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민족주의 이념과 대응책
1. 서론
김대중 정부 이래의 ‘햇볕정책’과 2000년 6월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북한은 ‘민족공조’론과 ‘우리민족끼리’ 논리에 입각, ‘민족’을 중심 개념으로 삼아 대남 선전공세를 강화해 오고 있다.
남한 내 친북 세력 역시 ‘민족’을 앞세워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민족’이라는 개념과 구호를 선점(先占)하여 선전 공세를 취하다보니, 우리 국민들은 ‘민족’ 개념에 혼돈을 일으키며 수세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를 통해 ‘민족주의’가 국민들에게 발휘해 온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사용하는 ‘민족’ 개념과 대한민국의 ‘민족’ 개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에 따라 북한 민족주의의 실체를 구명(究明)해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3·1절은 일제의 식민지 압제에 저항하여 한민족 전체가 비폭력으로 궐기한 날이다. 그러므로 3·1절의 키-워드는 ‘독립’과 ‘민족’이다. 2007년 3·1절 88주년을 맞아 북한의 ‘민족’ 중심 선전공세를 특히 주목하고 경계해야 한다.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를 3·1절 이후부터 분석하여 그 개념과 논리를 이해·평가하고, 북한의 선전공세에 대한 대처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필요하고도 의미 있는 일이다.
2. 북한의 민족주의 — 기원과 유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보면, 대략 3·1절 이후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 방법론의 모색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발아(發芽)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무렵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식민지 국가들이 ‘제국주의’에 대한 독립사상과 운동을 고취시키기 시작한 기간이었다. 동시에 제3세계의 민족적 독립운동이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의해 영향을 받아 고무되기 시작한 기간이기도 하였다.
3·1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예속상태에서 ‘반일(反日)’ 민족주의 사상과 행동이 거족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 한국의 민족운동은 (i)민족의 실력과 의식을 먼저 배양하여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독립 달성을 목표로 하자는 방안 (ii)미국 등 선진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외교뿐만 아니라 대일(對日) 무력항쟁에 이르기까지 이들과 공동전선을 펴 민족 독립을 쟁취하자는 방안 (iii)3·1 운동의 평화적 시위운동이 실패했음을 반성하여 사회주의 무력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방안 등으로 나뉘어 추진되게 된다.
이 중 사회주의 혁명 운동은 소련 ‘코민테른’의 지도에 입각한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과 중국의 무력혁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으며 전개되었다. 특히 사회주의 무력 혁명 운동 가운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무력혁명의 영향을 받아, 분파된 형태의 소규모 게릴라 중심 항일운동이 전개되게 된다. 김일성이 훗날 ‘무장 항일투쟁’이라고 격상시켜 역사를 왜곡하기까지 하게 되는 소규모 무장투쟁이 바로 북한 민족주의의 기원이다.
따라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의 1930년대 유격대 무력 항일투쟁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한반도 북부에 공산체제를 건설한 이후, 김일성은 자신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제시대 한민족의 계급투쟁 및 항일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주체사상을 내세우게 되면서 북한에서는 1920~193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에 관한 대대적인 연구 사업을 전개하였다.
김일성은 이와 관련, “간고하고 복잡한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가는데서 우리 앞에 나선 가장 중대한 문제는 우리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세우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해 항일혁명투쟁과 ‘주체’를 연결시켰다. 주체사상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제 시대의 항일투쟁을 ‘주체’ 논리와 결합시킨 것이다.
