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對南) 전술 : 무장봉기 전술
무장봉기 전술은 공산혁명 과정에서 피지배계급이 무기를 들고 궐기하여 지배계급의 무력에 항거해 정권을 顚覆(전복)하는 大衆(대중)행동으로 계급투쟁의 최종적 형태로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타도하기 위한 전술의 한 형태로 무장봉기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군사기술의 고도화로 피지배계급이 무장봉기와 같은 형태로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6.25전쟁 당시 빨치산과 베트남 전쟁의 게릴라전을 보면 인민무장에 의한 蜂起(봉기)의 실효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경우 1960년대 인민혁명당(인혁당)-통일혁명당(통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을 규합, 북한과의 연계 속에 결성했던 대표적인 무장봉기 조직이었다.
남민전 사건은 70년대를 대표적 公安사건으로 사건발생 당시 구자춘 내무부 장관은 1979년 10월9일 경찰이 북한의 공산화 통일혁명 건설을 꾀한 대규모 反국가단체를 적발, 총책 李XX 등 일당 20명을 10월4일 검거하고 나머지 54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74년 민청학련 배후조종자로 수배된 이재문은 1976년 2월 남한 체제 전복을 위해 학생, 교직자 등 74명을 포섭, 이른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를 조직하고 10대강령, 9대규약, 10대생활규범, 4대임무, 3대의무 등을 만들었다.
불온전단을 뿌리고 도시게릴라 방법에 의한 강도행위 등을 자행하면서 민중봉기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했던 남민전은 인혁당 재건위사건 관련 사형수 8명의 옷을 모아 물감을 들여 北韓旗(북한기)를 모방한 남민전 깃발을 제작하기도 했다.
경북대 법대를 나와 <민족일보> 기자로 근무했던 이XX은 민청학련사건 이전에는 인혁당 중앙상위 조직부책으로 정부 전복을 꾀한 혐의로 검거,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남민전은 이XX이 위원장인 중앙위원회 산하에 총무, 조직, 교양선전선동, 출판, 통일전선, 무력, 대외연락 및 정보, 재정 등 9개 부와 검열위원회와 서기 및 지역책을 두고 그 산하에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약칭 민투, 위원장 임헌영)라는 前衛(전위)조직을 설치, 청년-학생-농민-노동-연합-교양 등 6개 부와 지도요원 및 221대(특수행동대)를 편성했다.
남민전은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보냈으며, 조직원 상당수가 假名(가명)을 사용했다. 이들은 彗星隊(혜성대)라는 행동대를 조직한 뒤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땅벌작전’ 등의 암호를 사용하면서 기업인의 자택과 금은방에 침입, 3차례에 걸쳐 50여 만원의 금품을 털었다.
경찰은 1979년 10월16일 추가수사발표를 통해 이들이 反정부적인 일부 학생, 지식인, 근로자 등을 선동, 대규모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봉기한 민중과 남민전 무장전위대로 인민해방군을 조직, 전국 각지에서 국가전복투쟁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
남민전은 혁명시기가 성숙되면 김일성에게 북한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남한의 혁명세력과 북한구의 배합으로 투쟁을 강화, 공산민족혁명이 성취되면 모든 용공세력을 규합, 남북연합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 계획에 따라 당시 간첩죄로 기소중지중이었던 安XX이 이XX의 지령에 따라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신년메시지와 사업보고서를 휴대하고 일본을 통해 월북했다. 이 같은 남민전 활동의 최종목표는 베트남식 공산화 전략이었다.
참고로 노무현 정부 들어 발족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6년 3월 남민전 관련자 29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









![[안보칼럼] 북한의 드론 전력 위협에 대비한 민·관·군 입체적 대응 방안](/img_data/article/260923/260923_6300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