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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19년의 의의와 평가-①

'덩샤오핑 구상'을 중심으로
Written by. 박승준   입력 : 2011-08-28 오전 6: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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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사단법인 코리아정책연구원(원장 유호열)와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이사장 박진근)가 24일 주최한 '한반도와 중국 : 비전과 과제' 국제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박승준(인천대) 교수의 발제문임.

Ⅰ.서론

 1992년에 이뤄진 한중수교는 내년으로 20주년을 맞는다. 수교 이후 19년이 흐른 현재 수교 당시 한국과 중국의 최고 정치지도자였던 노태우 대통령과 덩샤오핑(鄧小平)의 한중수교를 둘러싼 전략적 구상과 판단, 수교 교섭 실무를 지휘했던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의 실무 판단과 교섭과정 등에 관한 회고록과 기록들이 출판되어 수교 과정과 그 이후 양국 외교관계의 진전 등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기록들에 따르면, 한중수교는 1992년 당시 중국 최고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의 구상과 경제발전을 우선 목표로 하는 한국과의 수교 전략이 1985년부터 준비돼 외교 실무 첸치천에게 전달됐으며, 한국 측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1987년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북방정책, 또는 북방외교라는 전략 구상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일단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관련 기록들은 한중수교의 추진 선택권이 한국보다는 중국 측에 있었으며, 중국 측 덩샤오핑 구상을 첸치천 외교부장을 비롯한 중국 정부 당국자들이 현실 정책으로 채택해서 추진함으로써 교섭과정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1992년 이후 19년이 흐르는 동안 한중수교는 한국과 중국에 어떤 득실을 가져다 주었으며, 어떤 의의를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는지에 대한 1차적인 평가를 내려 보는 것이 이 소논문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한중수교 교섭과정과 수교가 남긴 양국 관계와 양국의 정치 경제 외교적 의의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평가를 내리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 평가를 위한 예비 평가에 해당하는 평가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Ⅱ. 한중수교와 덩샤오핑 구상

1. 한중수교의 국제정치적 배경

 한중수교가 이뤄진 1992년 8월은 잘 알려진 것처럼, 냉전(Cold War) 종식 직후의 시기였으며, 동아시아 국가 간 관계에서도 경제적인 상호의존성이 이데올로기적인 개념 규정보다 더 중요한 흐름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이데올로기가 국제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에 북한 일변도의 한반도 정책을 구사했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다음해인 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시대가 1976년에 종결되고, 경제발전을 최우선의 국가목표로 내세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시대가 1978년 중국에서 시작되면서 중국의 외교 전략은 실용적인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개혁개방의 시대가 10여년 계속된 중국은 개혁개방의 필수적 부산물인 사상적 혼란에 따라 빚어진 1989년의 천안문 사태의 결과 미국과 일본,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정치, 외교, 경제적 제재에 직면하게 됐다. 그런 국제정치·경제적 환경에서 중국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이 선택한 것은 당시 대표적인 신흥공업국(NIES)이었던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이에 앞서 덩샤오핑의 전임자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1971년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의 베이징 비밀 방문을 통해 미국과 중국 간의 화해(Rapprochement)라는 국제정치적 구조의 대변혁을 조성해서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하는 양극체제(Bipolar System)의 붕괴를 가져오는 변화의 출발점을 만들어 놓았다. 한중수교는 그런 국제정치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 아래서 한국과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양국 접근이라는 정책적 선택을 함으로써 이뤄진 것으로 평가된다.

2. 덩샤오핑 구상과 한국의 북방정책
 1) 덩샤오핑 구상
 1992년 8월24일에 이루어진 한중수교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당시중국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의 구상이 서로 어우러져 성사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교 당시 한국 외무장관 이상옥과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錢其琛)이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출판한 회고록 『전환기의 한국외교』와 『외교십기(外交十記)』를 통해 밝혀놓았다.