3. 북한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에 의해 부정된다.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통한 ‘평등의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국제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 민족의 이익을 추구하고 이에 봉사하는 목표를 갖는 것으로 판단되는 민족주의는 원리상 사회주의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가 부르조아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방해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훗날 레닌은 반(反)제국주의 운동에서 민족주의의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인정, 이른 바 ‘진보적’ 민족주의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간 협조와 조화의 측면을 발견하려 애썼다. 이 점에 대한 레닌의 독창적 공적은 민족과 계급의 변증법적 결합을 가능케 한 그의 철학적 창안에 있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 인식은 북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그 계급적 본성에 있어서 민족주의와 아무런 인연도 없으며 사회주의 사회에는 민족주의가 발생할 수 있는 사회계급적 근원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1985년에 간행된 「철학사전」의 민족주의에 대한 설명을 보면, “민족주의는 근로대중의 계급적 이익을 떠난 ‘전민족적 리익’을 내세움으로써 로동계급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이 진정한 계급적 리익과 민족적 리익을 자각할 수 없게 한다 … 민족주의는 결국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고 로동계급이 자기의 근본리익을 위하여 투쟁할 수 없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45년 이후 혼란스러웠던 해방 공간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갖는 영향력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 전술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1948년 5월에 방북한 김구(金九)와의 회동에서 김일성은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공산주의 의식이 민족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려 애썼다(김일성 저작집 4).
또한 김일성은 일제시대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해방 이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수행을 통하여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조선민족”의 긍지를 발휘하자고 강조했다(김일성 저작집 1). 또 김일성은 “민족산업, 민족경제, 민족군대, 민족문화”라는 용어와 표현을 자주 사용했으며, 그 구체적 내용을 풀어서 언급하기도 했다(김일성 저작집 1~5).
4. 주체사상과 민족주의
북한 사회주의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갖는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중반 나타난 주체사상은 민족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주체사상은 1950년대 중·후반 일어난 중·소 분쟁에서 ‘종주국(宗主國)’ 간 ‘관계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자주노선을 견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차단하고 단절하려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주체사상은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충격적 변화에 직면해 ‘우리식 사회주의’와 ‘조선민족제일주의’로 변용되어 나타났다. 특히 1978년 등소평에 의한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 채택과 고르바쵸프에 의한 소련의 개방 노선 전환은 북한에게 있어 강력한 외부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를 북한은 절감하게 된 것이다.
‘조선민족제일주의론’은 한마디로 북한이 소련, 동구, 중국과는 핏줄과 언어가 다른 민족임을 주장하여 그들의 변화의 바람을 차단하고자 하는 이론적 노력의 산물이다. 과거 민족주의를 거부하던 태도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1989년에는 209페이지에 달하는 「우리민족제일주의론」이라는 단행본을 출판하기에 이르렀으며, 여기서 김정일은 “민족성을 이루는 기본 징표는 피줄, 언어, 지역의 공통성이며, 이 가운데서도 피줄과 언어의 공통성은 민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로 됩니다”라고 언급, 사실상 과거와는 다른 민족 개념을 강력히 제시하였다.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대변혁 속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권력 수호를 위해 사회주의를 폐기하고 민족주의를 들고 나올 만큼 절박한 위기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김정일의 ‘민족’ 개념을 해설한 리규린의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은 민족국가단위로 진행되며, 인민대중의 운명도 민족 및 국가적 범위에서 개척되여 나간다. 국경이 있고 민족의 구별이 있으며 사람들이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여 살아가는 한 인민대중의 운명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어선 안 되는 것은 북한이 의미하는 ‘민족’의 대상에 남한민족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북한은 조선민족이 피줄과 언어, 지역 측면에서 타민족과 구별된다고 강조하긴 했으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 차이점이 김일성과 주체사상, 그리고 북한식 사회주의제도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고영환의 「우리민족제일주의론」은 “우리민족제일주의의 원천력에서 근본핵을 이루는 것은 가장 위대한 수령과 지도자를 모신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이다. 