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사〕735(734)고지 공방전과 전우가 남긴 한마디
본 내용은 6·25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중부전선 735(734)고지 공방전에 참여했던 당시 윤영목 포병소위(現 美 오레곤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의 수기 임.
윤 회장은 1950년 12월 육군포병 소위로 임관, 1956년 9월 소령으로 예편 했다. 57년 9월에 도미해 Colorado 농업연구소에서 30년간 근무 후 은퇴한 후에는 오레곤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으로 한·미동맹과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2월26일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표창을 수상했다.(편집자 주)
1950년 6·25전쟁 발발후 8월경 북한인민군은 대구-부산을 포함한 소위 ‘부산교두보’지역을 제외한 남한전역을 점령하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UN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일부 인민군 유격대원들은 대구 근교까지 침투해서 밤중에 대구시내에 박격포 교란사격을 가해오기까지 했다.
당시 부산으로 내려와 있던 한국정부는 인민군에 대적할 국군병력 증강을 위해 젊은 장정들의 소집령이 내려지고 나 자신도 그 당시 대구 경북여고에 주둔해있던 ‘제1포병단’에서 모집하는 포병간부후보생에 응시해 한달 후 동래에 있는 전시 육군장교양성소였던 육군종합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18세였다.
2개월간의 혹독한 보병기초훈련과 1개월의 포병훈련을 받고 1950년 12월23일 포병간부후보생 제5기 44명이 육군포병소위로 임관해, 그중 16명이 포병 제18대대로 보직발령을 받았다.
포병 제18대대는 UN군과 함께 북진, 평안도 덕천까지 진격했으나 그곳에서 중공군의 역습으로 막대한 인명과 장비손실을 입고 후퇴, 대구남방 진량초등학교에서 보충병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동기생 3명과 C포대로 발령 받아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경기도 양평에 위치해 있던 국군 제2사단 지원임무를 맡아 제2차 북진 대열에 참여하게 됐다. 원래 미군편제에는 보병1개사단에 155mm 곡사포1개대대 (18문)와 105mm 곡사포 3개대대 (18문식 총54문)가 있어야하나 당시 한국군에는 보병사단에 105mm 곡사포 1개대대라는 미약한 화력지원력이 전부였다.
735고지 공방전 개요
1950년 10월말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까지 점령 하였으나 아군의 반격으로 후퇴, 현재의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형성되고 그 후로는 대대적인 공방전대신 전선일대의 요충지 탈환을 위한 치열한 국부전이 계속되었다.
1951년 8월초에 국군 제2사단은 중부전선 적근산과 김화를 연결하는 산악지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사단좌측에 제31연대, 우측에 제17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17연대 정면에 위치한 735고지(일부 국군전사와 언론기사에는 734고지로 되어 있음)는 일명 ‘김일성고지’로도 불리웠고 피아간 상대방을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쌍방이 이 고지를 점령확보하기 위해 수차에 걸쳐 뺏고 빼았기는 공방전이 전개 되었다.
제2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8월3일에는 사단유격대대와 제17연대 제1대대로 하여금 735고지를 공격, 탈취하였으나 적의 역습으로 후퇴하는 등 수 차례에 걸친 탈환전이 되풀이 되었다. 1951년 8월8일 제17연대가 이 고지를 확보하자 사단 예비 연대였던 제32연대와 전선방위 임무를 교체하게 되었다.
제32연대는 제7중대를 735고지에 배치하고 그 후방 약 2km 지점에 735고지를 바라볼 수 있는 785고지정상에 제2대대OP(관측소 또는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제7중대장은 나와 육군종합학교 9기 동기생인 김영국 중위였고 그의 직속상관은 제2대대장인 朴동석소령이었다. 나는 제32연대의 관측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최전방 요충지 735고지에는 나의 후배관측장교인 李소위가 관측병, 통신병, 연락병 3명과 함께 제7중대장을 위한 관측 및 포병지원임무를 맡고 있었다. 나와 군 동기인 김영국 중위는 평소 친밀했던 관계로 수시로 나에게 포지원을 잘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중공군의 공격과 735고지 전투 (9월1일~ 9월3일)
1951년 9월, 제32연대 제7중대가 735고지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중 9월1일 밤 20:30시경부터 중공군 제80사단 제239연대가 대대적인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735고지에 배치된 포병관측장교 李소위는 즉시 나에게 긴박한 상황을 보고하고 동시에 포병지원사격을 요청해와 735고지 능선 넘어에서 공격해 오는 중공군에 고사계사격으로 저지선멸을 시도하였다. 동시에 적군상공에 조명탄을 계속 발사하여 아군의 적정관찰과 방어사격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군은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7중대 방어군의 6배가량 되는 2개대대 병력의 절대다수 인해전술로 물밀듯 중대경계초소와 소대방어선을 강타하며 735고지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왔다.