 이상옥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1984년과 1985년 남북한과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등 4강간의 이원(二元)적 교차 수교 구상, 즉 1단계로 먼저 남북한과 중국, 일본 간의 교차 수교를 추진하고, 2단계로 남북한과 소련, 미국 간의 교차 수교를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그 당시 북한의 반대가 예상되고 중국이 수락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여 수교에 앞서 중간 단계로서 남북한과 중국, 일본 간의 무역대표부를 교차 개설하는 방안에 관해 중국 측에 타진하였으나 중국 측의 냉담한 반응으로 구체화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상옥의 회고와는 달리 중국 측은 1985년에 이미 한국과의 수교를 향한 지도부의 의사 결정이 진행되고 있던 과정이었다는 점을 첸치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기록해놓았다.  『외교십기』에 따르면, 중국 국내에서는 1978년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계기로 경제건설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그런 상황 아래서 대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서 국제 교류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대하고 현대화 건설에 양호한 외부 환경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외교 담당자들에게 부여된 절박한 과제였으며, 그런 배경아래서 조선반도의 정세를 완화시키고 남북 간의 회담을 촉진하기 위해 중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보다 가까이 한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국제기구가 한국에 위탁해서 개최하는 행사에 중국이 그 국제기구의 회원일 경우 참가할 수 있도록 하고, 마찬가지로 중국이 주관하는 국제기구의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중국방문을 신청할 경우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 방침에 따라 1986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에 중국의 참가가 이뤄졌고, 1990년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에 한국 대표단의 참가가 가능해졌다. 첸치천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런 과정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의 구상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첸치천은『외교십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은 덩샤오핑 동지였다. 1985년 4월 덩샤오핑 동지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 “중한 관계의 발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며, 첫째 우리 중국이 한국과 교역을 해서 경제적으로 이점이 있을 것이고, 다음으로는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1988년 5월에서 8월에 이르는 기간에 덩샤오핑 동지는 외빈을 접견하면서 여러 차례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이익만 있고 해로울 것은 없으며, 경제적으로는 쌍방에 유리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시기가 성숙했다. 한국과 경제, 문화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발걸음을 원래 생각보다 더 빨리, 더 넓게 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민간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한 전략적 행동으로, 대만문제, 대미관계, 대일관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대동남아 관계, 모두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일이다. 이와 함께 덩샤오핑 동지는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미묘한 문제이므로, 신중히처리해야 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양해를 얻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첸치천이 『외교십기』에 기록한 한중수교에 관한 덩샤오핑의 구상을 정리하면, 한중수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유리한 점을 중국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는 계산이 바탕에 깔린 전략적 판단이었다.

 첫째, 한중수교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둘째, 한중수교는 한국과 대만의 외교관계의 단절을 가져와 대만을 고립시켜 중국의 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셋째, 한중수교는 미국과 일본에게 대중 접근 책을 채택하는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넷째, 한중수교로 동남아 국가들을 정치경제적으로 유인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다섯째, 한중수교로 중국의 북한 일변도 외교에서 탈피해서 북한을 견제하는 효과를 낼 것이며, 남북한에 대한 등거리 외교로 중국의 경제발전에 필요한 한반도의 평화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북방정책
1992년 8월24일의 한중수교는 중국 측에서는 덩샤오핑 구상에 의해 추진됐지만, 한국 측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 또는 ‘북방외교’전략에 의해 추진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2011년 8월8일 출판한 ‘노태우 회고록’에서 한중수교의 한국 측 전략의 바탕이 된 북방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남북한 대치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나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썼던 ‘원교근공(遠交近攻)’전략을 떠올렸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구사했던 이 전략은 ‘멀리 있는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힘을 얻은 뒤에 가까이있는 적을 공격해서 때려 부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전략을 남북관계에 원용(援用)해야겠다고 작정했다. 북한이 문을 열지 않으므로 저 먼 데로 돌아가자고 판단한 것이다. ‘차로 비동맹국, 그 다음에는 북한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 즉 소련과 중국, 동구권까지 친해지자’고 작정했다. 평양으로 가는 길을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통해 모색하기로 한 것이었다.