경애하는 김일성 동지는 … 인민대중의 가장 위대한 수령, 참다운 인민의 수령이시다 … 경애하는 김일성 동지를 수령으로 모신 우리 민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영광을 지닌 존엄하고 행복하고 긍지 높은 민족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곧 ‘조선민족제일주의론’이 김일성 우상화 논리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 대남 ‘민족공조’론의 대두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민족’ 개념을 전략적·전술적으로 남한에 적극 적용하려는 의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91년 8월 1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책임일군들, 조국통일범민족련합 북측본부 성원들과 한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라는 제하의 담화에서 기존의 ‘민족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위’ 관점은 유지하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민족주의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예컨대 “우리 인민이 지난 기간 새조국건설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북과 남, 해외에 있는 각계각층의 모든 동포들이 단결하여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 하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글에서 김일성은 이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론적 세계관이나 대남관을 폐기한 것은 아니지만, 북한 나름대로 대남 공세적 차원에서 민족의 개념을 강하게 내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일성의 이 연설에 대한 해설서 「근로자」(1991.9)는 “북과 남, 해외의 각계각층은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 민족공동의 리익을 앞세우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근본원칙을 확고히 견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사상과 제도의 추월”이라는 명분하에 남한의 자유민주 체제를 직접 공격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김일성의 논리를 뒷받침하였다. 북한은 또한 1993년 4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여 남한에 대한 민족주의적 공세를 강화했으며, 단군유골의 출토 발표 등 이른 바 민족문화 복원 사업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채택된 ‘6·15 남북공동선언’을 ‘조국통일의 이정표’라고 규정하면서, ‘우리민족끼리’와 ‘민족공조’를 키-워드로 삼아 본격적인 대남 ‘민족’ 선전공세에 나섰다. 특히 북한은 2002년 제2차 한반도 핵위기가 발생하자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남북이 힘을 합쳐 미국에 대항해 나가자고 주장하며 ‘민족’ 논리를 ‘반외세’ 곧 ‘반미’와 ‘자주’ 논리에 접목시켜오고 있다. 이는 과거와 매우 구별되는 현상으로서 김대중 정부 하 ‘햇볕정책’이 추진된 이래 남한에서 팽배하고 있는 감정적 반미주의와 막연한 ‘민족우선’ 경향,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의 모호한 대북관을 적극 활용하려는 대남 전략 차원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 중심의 대남정책 논리는 ‘조국통일3대헌장’, ‘민족대단결’, ‘연방제통일’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핵개발과 관련, 북한은 “민족공조로 핵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과 남이 민족공조의 기치를 높이 들 것”과 “민족공조로 조(북)-미 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한 운동과 투쟁을 벌이는 것이 미국의 핵전쟁 위험을 막고 나라의 평화를 지키게 된다”고 주장했다.(노동신문, 2002.10)
2004년에 이르러 북한은 “우리민족제일주의의 기치 밑에 민족공조로 자주통일의 활로를 열어가자”는 슬로건 아래 13차 남북장관급회담(2004.2.3~2.6)에서 “우리민족끼리”를 공동보도문에 삽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후 거의 모든 남북 합의문에 “우리민족끼리” 문구가 포함돼 있는 상태다.
6. 결론 및 대응책
북한은 1945년 공산체제를 출범시킨 이래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기본적으로는 ‘민족주의’를 부정하되, 대남관계에서는 이를 전술적·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책을 구사해왔다.
특히 1950년대 후반 ‘주체사상’의 등장과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변혁기에 직면, ‘민족’ 논리를 한층 강화해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민족’ 개념은 비록 초기의 ‘사회주의에의 절대적 복종’이라는 기본 구도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남한 국민이 갖고 있는 ‘민족’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북한에서는 민족주의 강조의 근거를 “위대한 수령의 영도력”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민족주의’이며, 김일성·김정일 우상화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려되는 것은 1990년대 이후와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강화되고 있는 ‘민족’을 앞세운 북한의 대남 선전공세이다. 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래 한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반미(反美), 반(反)외세, 반전(反戰)평화 정서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우리는 북한의 ‘민족’ 개념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 허구성을 국민들에게 홍보·계도하는 작업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사상적 혼란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바, 최근 우리 사회에 ‘중도(中道)’ ‘상생(相生)’ ‘좌우(左右) 초월’ 같은 구호가 만연하여 국민들의 가치관 혼란과 판단력 마비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신간회 운동’ 기념행사 등도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경계를 요한다고 하겠다.
또한 한국 사회 내에 ‘민족주의’의 개념과 성격, 그리고 한계에 관한 분명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영삼 정부 출범 때만 해도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민족주의가 강조되었던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는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이며, 이 자유체제 이념이야말로 ‘민족’을 뛰어넘는 보편적 명제임을 다시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konas)
홍관희(안보전략연구소장, 재향군인회 안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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