의 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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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서 듣고있기만 해도 안타까운 심정이 가득해진다. "제가 진우를 본게 어디서인줄 아십니까? 진해 월남 파병 교육대에서 마지막 교육을 받고 삼랑진 교육대로 가기 전 화장실에서 본게 전부입니다. '너 왜 여기 있니' 하고 물으니 삼촌 따라 월남에 가기 위해 입대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결국 삼촌과 조카가 동시에 월남전 참전용사가 된 것이다.
"우리 청룡부대 1진은 그야말로 총알받이였습니다. 상륙작전을 하다보면 열에 아홉은 적의 총탄세례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남편도 6·25 전쟁 당시 유격대원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일찍 돌아가셨고, 아들 4형제도 큰아들 조진우씨를 비롯해 3형제를 먼저 보내고 이제는 손자와 단 둘이서 살고있다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한껏 배어나고 있었다.
할머니의 강권(?)에 못 이긴척 하며 자리에 앉아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조카되는 참전용사와 묘비에 따라놓은 퇴주와 소주로 잔을 기울이자 어느새 얼굴이 화끈해진다. 서너잔 마신술로 얼굴은 달아올랐지만 마음속으로 합장하며 생면부지 모르는 가신님의 명복을 빌었다.
이제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에 차려진 과일이며 제수품을 한사코 가져가라고 하기에 대추 두알만을 공손하게 받아들고 묘역을 떠났다.
이 날 제 50주년 현충일이던 6일 정오 경, 월남참전 전사자 묘역에는 '짜빈동' 전투참전 전우회원을 비롯한 월남참전 용사들과 전사자 가족들이 묘비를 찾아 헌화 분향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역 앞에서 개최된 안보단체의 기자회견 현장을 취재하고 현충탑을 찾아 분향한 뒤 월남참전 전사자 묘역을 찾았다.
묘역에 들어서자 가지런하게 정돈된 묘역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숨져간 님들을 위해 조화와 생화들로 장식되어 엄숙함을 더 자아내게 하였다.
한 묘비 앞에 당도해 사진촬영을 하고있자 누군가 한 사람이 곧 다가오며 "유가족 되느냐" 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저는 여기 뭍힌 분과 월남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입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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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월남의 '츄라이' 지역에서 벌인 '투망작전'에 투입돼 작전을 전개하고 복귀하던 중 베트콩과 대규모 교전을 전개하다 전사했다고 한다. 당시 작전에 62명이 투입되었다가 생존해 돌아 온자는 18명에 불과했다며 몸서리치듯 당시를 기억하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전쟁이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이 어디인지 분간이 되질 않습니다"하면서 "여기 이분은 우리 분대장 이셨습니다". 한 사람 건너 묘비를 가리키는데 거기에는 송관석 중사가 영면(永眠)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금 다녀갔는지 묘비아래 수박과 소주한잔이 정갈하게 따라져있다.
최인봉씨는 현재 베트남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업가였다. 최근 업무차 귀국하였다가 현충일과 겹치게 되어 현충원 묘역을 찾았다고 한다.
사업을 벌이면서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옛 기억은 다만 하나의 아픈 추억으로 잊혀지고 서로가 협력하며 열심히 사업 번창을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다만 현충일이나 술 한잔하고 울적해 질 때면 생사를 함께 했던 옛 전우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는 말과 "다시는 우리와 같은 세대가 이 땅에 또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하는 말을 남기고 뒤 돌아섰다.
다시 몇 걸음을 더 옮기자 이번에는 하얀색 정장을 입고 양산을 받쳐들고 서너 살 또래의 여자아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한 아주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묘비에는 '고 양병수 병장 지묘'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먼 친척 뻘이라고 답을 한다. 거리가 멀고 이제는 찾아올 만한 가까운 사람도 없는 데다 서울에 살고있어서 매년 한번씩은 찾는다고 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정답게 나누냐고 웃으면서 묻자 "손녀인데 할아버지 되는 분이 어떻게 여기에 계시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면서 자리에 앉아 함께 먹기를 권유했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현충원 곳곳은 참배객들로 줄을 이었다. 현충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에서 젊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온 고사리 손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마다 우리는 현충일이면 나라를 위해 숨져간 호국영령 앞에 옷깃을 여기며 그 위훈을 기린다. 그러나 그분들을 기리는 행사는 국력신장에 비해 오히려 퇴색되어 가는 느낌 지울 수 없다.
호국의 수호신들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고, 그 분들의 고귀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청소년 교육에서부터 범국민적 계도와 홍보가 절실한 때가 아닌가 한다.
반세기를 맞이한 현충일을 기해 국가와 국민이 적극 나서서 호국정신을 더욱 계승 선양하며 님들의 명복과 더불어 그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진정한 현충일이 되기를 기대해 본 현충일 하루였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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