적이 아군 주진지에 접근함에 따라 포병의 화력지원은 아군 피해를 우려해 점점 어려워졌다. 7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포병관측장교 李소위와 나와의 유선망도 단절돼 무전기로만 교신했다. 나는 대대OP에서 보병대대장 朴소령과 긴밀한 보·포협동을 유지하면서 계속 포병대대본부에 전황을 보고하면서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얼마 후 735고지에 李소위와 함께 나가있던 관측병 都중사가 무전으로 “李소위님이 쓰러졌습니다. 적군이 중대OP 부근까지 접근해 왔으며 이 상황에서 도저히 포병 지원 임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일단 대대OP로 철수해야 되겠습니다.”라고 보고해 왔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조명탄 이외의 포격지원이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나는 이 상황을 즉시 포병대대본부에 보고하고 李소위의 철수를 통보하였다. 약 1시간 후인 23:30시경에 李소위가 관측병 등에 업힌 채 통신병, 연락병과 함께 내가 있는 대대OP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당시 李소위는 완전히 실신상태였으며 다행히 상처는 없기에 나의 야전천막속에 눕히고 안정을 되찾도록 하였다.
李소위의 전방관측반이 735고지에서 철수한 후 부터 포병지원임무는 전적으로 내가 맡게 되었고 보병대대 OP에서 대대장과 긴밀한 협조하에 모든 포병사격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9월2일 자정이 넘어서도 전투는 계속됐고 01:00시경에는 735고지 도처에서 백병전이 감행되었으며 적군은 제7중대 OP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김영국 중대장은 시시각각으로 대대장에게 중대의 위급상황을 보고하였으며 대대장은 수차에 걸쳐 중대장에게 “후퇴하지 말고 결사코 사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후 01:30시경에 김영국 중대장으로부터 “적이 735고지 중대OP까지 침투했고 중대 잔여병력이 분산되었으니 이제는 아군 피해를 염려 말고 735고지 정상에 포격을 가해 적군을 저지해 달라”는 최후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후 김영국 중대장과 그의 통신병 趙일병과의 통신은 두절되고 02:00시경에는 쌍방의 총포성이 완전히 멈췄다. 그 후에 닥쳐온 정적, 벌레소리하나 들리지 않은 야릇한 고요함과 말로 표현 못할 느낌은 지금도 나의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이로써 735고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일부잔여 7중대원은 고지 각처에 머물고 있었다.
제6중대의 735고지 탈환전
적이 735고지를 점령한 후 나는 적이 새병력을 투입해서 대대OP를 향해 계속 공격해 올 것이라는 생각도 했으나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제2사단에서는 735고지 재탈환작전을 계획하고 역습부대로 제32연대 제6중대를 선정해 다음날 9월2일 06:00시에 제6중대 병력을 735고지 산기슭에 배치하고 공격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때 대대OP에는 제2사단장 함병선 준장이 참모진과 미고문관을 대동하고 제6중대 탈환전을 지휘관찰 하기위해 와 있었다.
제6중대의 공격개시에 앞서 사전에 준비된 작전계획에 따라 미군 함제 전폭기의 735고지 폭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전폭기들을 위해 WP(백린)탄을 735고지 정상에 발사해서 목표확인을 도와주었고 전폭기 4대 편대가 계속 교대로 날아와 고지에 새로 구축한 적의 방어진을 강타했다. 약 30분간 계속된 폭격이 끝난 다음 제2사단을 지원하는 제18포병대대는 물론 인접 미9군단 예하의 8인치와 240mm 대형 장거리포까지 동원하여 나는 미고문관과 협조하여 포사격 관측과 조정임무를 수행하였다.
공중에서의 폭격과 지상에서의 집중포격으로 735고지는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 이로 인해 지도상의 735m고지가 1m낮아진 734m고지로 부르게 되고 후 일 일부 전사에는 734고지로 기록하게된 것으로 추측된다. 나와 포병간부 동기이며 제18포병대대에 A포대 관측장교로 제17연대를 지원했던 오두창 소장(예)의 ‘중부전선 734고지 전투의 회고’에도 735고지가 정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06:00시 포격이 멈추자 제6중대는 일제히 735고지를 향해서 공격을 개시했다. 중대가 고지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아군의 폭격과 포격을 피해 호속에 피신해 있던 생존 중공군이 일제히 밖으로 나타나 소총,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제6중대의 공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며 그 중간중간에 정밀포격지원으로 적의 반항을 약화시켰다. 제6중대는 약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735고지 부근에 산재해 있던 제7중대원들과 합세하여 10:00시경 드디어 735고지를 탈환하였다.
제6중대는 고지를 점령하자 그곳에서 사투하다 장렬히 전사한 김영국 중대장의 시신을 발견하여 곧 대대OP로 후송해 왔다. 나는 하루밤 사이에 이슬처럼 사라진 김영국 중대장의 시신을 보고 전쟁의 비극을 새삼 실감하는 동시에 평소에 나보고 포지원을 잘해 달라고 말버릇처럼 하던 그를 구해내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이 매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다음 조국방어를 위해 분투 산화한 故 김영국 중위의 명복을 빌면서 그를 떠나보냈다.
김영국 중위와 그가 지휘했던 제7중대원의 용맹성과 전공이 크게 인정 보도됨에 따라 이들에게 이승만대통령과 투르만 대통령의 표창장에 이어 UN군사령관과 미9군단장의 표창장이 연달아 수여 되었다. 김영국 중위 개인은 육군 대위로 일계급 특진과 동시 을지무공훈장과 美 은성무공훈장도 수여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Konas)
윤영목 (美 오레곤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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