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칼럼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인쇄

“국가 정통성 확보와 생존의 최우선 과제”

대한민국 건국 承認外交의 幕前幕後
Written by. 허동현   입력 : 2013-10-13 오전 7:16:25
공유:
소셜댓글 : 0
facebook

 국민국가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민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거의 결과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파리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을 얻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았다.

 이는 한 세기 전 서구 열강이 대한제국(1897∼1910)을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점과, 일제 패망이 다가올 무렵 중경의 임시정부와 이승만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전개한 임정 승인외교가 실패한 사실, 그리고 미국 등 연합국 측의 신탁통치 실시 계획 등에 비추어 볼 때 기적과도 같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을 지고의 가치로 하는 통일지상주의사관을 견지하는 한국사학계는 종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선언을 근거로 분단 고착화의 주된 책임을 대한민국 건국세력에게 물었기에 대한민국의 승인을 위한 건국 외교활동도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촉발한 암울한 역사의 개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왔다.

  국제사적 시각에서 본 대한민국의 건국

 소련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당한 김구의 남북협상

 최근의 국제사적 시각에 입각한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 분단이 고정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였으며, 남북 분단에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사건은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벌어진 중국의 내전(civil war)이었다.

 종래 런던 외상회의는 한국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지만,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됨으로써 한반도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전후의 일본 통치에 참여와 지중해 진출을 위한 아프리카 대륙북단에 위치한 항구도시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할양(割讓)을 요구했지만, 이것이 미국과 영국에 의해 일축되자 동북아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중단하고 대결관계로 전환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외상회담 중인 9월 20일 북한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10월에는 국민당과 연합하라는 종래의 입장을 바꿔 30만 명의 팔로군에게 만주 점령을 지령해 1946년 4월 국공내전을 촉발하였다. 특히 1946년 5월 팔로군이 파죽지세로 국민당 군에 밀리자 스탈린은 점령지 북한지역을 후방기지로 팔로군에게 제공함으로써 북한은 국민당 군이 범할 수 없는 성소(聖所, sanctuary)와 같은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했던 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조언을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이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수정주의(修正主義)적 입장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정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 하다고 본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이승만과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방이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45년8월부터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중국사태의 추이를 보며 소련과의 교섭을 계속 하며 현상을 유지하려 한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국민당이 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색이 짙어진 1947년 4월 미국은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즉 미국은 단정 수립의 짐을 유엔에 떠넘긴 것이었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었으며, 그해 12월 미국방문 시에도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소련과의 협약을 지킨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단정 수립을 결정한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정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거나 본국정부가 좌우 연립정권이었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을 백지화하려 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
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고 이것이 한국임시위원단 대표들에게 영향을 미쳐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하였다. 5월 10일 총선에 의해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에 의해 제정된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주도로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닦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정 수립 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 진 상황에서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되었다. 당시 고립무원의 섬과 같았던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을 서두른 이유는 권력욕 아니라 남한에서라도 40여 년간 독립운동을 이끌며 꿈꿔 온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워 국제적 지지를 통해 지키려 한데 있었다.

  유엔 승인 획득을 위한 건국 외교 활동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9월 9일 북한정부가 공식적으로 들어섬으로써 국제적 승인의 획득 여하가 정통성 확보와 국가 생존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신생(新生) 대한민국은 심각한 안보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1948년 말까지 미군을 철군할 것이라는 공식발표가 나와 있는 상태에서 북한은 무력통일로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소련의 지원 하에 급속하게 무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를 경시하는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건국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4일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수석대표 장면이 9월 6일 발급받은 제1호 대한민국외교관여권이 대한제국 시대의 여권을 참조해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이 웅변하듯이, 대표단(수석대표 장면, 차석대표 장기영, 정치고문 조병옥, 법률고문 전규홍, 경제고문 김우평, 고문 정일형·김활란·모윤숙) 모두 전문적으로 훈련된 외교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직업외교관들을 상대로 국가의 사활이 걸린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교섭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둘째,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던 우리 대표단은 초청안 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유엔 총회 개회 하루 전인 9월 20일에야 총회장소인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이 있는 파리에 도착한 대표단이 대한민국 승인의 당위성을 회원국 대표들에게 설득할 수 있던 기간이 3개월도 못될 만큼 짧았던 것도 걸림돌이었다.

