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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②〕위대한 유산

Written by. 한경수   입력 : 2014-04-07 오후 12: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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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3년 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 ‘우수’ 글임. (편집자 주)

  봄기운이 완연했던 2012년 3월, 아무렇게나 자란 반 삭발 머리를 모자로 반쯤 가린 채 첫 출근을 하던 스물한살 소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어색하게 전입신고를 했던 앳된 아이. 공익근무를 처음 시작하던 때의 내 모습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소집해제를 몇 달 남겨두지 않은 말년 공익이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인생은 성장 그 자체이며, 성장은 곧 행복이라고. 하지만 너무나도 어렸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했던 그 소년이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은 순탄한 행복의 순간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내가 불과 2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 겪었던 시리고, 한편으로는 따뜻했던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난히 추웠던 올해 초 겨울의 일이다. 편안한 보직 탓에 어느새 만성이 되어버린 ‘지겨움’, 근무지 직원과의 불화, 그리고 매너리즘으로 굳어버린 내 생활 등의 이유로 인해 나의 짜증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의 주된 업무는 세무서를 방문한 민원인들이 가야할 부서를 안내하는 일이었는데, 그런 마음가짐으론 친절한 서비스가 나올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청 전화번호가 몇 번이에요?” 민원인이 물었다. “모르는데요” 짧고 굵게 대답했다. “아니 같은 관공선데 그것도 몰라요?” 거기서 꼬리를 내리고 마침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후 알려줄 수도 있었지만, 그럴 내가 아니었다. “여기는 114가 아니에요. 그리고 세무서는 국가기관이고, 시청은 지방자치 단체거든요? 엄연히 다르다고요 좀 알아보고 말하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 민원인은 소리를 지르며 노발대발 화를 냈고 복무담당자가 와서 내가 억지로 사과를 한 후에야 사태는 수습되었다.

 다음날 오전이었다. 어떤 할아버지가 2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매일같이 아침 일찍 오셔서 석유난로 옆에 하루 종일 멍하게 앉아있다가는 내가 퇴근할 때 쯤 돌아가시는 분이었다.

 마침 어제 나에게 크게 혼을 내셨던 복무담당 공무원분이 옆에 있던 터라 그 할아버지의 부축을 해 드리기로 했다. 행색도 초라하고 옆에 다가가면 이상한 냄새까지 났기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도 복무담당자가 볼 때 마다 이것저것 챙겨드렸다.

 그렇게 나의 ‘보여주기식 친절’이 계속되면서 할아버지와 나눈 얘기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워낙 말투가 어눌하셔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냥 “예, 예.” “아, 그러셨어요”같은 말들로 받아만 드려도 매우 즐겁게 말씀하셨다. 종종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말동무가 생긴 할아버지가 너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할아버지를 처음 도와드리고 약 2주가 지난 후 할아버지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학생, 점심 먹었어? 우리 집에 먹으러 올래?” 너무 갑자기 받은 초대라 어리둥절했지만, 그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그날 구내식당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도 있고, 그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할아버지의 집은 근무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장 변두리에 있는 낡은 판자집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해맑게 웃으시며 몇 장 남지도 않은 연탄을 꺼내 오시는 할아버지를 두고 갈 순 없었다.

