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에서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로 거듭난 김준연(金俊淵)
≪돈암장 시절 어느날, 이승만 박사는 김준연에게 물었다. “낭산처럼 박학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공산주의 정당에 관계했는가?”
낭산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공산주의 운동도 민족운동이고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영국은 안전제일주의 노선으로 일본편을 들었고, 소련만이 철저하게 일본을 배척하고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국내 우파세력보다는 좌익세력이 더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 자체보다도 일제를 약체화시키고 몰아내려고 공산주의 운동을 한 것입니다. 이제 일제가 물러갔으므로 공산주의 운동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공산분자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테러, 납치, 방화, 강도, 살인, 폭파, 선동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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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이론과 현실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공산주의와 결별,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로 거듭난 낭산 김준연(金俊淵)의 삶이 조명됐다.
19일 오후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이승만포럼(건국이념보급회) 주최로 열린 ‘이승만포럼’에서 허도산 전사연구원 원장이 ‘김준연’을 ‘개화의 선각자’ ‘항일투사’ ‘이승만 대통령 다음인 대한민국 건국의 2인자’ ‘국내최초의 세계 법학자’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평가 했다.
김준연 선생은 1895년 3월14일 전라남도 영암군 출생으로 영암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6세에 경기고의 전신인 서울 한성(漢城)학교에 수석입학 했다.
1914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까야마(剛山) 제6고등학교와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해 독법(獨法)을 전공하고 졸업 후 1920년 초 고국방문 강연단을 조직하여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다 그해 9월 독일 유학길에 올라 베를린 대학 독법과에서 민형사법,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925년 2월 귀국해 조선일보사 논설위원과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1926년에는 조선일보사에서 동아일보사로 옮겨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활동 했다.
특히 1927년 9월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ML = Marx+Lenin) 책임비서(당수)가 되었다가 총독부에 적발돼 1928년 2월6일 연행되어 7년 선고를 받고 투옥된 후 1934년 7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면서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결심했다.
이어 김준연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과 관련해서도 총독부에 연행돼 고문을 받기도 했는데,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약품으로 지워서 신문에 게재해 총독부로부터 신문사 취업금지령까지 받았다.
해방 이후인 9월7일에는 송진우를 위원장으로 하는 초당적 정부조직을 모색하려는 합의기관인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성명을 통해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맹렬히 공격을 가하고 9월16일 천도교회관에서 ‘한국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특히 해방 후 미군정 시절에는 한민당 부위원장 겸 노농부장 및 선전부장, 한국 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 연구부장, 민주의원, 헌법 기초의원, 제헌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공산세력과 중간세력, 남북협상 추진세력들을 연일 맹공격하는 성명서와 신문 사설, 논설을 가장 많이 발표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장애가 되는 반대세력에게 직격탄을 퍼부었다.
또 1949년 5월 9일에는 동아일보에 ‘의정단상 1년 회고’라는 논설을 통해 〈국회 프락치사건〉에 연루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아울러 허 원장은 김준연 선생이 내각책임제 헌법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꿔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을 언급하며 “국내외로 극도로 혼란했던 당시 대통령중심제가 아니었더라면 정부 수립 후 발생한 여러 가지 복잡다단한 어려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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