 셋째,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장애로 작용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 제주도에서의 무장봉기가 10월초 다시 불붙고, 이의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주둔 14연대가 10월 20일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에 앞서 10월 13일 국회에서는 외군 철퇴 안이 동의되고 11월 3일에는 김구가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요지의 담화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발송할 만큼 정정(政情)이 극히 혼란스러웠다.

 넷째, 대한민국 승인 안건이 소련 대표 비신스키(Andrei Vysinsky)를 비롯한 공산진영의 고의적인 지연작전으로 그 상정이 지연되다가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5일 전인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호주와 인도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12월 6일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대표 초청 동의안이 가결됨으로써 7일 수석대표 장면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호소하는 영어연설을 할 수 있었다. 8일에는 한국 독립승인안의 총회 상정이 찬반 41대6, 기권 2표로 통과되었으며, 12일 총회에서 한국독립안은 찬반 48대 6, 기권 1표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대한민국 승인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1947년 장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Patrick J. Byrne) 주교를 특사로 한국에 파견하였으며, 이는 국제 관례상 교황청이 한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되어 한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과정에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소개받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장면은 유엔 호주대표부 대사로서 미소공위 결렬 후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반대해 온 당시 유엔총회 의장인 호주대표 에밧트(H. V. Evatt)를 설득해 한국승인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지원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복선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전적으로 장면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대표단 성원들의 헌신적 노력이다. “우리대표단은 국운의 장래를 짊어지고 사불성생불환(事不成生不還, 일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의 철석같은 결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섣불리 모책을 롱(弄)하지 않고 오로지 표리일관한 성심성의의 피력으로 유엔 당국 각국대표를 역방하며 아국의 실정을 인식시켜 우호적 찬수(贊手) 투표를 호소할 뿐이었다.”는 장면의 회고가 잘 말해 주듯이, 대표단은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셋째, 미국의 지원이다.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대한민국이 승인을 획득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로 막전과 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이와 같이 수석대표 장면이 거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자들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전략과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다. 특히 미국과 바티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인도와 아랍진영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은 대표단이 자력으로 일구어 낸 공적이었다.

  맺음 말

 본고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을 미·소 양국의 동아시아정책의 추이와 연관해 살펴보고 유엔에서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의 면면을 조명해 보았다.

 첫째,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남북분단은 민족내부의 분열 때문이 아니라 1945년 9월 런던 외상회의에서 소련의 북해도 분할점령 요구가 거부된 직후 스탈린이 북한에 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벌어진 중국의 내전(civil war)에서 소련이 북한을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함으로써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으며, 소련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당한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둘째,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남북분단을 주도했고 이승만은 정권욕 때문에 단정 수립에 앞장섰다고 본 수정주의적 해석을 비판했다. 또한 이승만이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통한 해결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 낸 주도자였으며, 그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서두른 까닭은 남한에서라도 40여 년간 독립운동을 이끌며 꿈꿔 온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워 국제적 지지를 통해 지키려 했던 데 있었음도 밝혔다.

 셋째,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해 파견된 장면을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이 공산진영의 저지공작을 뚫고 48대 6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한 이면에는 미국과 바티칸의 지원을 이끌어 낸 이승만의 전략과 장면과 조병옥 등 대표단의 헌신적 외교활동이있었다.

 넷째, 1948년 12월 12일 건국 4개월 만에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은 것은 한 세기 전 국제사회에서 국민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대한제국과 1919년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정부로 승인받지 못한 임시정부, 그리고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획기적 사건이었다.(konas) 출처:월간충호

허동현(경희대 교수/한국현대사 연구원장)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2026.9.26 토요일
안보칼럼 더보기
[안보칼럼] 북한의 드론 전력 위협에 대비한  민·관·군 입체적 대응 방안
한반도 안보 지형의 지각변동최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첨단 ..
포토뉴스 더보기
핫클릭 뉴스
깜짝뉴스 더보기
6·25 호국영웅 故한길진 하사 유해 신원 확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호국영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