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미사일 커넥션과 칸 네트워크(3)
노동1호의 수출 및 제 3세계 확산이 가지는 의미는 과거의 스커드 미사일 수출과 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스커드 같은 단거리 탄도탄은 엄밀히 말하면 포병화기의 연장선상개념으로 운용 된 것이다. 잘해야 40km가 한계인 야포의 사거리를 극복하고자 프로그나 어네스트 존 과 같은 무유도 로켓이 개발되었고 그것보다 좀 더 긴 사거리의 병기 개념으로 활용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스커드와 같은 단거리 탄도탄이었다. 그러나 노동과 같은 중거리 탄도탄은 1000km이상의 사거리를 이용, 경우에 따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적대국의 국토 대부분을 커버하는 준 전략무기로서 사용이 가능하고, 그에 따른 정치 외교적 응용범위도 종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실제로 과거 냉전당시 동서 유럽의 국경에 배치되었던 중거리 탄도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미․소 본토에 떨어져 배치된 대륙간 탄도탄 못지않은 정치적 억지력을 가졌었다. 미․소의 중거리 탄도탄이 냉전 종식과 함께 제일 먼저 폐기 된 것도 그러한 이유였고, 한때는 중거리 탄도탄이라는 병기 체계 자체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등장해 제 3세계 국가의 베스트셀러 상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노동 1호였다. 그것은 수출대상국의 지역균형 그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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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먼저 이란에 판매된 노동의 예를 들어보면 샤하브-3(SHAHAB-3: 샤하브-1, 2는 북한 제 화성-5, 6호의 이란 판)로 라이센스 생산되어 이슬람 전체가 적대하는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중동전체에 이란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게다가 파키스탄에 수출된 노동1호의 경우에는, 파키스탄이 개발한 핵무기와 결합되어 더욱더 강력한 무기로 변신했다. 그것은 적대국 인도를 위협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북한과 주변 이슬람 국가로 피드 백 되어 한미 안보당국자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북한의 노동 미사일은 일명 ‘칸 네트워크’와 북한을 잇는 중대한 매개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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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네트워크’의 중심인물이자 파키스탄의 국가적 영웅,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1998년 파키스탄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서독 벨기에 네덜란드등을 거치며 물리학과 농축우라늄 기술을 배웠고, 1976년 귀국 후엔 카후타 연구소를 건립하여 핵탄두 기술 개발에 전념했다. 그는 먼저 핵무장에 성공한 인도에 대항하기 위해 파키스탄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보았고, 나아가 그 기술을 주변국에 전파에 반 서방 핵클럽을 만드는 것까지 기도했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이란, 리비아, 북한에 우라늄 농축 기술과 원심분리기 도면, 부품 등을 제공해왔으며 이들 3국 실무자들과 콸라 룸푸르, 카사블랑카, 이스탄불, 모로코 등지에서 만나 관련 부품을 건넸고 기술자문 역할을 맡아왔다. 이것이 일명 ‘칸 네트워크’였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아니면서도 핵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는 파키스탄에 앞서 이스라엘과 인도가 있지만, 이들 국가의 핵기술은 주변에 확산되지 않은데 비해(이스라엘과 남아공이 한때 공동핵개발을 했다는 의혹은 있다.) 칸 박사가 벌인 행위는 사실상 3세계 핵확산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핵무기 확산시도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북한의 탄도탄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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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박사는 90년대 초 핵개발과 동시에 발사수단 의 확보를 연구했다. 핵무기 체계라는 것은 핵탄두의 확보라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을 상대국에게 투사하게 만드는 투발수단과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파키스탄이 적대국 인도의 주요도시를 공격하기 위해선 북한이 개발한 사거리 1300km의 노동 1호의 기술이 절실한 것이었다. 칸 박사는 노동미사일이 아직 개발단계이던 1991년부터 13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1997년 12월에는 파키스탄군 육군참모총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리고 파키스탄 제 노동 1호인 ‘가우리’는 4개월 후인 1998년 4월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 미 정보당국은 가우리가 칸 박사가 북한으로부터 들여온 10~12개로 분해된 노동 1호의 부품을 조립하여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임을 선언 한 것은 미사일 실험에서 1달 남짓한 5월 28일 이었다.
문제는 북한의 미사일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에 공헌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북한의 미사일기술과 파키스탄의 핵탄두 기술이 일종의 구상무역의 형태로 양국 간에 교환되었던 것이다. 이란에 제네바 핵합의 후 플루토늄 핵개발 프로그램이 봉인되어 있던 북한의 입장에서 파키스탄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사용한 핵탄두 기술은 몹시 탐이 나는 것이었다. 대규모의 설비가 필요한 플루토늄재처리에 비해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은 좀더 시설의 규모를 숨기기 쉬웠다. 또한 플루토늄 핵탄두는 재료와 구조의 특성상, 핵분열을 위해선 고도의 정밀도를 가진 기폭장치의 개발과 반복된 핵실험을 통한 폭발 데이터 구축이 필요했다. 그러나 서방은 저러한 기폭장치에 필요한 부품유출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작년 10월의 북한 핵실험이 예상을 및도는 낮은 폭발력을 보인것도 기폭기술의 미비로 보는 측도 있다. 반면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탄두는 실험이 없다해도 이론상 설계만 완벽하다면 실전에서도 거의 불발하지 않는다. 지난 2차세계대전, 미국이 1945년 7월 16일 세계최초의 핵실험을 플루토늄 탄을 이용하여 성공시켰음에도 히로시마에 가해진 세계최초의 핵공격에는 우라늄 탄을 사용했던 것도 저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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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관심을 보이자 칸은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기술과 설비 및 자재를 북한이 입수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거기에다 칸 네트워크의 해당국들은 동시에 북한과 미사일 커넥션을 이루고 있는 국가-이란, 리비아, 파키스탄-들이었다. 칸 네트워크와의 이러한 거래는 단순히 북한의 제네바 핵 합의 위반을 넘어서서, 대량살상병기의 확산이라는 중대한 문제로서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었다. 북한은 이러한 ‘위험한 거래’를 통해 1996년부터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탄두 개발 프로그램을 가동했고 그것이 드러난 것은 잘 알려진 대로 2002년 켈리 특사의 방북 당시의 사건을 통해서였다. 켈리 특사 일행에게 HEU를 이용한 핵개발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강석주 외무상이 시인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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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북핵문제는 국제안보이슈로 부활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인 상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4년의 상황과 달리 칸 네트워크와의 연계라든지 중동과의 미사일 커넥션을 통한 북한 발(發) 대량살상병기의 확산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지금 시점에선, 북핵문제 하나의 해결만으로 국제사회가 안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노동 1호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개량형을 개발, 선전하여 출자자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쇼 비즈니스 상품이 다음에 설명할 대포동 시리즈이다. (konas)
김영림 코나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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