 노태우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방정책, 또는 북방외교의 기본 구상이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6·23 선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6·23 선언은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는 한, 이념과 체계를 달리하는 공산국가들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노태우는 남북한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북방정책을 3단계로 나눠 추진한다는 구상을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세워두고 있었으며, 제1단계는 여건을 조성하는 단계로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를 상정하고 추진하는 단계이고, 제2단계는 남북한 통일로,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기본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이 그 성과물이었으며, 제3단계는 한국인들의 생활권과 문화권을 연변, 연해주 등으로 까지 확대해 나간다는 구상이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는 영종도 국제공항의 건설과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의 건설이 제3단계 목표의 달성을 위해 추진된 것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한중수교 실무를 지휘했던 이상옥 외무장관도 한중수교가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 정책에 따라 추진된 것임을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해놓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상옥은 1992년 1월20일 청와대에서 주요 외교 업무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역점외교 시책의 하나로서 ‘북방외교의 마무리와 내실화’가운데 ‘한중수교의 조기 실현’에 대해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잘 진전될 경우 북방외교의 마지막 목표인 대중국 수교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대중국 국교 수립은 의연하고 착실하게 추진해나가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상옥 장관은 1992년 4월 베이징에서 ESCAP 총회가 개최될 때에 열리게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양국 간 국교수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3) 한중 수교 교섭 과정의 제(諸)문제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를 위한 예비회담은 1992년 5월 14~15일(서울)과 6월 2~3일(베이징), 6월 20~21일(서울) 세 차례 개최됐고, 본회담은 7월 29일 베이징 조어대에서 개최됐다.10) 한국 측 예비회담 대표단은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수석대표), 변종규 청와대 국제안보비서관, 한영택 외교안보연구원 수석연구관, 김하중 주베이징 무역대표부 참사관, 신정승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 이영백 외무부 동북아2과 사무관(통역) 등 6명이었고, 중국 측 예비회담 대표단은 장루이제(張瑞杰) 외교부 대사(수석대표), 리빈(李濱) 외교부 아주국 한국과장, 탄징(譚靜) 1등서기관, 딩즈좡(丁志壯) 타이완판공실 부처장, 싱하이밍(邢海明) 한국과 직원(통역) 등 5명이었다.

 예비회담과 본회담에서 주로 논의된 의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의 중국’과 ‘두 개의 한국(Two Koreas)’문제
둘째, 한반도의 비핵화
셋째, 중국의 한국전 참전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
넷째, 중조우호협력 조약 문제
넷째, 양국 대사관 부지

 수교 당시 한국 외무장관이었던 이상옥의 회고록에 따르면, 수교 교섭과정에서 중국 측은 한국이 ‘하나의 중국’원칙을 받아들일 것과 한국과 대만간의 공식 외교관계는 단절하되 중국과 북한간의 공식 외교관계는 유지하는 ‘두 개의 한국' 정책을 견지하는 것을 한국정부가 받아들이는 것을 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대해 한국 측 예비회담 수석대표였던 권병현은 중국 측이 '하나의 중국'과 '두 개의 한국'을 관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고 그의 비망록에 기록했다.

 굳은 표정의 장루이제 대사는 초보적인 중국 측 입장이라고 전제, 중국의 대만문제와 조선의 통일문제는 성질이 같지 않다고 주장했다. 만약 한국 측이 수교 담판(회담)에서 대만문제에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담판의 기초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측 주장에 따르면, 조선 문제는 어디까지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의 산물이다. 그 결과로 남북한이 각기 나라를 창건했다. 1991년 9월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남북한이 각각 유엔으로부터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 100개 이상에 달하는데 이는 국제무대에서 남북한이 모두 상대방을 승인하고 남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나라는 어느 한 쪽과 공식관계를 철폐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지 않음을 의미한다. 대만문제는 중국해방 전쟁시기의 남은 문제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이미 소멸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을 대표함과 동시에 유일한 합법정부다. 따라서 대만은 떼어놓을 수 없는 중국의 일부분이며 중국은 세계 150여개 국가와 ‘중국은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전제조건을 바탕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따라서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대만과 먼저 단교하고 대만과 체결한 조약은 철폐하며 대사관은 철수해야 한다. 이 문제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