 집의 내부는 외관보다 보잘 것 없었다. 볕이 잘 안 드는 까닭인지 방 안에서도 한기가 느껴졌고, 문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신문지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겨울마다 난로 옆으로 오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담요 한 장과 이불 몇 겹으로 겨울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날 점심 메뉴는 컵라면이었다. 반찬은 텅 빈 냉장고에 혼자 놓여 있었던 김치 하나. 김치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라면을 먹고 나니 어느새 연탄불의 훈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의 단칸방을 천천히 훑어봤다. “할아버지 이게 뭐에요?” 방 안에 걸려있는 메달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대통령이 준거야” 할아버지의 웃음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메달에는 ‘고엽제 전우회’라고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오셔야 했던 세월을 생각하니 뭔가 뭉클해졌다. 집 안의 낡은 TV 옆에는 오래된 선반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자개로 장식을 한 조그만 상자가 있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남녀가 다정하게 손을 잡은 모습을 찍은 낡은 흑백 사진 하나와 소박한 옥 반지 하나가 나왔다. 그런데 내가 상자를 만지는 것을 보자 “그거... 그거 함부로 만지면 안돼” 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넉살좋게 “옆에 여자분 부인되시는 분인가 봐요? 정말 고우시네요” 하니까, 어느새 누런 이빨을 보이며 웃으셨다. 내가 여태껏 봤던 웃음 중 가장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로부터 이틀정도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나에게 당직실에 있는 낡은 비품들을 쓰레기장으로 버리는 일이 맡겨졌다. 한쪽 문이 떨어진 캐비넷, 낡은 의자 등…‥. 그런데 그중에서 해묵은 접이식 침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추위에 떨면서 주무실 그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난로 옆에서 졸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함께 접이식 침대를 질질 끌며 집에다 가져다 드렸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아, 그리고 이거 좋은 거니까 몇 일씩 나눠서 드세요. 영양제에요” 그것은 엄마가 아침에 먹기 싫다던 나에게 억지로 주머니에 찔러 넣어준 비타민 한 묶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하시고 한참을 웃고만 계셨다. 그땐 멋쩍음과 이유모를 행복에 겨워 몰랐다. 그분의 웃음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그날 이후로 나는 놀라울 정도의 변화를 경험했다. 내가 베푼 친절은 결국 내 마음의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좀 더 활동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하니, 얼굴빛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직원들과 민원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횟수도 늘어갔다. 마침 추운 겨울이 지나간 화창한 봄 날씨처럼 기분 좋은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따뜻해진 날씨 때문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철물점에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문득 할아버지의 소식이 궁금해져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집 앞에 낯익은 침대를 비롯한 물건들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옆집의 슈퍼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전에 여기 사시던 할아버지 어디로 가셨어요?” “아, 그 아저씨? 지난주에 돌아가셨는데? 고엽제 후유증이라던가, 죽은 지 며칠 후에나 발견됐다지 뭐야? 가족들도 없는 모양이던데, 쯧쯧쯧...”

 순간 머리가 멍해짐을 느낀 채, 아무 말도 없이 몇 분을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근무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그란 자개상자를 들고. 그 안에는 할아버지의 소중한 가족사진, 반지, 그리고... 영양제가 들어있었다. 그날 오전의 시간은 참 이상하게 지나갔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데, 혼자만의 벽 안에 갇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쩌지? 늦게 와서 밥이 다 떨어졌는데,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근데 어디 아프니?” 식당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들자마자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면발이 퉁퉁 불 때 까지 울면서, 나는 그 라면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건 마치 나의 부족했던 관심에 대한 속죄이며, 그분을 기억하려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렇게 전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그날 저녁, 근무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조그만 하천에, 할아버지의 유품을 들고 갔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마도 죽기 전까지 그분에게 가장 소중했을 물건들을 냇물에 떠내려 보냈다. 상자는 붉은 노을 아래로 조금씩 조금씩 떠내려갔다.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질 때 쯤,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어떤 기도였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눈을 감고 느꼈던 그 따뜻한 느낌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6개월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또 그 기간만큼이나 가야할 부서를 안내해 드리고, 노인 분들의 말동무가 되어 드렸으며 전화번호를 알려 드렸다.

 이제는 더 이상 근무가 지겹지도, 짜증나지도 않는다. 사람들과 상대하는 모든 순간들 속에서 행복을 찾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내가 베푼 나의 비타민 같이 작은 친절들이 타인에게는 큰 의미가 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내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충실하게 시간을 보낸 후 퇴근길마다 지나는 그때 그 하천의 지는 해를 보며 생각하고, 또 다짐한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했는지, 타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내일은 어떠해야 할지를 말이다. 그분이 남겨주신 위대한 유산을 생각 하면서...

한경수 (평택세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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