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의 나라, 리비아를 다녀와서(1)
필자는 1월 17일부터 24일까지 리비아에 다녀왔다. 리비아 정부의 초청으로 리비아 외교부가 주관하는 10개국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세미나 전체주제는 “식민지 시대 손해에 대한 배상청구권”(The Right to Reparation for Colonial Damages) 문제였다.
회의는 트리폴리 시내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 나라 최고의 호텔인 Korentia호텔(리비아정부와 말타가 50대 50으로 투자한 합작회사이다)에서 열렸다. 회의에는 초청국 리비아 외에 이태리, 한국, 베트남, 세네갈, 나이제리아, 짐바브웨=‘로데지아’의 후신, 알제리, 튀니지, 터키 등이 참가했고, 현지 주재 외교관들도 다수 참여했다. 개막식에는 북한 대사도 참여했는데, 필자는 그와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회의는 이틀간 오전 9시 반부터 저녁 8시까지 열렸다.
필자는 이튿날 회의에서 짧은 영어이기는 하지만, “청구권문제의 해결: 한국의 경험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6월 한-일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한일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더불어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약칭 청구권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 청구권 협정 체결의 과정, 당시의 한일관계 및 협정의 주요내용, 청구권과 관련한 주요 법적 쟁점(기본관계조약 해석을 둘러싼 논쟁 포함), 청구권과 식민지 과거청산의 관계 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한국의 케이스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내렸다.
리비아는 우리와 거의 같은 시기인 1911년부터 1943년까지 이태리의 식민지 하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한-일합방조약이라도 체결했지만, 이태리는 그마나 조약 체결도 없이 일방적으로 리비아를 무력강점한 것이었다.
(2차대전 중에는 이태리의 동맹국인 독일의 그 유명한 롬멜군단이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무쏠리니의 이태리 군대와 독일군이 1943년 연합국에 패퇴함에 따라 미.영.불 3개국 군대가 분할 점령진주했고, 곧이어 이들이 1951년까지 각각 점령지에서 군정을 실시했다. 이후 1951년 리비아왕국이 건설되어 18년간 왕정체제가 들어섰다. 그러다가 카다피 대위가 1969년 9월 1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대령까지 올라갔다. 참고로 현재 리비아에는 대략 7-8만명의 군인이 있다. 카다피는 ‘왕정=군주주권체제’를 폐지하고, 이른바 ‘자마히리아’체제, 곧 직접인민정치체제를 도입하였기에 그의 왕정타도, 집권과 통치는 곧 혁명에 해당된다.
※ ‘자마히리아’는 정치면은 인민에 의한 직접민주주의, 경제면은 사회주의체제를 혼합한 것이다. 통치구조로는 의회격의 인민회의와 정부격의 인민위원회가 존재하는데, 북한체제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리비아가 멀리 한국에서 국제법학자를 초청한 데는 이태리와의 과거청산을 함에 있어 한국의 경험을 배우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21세기에 들어와서까지도 계속 과거청산, 식민지 잔재 청산 운운하는 것이 다소 생뚱맞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도 여전히 시민사회에서 종군위안부문제나 피폭자문제를 전후 미청산의 과거사로 계속 제기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리비아측이 이런 세미나를 개최한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카다피는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AU, AU는 아프리카단결기구, 곧 OAU의 후신이다.)을 주도하는 핵심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리비아가 식민지 시대 손해에 대한 배상청구문제를 하나의 국제적 이슈화 혹은 아프리카 전체의 의제로 만드는 데(Agenda Setting)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세미나는 국제적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열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앞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20세기 미청산의 과거사문제로 피식민 아프리카의 배상문제를 유엔으로 들고 가 서방세계를 압박하고, 최대한의 경제적 실리를 취하려 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일본의 경우처럼 이미 ‘경제협력’이라는 형태로 피식민국가들을 원조하여 식민지 배상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또 다시 이런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선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틀간의 세미나 중 가장 독특한 내용이었고, 또한 필자에게 가장 흥미를 끌었던 -그러나 리비아를 포함한 아프리카 참석자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 것은 베트남 참석자의 발표였다. 베트남측 참석자는 Do Duc Dinh라는 교수였는데, 그는 리비아에서 외교관으로 십수년간 재직한 바 있다고 했다. 또 현재는 베트남-리비아 우호협력위원회에 관여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베트남의 경우 2차대전 이전 오랜 기간 그 나라를 식민통치했던 프랑스와 식민지 배상문제를 협상한 적도 또 금전배상을 청구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또한 다년간 전쟁을 치른 미국과도 수교를 하거나 그 후의 과정에서 전쟁피해나 기타 청구권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그들에게 있어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체제개혁과 대외 경제개방을 잘 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이 곧 식민지 시대의 유산과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공산화된 직후 국내적으로 자본가나 일부 외세의존세력을 척결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후 지금까지 과거청산을 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의 발표문은 파워프인트 용으로 작성됐는데, 그의 발표문 내용 중 “우리(베트남)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직 미래를 향해 발전적으로 나가는 것이 곧 식민지 잔재청산이다.”(Looking to the future, instead of returning to the sad past)라고 지적한 부분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아울러 베트남은 식민지 본국에 대해 그들이 식민지에 대해 가했던 파괴를 상기하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하는 데 경주할 뿐, 실제로 배상이나 보상을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이 치사하고 거지처럼 구걸하는 것으로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 주). 나아가 그는 또 베트남은 더 이 상 베트남 사회 내에 '증오를 확산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우리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른 배경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베트남의 식민지 잔재 청산 개념은 매우 전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리고는우리의 실정을 돌아보았다. 한해 5천억원 이상을 물 쓰듯 써가며 20여개 가까운 과거사위원회를 운영하는 대한민국의 현실, 곧 과거에 매몰돼 희망찬 미래를 향해 나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을 말이다.
베트남은 분명 희망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한 사람의 발표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앞으로 힘차게 나가려는 자에게는 필시 그 전진을 막을 장애물은 없을 것이다.
* 리비아 체류기간 중 리비아 주재 우리 공관원들을 만나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 몇 군데를 방문했다. 앞으로 몇차례로 나누어 독자들에게 말씀드리기로 하겠다.
제성호(중앙대 법대 교수)
출처:프리존(http://www.freezo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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