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 날에 즈음해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이날의 유래는 1900년 10월 25일에 반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칙령 속 울도군의 범위에 독도가 포함됐기 때문에 이날을 ‘독도의 날’로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칙령 제41호’를 검토해 보면 ‘독도’라는 명칭 자체는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울도군의 범위로 ‘울릉도, 죽도(울릉도에서 동쪽 2㎞ 거리에 있는 소도), 석도(石島)’가 명기돼 있을 뿐이다. 여기에 나오는 ‘석도’가 ‘독도’를 뜻하는 명칭이지만 일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아직 국제법적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만약 ‘칙령 제41호’ 속에 ‘독도’라는 명칭이나 독도의 역사적 명칭인 ‘우산도’가 기재돼 있었더라면 현재의 독도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0년의 대한제국 공문서에 독도가 한국 영토로 명기됐다면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섬으로 편입시켰다는 1905년보다 5년이나 이른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산도가 독도라는 증거는 조선의 관찬서에서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동국문헌비고’(1770), ‘만기요람’(1808) 등에는 ‘우산과 울릉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松島)’라고 적혀 있고 우산도가 송도(독도)임을 밝혔다. 일본이 원래 독도를 송도로 불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1876년 일본 외무성의 다나베 다이치 국장이 “송도(독도)란 원래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우산”이라고 진술해 한국 측 인식을 확인했다.
그런데 1882년 우산도라는 독도의 역사적 명칭이 없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고종실록’을 보면 고종이 울릉도를 조사시키기 위해 이규원을 파견하기로 했고 그 전에 이규원을 만났는데 이때 고종이 “울릉도란 세 섬이고 울릉도 자체와 송죽도(죽도), 그리고 우산도(독도)”라고 말했다. 이것이 ‘칙령 제41호’의 모형이 된 고종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에 이규원이 우산도란 옛날엔 울릉도를 뜻한 명칭이었다고 말해 고종이 그 말을 인정해 독도 명칭으로서의 우산도를 없애버렸다. 그런데 당시 울릉도로 새로 이주한 사람들이 대부분 전라도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독도를 “돌섬”으로 불렀다. 조선정부는 이 돌섬을 한자로 표기해 ‘석도’라고 했고 돌섬은 전라도 방언으로 독섬이 됐고 이어서 독도라는 명칭이 생겼다. 1904년에는 일본 군함이 항해일지에 ‘한인이 이 섬을 독도라고 쓴다’라고 사상 처음으로 독도 명칭을 기록했다.
그것이 1904년 9월 25일이었고 당시 일본은 독도의 옛 일본명인 송도를 잊어버리고 독도의 서양 명칭을 줄여서 ‘량코도’ 등으로 불렀다. 즉 일본엔 공식 독도 명칭이 없었다. 즉 일본은 1905년 전까지 독도의 옛 명칭을 잊어버려 독도를 영유하지 않는 상태였지만 한국은 1905년 이전에 독도라는 명칭을 확고히 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처럼 독도 명칭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 자체를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1882년의 고종이 말한 우산도는 돌섬이 되고 돌섬이 석도가 돼 ‘칙령 제41호’에 실렸고 최종적으로는 독도로 정착됐다. ‘독도의 날’에 이런 독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 출처 : 국방일보 10월24일 16면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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