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의 열병
필자는 지난 5월 22일부터 1박 2일간 보병 제 39사단의 역대 사단장 초청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초청에 응한 전임 사단장들은 7명이었으며 17대 사단장을 지낸 필자가 제일 선임이었다.
5월 22일 KTX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 창원역에 도착하여 사단 사령부에서 사단 간부들의 영접을 받고 일반 현황 브리핑을 들은 뒤 부대를 열병하였다.
33년 전인 1981년 1월 취임식을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다시 열병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취임식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소식은 대부분이 부정적인 내용인데 비해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주민, 지자체의 활동, 장병의 활약상은 의욕과 활기에 넘쳤다.
선두 열병차량 운전병 뒤에 선 필자
창원, 마산, 진해가 통합되면서 교통체제의 개선을 비롯하여 시설의 신축과 증개축이 너무나 활발하여 옛 자취를 찾기가 어려웠다. 사단 사령부 지역의 환경 정비도 몰라보게 잘 되어 있었고 장병들의 복장과 태도는 늠름하면서도 밝고 온화하며 예의발랐다.
필자가 근무할 당시에는 사단 사령부가 창원시의 변두리 지역이었는데, 세 도시가 통합된 종합개발계획에서 세 도시의 중심부가 되었다. 그로 인해 사단 사령부가 서쪽 30km 지역 함안으로 이동하게 되어 그곳까지 둘러볼 수 있었고, 2015년 6월 완공 목표로 공사 진척은 5% 정도였다.
사려 깊은 사단장은 사령부가 이전되기 전, 현재의 사령부에서 근무했던 역대 사단장들을 초청한 것이었다. 지역 행정 기관과의 협조, 주민과의 관계, 해·공군 부대와의 유대가 한 가족 같은 느낌을 주었다. 30여 년의 세월 속에 이처럼 놀라운 발전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면서 감사와 자신감이 가슴 속에 밀려옴을 느꼈다. ‘지난날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발전의 조그만 씨앗이 되었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큰 삶의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장재완 사단장 이하 사단 전 장병에게 충심으로 감사와 격려를 보낸다.
후배와의 대화
함안 새 사령부 공사 지역을 둘러보고 귀대한 후 사단 주요 지휘관 및 간부들과 만찬을 함께 하였다. 정성이 담긴 식사를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어 흉금을 털어놓는 대화가 이루어졌다.
한 중령이 필자를 보고 물었다.
“사단장님이 부임할 당시 몇 세였습니까?”
“46세였습니다.”
“제가 지금 46세인데 지금 우리 군의 승진은 너무 정체된 것 아닙니까?”
이 질문을 받고 필자는 정신이 번쩍 났다.
필자는 차분한 설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정체인가? 정상화로의 과정인가?
나는 군의 장교들이 빨리 승진한 뒤 빨리 전역하여 국가의 타 분야로 조직적으로 진출해 나가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적 능력이 요구되어 발탁되어 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겠지요. 나의 경우, 육대 총장직을 끝으로 전역할 당시 만 50세 8개월이었습니다. 전역 후 한국공항공단 이사장 약 5년, 대학교수 생활 10년을 지낸 뒤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군의 간부는 장교생활이 평생 직업이 되고, 전역 후 제2의 직업은 개인적으로 준비하여 추구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군의 고위간부는 많은 경험과 경륜을 쌓고 깊은 사색과 성찰을 통해 노련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나는 내 경험으로 설명하겠습니다.
1979년 4월, 나는 2군 작전처장으로 보직되었습니다. 10.26, 12.12가 지난 뒤 1980년 5.18을 맞았습니다. 현지에서 초기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되자 5월말 전역예정이던 소준열 장군이 호남지역 계엄 분소장이 되어 5월 22일 부임하였습니다.
시위 군중에 의해 시가 점령당한 상태에서 시위를 진압할 임무를 띤 소 장군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전교사 참모들 가족이 모두 시내에 있고, 참모들 고향이 대부분 이곳이니 작전계획을 참모들과 함께 수립할 수가 없다. 김 장군은 군 참모지만 나를 도와주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가요?”하고 물었더니 “계획은 내가 직접 세울 테니, 김 장군은 총장 결재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나는 세 차례 소 장군이 작성한 계획을 육군 총장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리곤 혹독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꾸지람의 요지는 “시민들은 격앙되어 있고, 계엄군은 격분한 상태에서 시내에 진입하여 충돌하게 되면 그 손실이 얼마나 될지 예상이나 해 보았는가? 흥분한 시민들이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해 기진맥진할 때쯤 진입해야 희생이 감소될 것 아니냐(공명심으로 서두를 문제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5월 25일 진입에 대한 기본계획 승인을 하시면서도 “꼭 이날 실시하라는 결재가 아님. 현지 지휘관이 상황에 따라 더 순연할 수 있음”이라는 소견을 첨부하셨습니다. 계엄군은 5월 26일 육본 명령을 수령하고 5월 27일 진입하였던 것입니다.
그분 아닌 더 젊은 혈기왕성한 총장이 5월 23일이나 24일쯤 결재했더라면, 희생자 수가 몇 갑절이 되었으리라는 것이 지금까지 일관된 나의 판단입니다.
이희성 총장이 1923년생이니, 당시 57세였고(당시로서는 연세가 많은 장군이셨다) 현재 91세입니다. 나는 33년 전인 당시를 회상하며 현재의 장교 승진이 정체가 아니라 정상화로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희성 장군같이 원숙한 분이 당시 총장이었기에 5.18의 희생이 그만큼 적을 수 있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승진이 느리고 정체된 것 같은 시기에 유사시에 꾸준히 대비했던 장교가 국가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던가를 마샬과 아이젠하워 두 원수를 통해 소개코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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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마샬(1880~1959)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890~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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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 소위임관(21세) 1917 : 대위(37세) 1927~1932 : 중령(보병학교 부교장, 52세) 1936 : 준장(56세) 1938 : 참모차장(준장) 1939 : 대장(소장, 중장거치지 않고, 59세) 1944 : 원수(64세, 종신현역) 1939~1945 : 육군참모총장 |
1915 : 소위임관(25세) 1939 : 중령(49세) 1941 : 준장(51세) 1943 : 대장(소장, 준장거치지 않고, 53세) 1944 : 원수(54세)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마샬은 준장, 아이젠하워는 중령으로 군 생활을 마감하였을 것이다.
꾸준히 준비하고 대비했음에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회가 오지 않았더라도 준비하며 산 생애가 훨씬 알찬 인생이 될 것이다. (konas) 출처:월간자유
김 준 봉(예,육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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