 중국 측 주장의 요지는 이미 중국은 ‘하나의 중국’원칙 아래 150개국과 수교를 했고, 남북한은 분단 상태에서 ‘두 개의 한국’으로 각각 100개국과 동시수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하나의 중국’과 ‘하나의 한국’또는 ‘두 개의 중국’과 ‘두 개의 한국’을 중국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적절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92년 8월24일 발표된 양국 수교 공동성명의 제3항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라고 밝힘으로써, 한국은 전통적으로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로 공식 외교관계를 맺어오던 대만과는 단교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반면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 교섭을 앞두고 1991년 9월18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을 동시 가입하도록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남북한과 동시에 공식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선택을 했다.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한 지도부를 설득해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외교적 조정 작업을 추진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수교 교섭 당시 한국 외무장관이었던 이상옥은 한국이 ‘하나의 중국’과 ‘두 개의 코리아’를 받아들이는 대신,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한국 측의 요구에 따라 공동성명에 포함시키는 데 합의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러나 중국은 1961년 7월 수상 김일성과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이에 체결된 ‘중조 우호협력 조약’에서 “조선의 통일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기초위에서 실현되어야 하며, 이 같은 해결이 조선인민들의 민족적 이익과 극동의 평화 유지에 부합된다”고 이미 밝힌 바 있으며, 1975년 4월 김일성이 북한의 당정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발표된 중국과 북한 양측 정부 간 공동성명에도 유사한 구절이 포함돼있어, 한중수교 과정에서 한국이 ‘하나의 중국’과 ‘두 개의 코리아’를 받아들이는 대신, 중국정부가 “한반도 통일을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구절을 삽입했다는 이상옥의 주장은 전후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교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권병현도 “바로 이공동성명의 한반도 통일조항이 이후 중국의 공식입장으로 정립되어 사실상 또는 대외적으로 천명되고 있으며, 중국의 한반도 통일지지 조항을 수교공동성명에 포함시킨 것은 가장 큰 성과로 평가 받고 싶다”고 수교 비망록에 기록했으나 이 역시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데서 빚어진 결과인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측이 1992년 6월2~3일에 열린 제2차 예비회담 때부터 “중국의 참전으로 한국 국민들이 입은 큰 피해와 희생을 감안하여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다시는 그러한 불행한 일이 없도록 한다는 뜻에서 중국 측의 적절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중국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공동성명에 포함시키지 못하고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여 각자의 예비회담 기록에만 남기기로 하였다.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도 “남북한 어느 쪽도 핵무기를 보유하는데 반대한다”는 남북한에 대한 균형적 입장을 취하는 선에서 한국 측의 동의를 받아냈으며, 중조 우호협력조약에 관해서는 “조약은 그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체결된 것이며, 한중 양국관계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고 있다”는 말로 논의를 회피했다고 이상옥은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수교 교섭 과정에서 중국 측이 논의를 회피하는데 성공한 중조우호협력조약은 2010년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조성된 한미와 북중의 대치 국면에서 그 가치가 입증됐으며, 북한과 중국은 지난 7월 이조약 체결 50주년 기념식을 평양과 베이징에서 진행함으로써 내외에 그 가치를 과시했다.

 수교 이후 서울과 베이징에 둘 양국 대사관 부지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수교 대표들은 대등한 교섭을 하지 못하고, 서울 명동의 대만 대사관 부지와 건물은 ‘하나의 중국’원칙에 따라 무상으로 넘겨받고, 대신 베이징의 한국 대사관 부지는 중국측이 ‘호의적인 조건’으로 한국 측이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이와 관련 권병현은 “또 대한제국 때부터 베이징에 있던 우리의 재산에 관한 보다 정확한 조사를 못한 점도 후회하고 있다”고 비망록에 밝혀 수교 회담에 임하기 전 관련 조사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점을 밝혔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수교 19년 만에 돌아본 1992년 당시의 한중 수교협상은 당시 중국 측이 덩샤오핑 구상에 따라 수교 협상에 임했고, 당시 수교 이후 중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던 입장에 있던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므로 비교우위에 있으면서도 유리한 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외교 원칙이나, 과거사 문제, 실리적 입장 등 모든 면에서 불리한 결과를 얻어낸 불공정 협상을 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konas)

박승준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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