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체험 수기①] 내 마음 속 살아있는 대한민국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영주권’ 부문 최우수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너는 도대체 군대 왜 왔냐”
입대를 한 그날부터 일병 4호봉이 된 지금까지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선후임들과 심지어는 간부님들께 수도 없이 듣고 있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사실 왜 군대에 오기로 결정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21살 여름 다시 수험생이 되어서 어학병 시험준비를 한 것도, 잘 다니고 있던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한국에 다시 들어온 것도, 안 가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조언에도 굳이 입영신청을 한 것은 딱히 이유라고 할 것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병역이행이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를 키워준 나라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기에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고,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한다는 것조차도 나에겐 아직 낯 부끄러운 일이다. 영주권을 따기까지 남들보다 고생을 덜했고, 또 매우 최근에 딴 것이기 때문에 나는 미국인이라기 보다는 미국에서 산 경험이 조금 있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라면 누구든지 병역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청소년기, 아니면 유소년기부터 어떻게든 군대에 오는 것을 피하려고 온갖 방법을 구상해 봤다는 걸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내가 그런 마음가짐을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초등학생시절부터 왜 나는 주변 친구들처럼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 부모님께 어리석은 원망을 했었다. 그러나 정작 우연치 않게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니 나는 입대를 택했다. 후회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입대한 날부터 매일매일 후회하고 있다고 대답 한다. 작전병 업무와 매 근무가 고된 작전상황 근무를 한달에 열 번씩 하다보니 잠시 바람 쐬러 나갈 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울뻔한 적도 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었다면 기분이 좋은 적도 있었다.
입대를 하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제일 뿌듯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선임들과 같이 범계역 주변으로 외출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식사 후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던 우리에게 어느 노인분이 말을 걸었다.
“군인 아저씨, 우리 손자가 할 말이 있대요.” 그 할머님의 뒤를 보니 예닐곱 살 먹은 듯 한 꼬마 아이가 서 있었다. 그 아이는 내 손을 잡더니 “삼촌, 나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귀여운 꼬마를 보자 나의 어릴 적 모습이 생각이 났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남양주 보건소 관사에서 살던 때였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공중보건의로 병역을 이행하셨으며 근무가 끝나자 예비군 육군 대위로 편성되셨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병원과 가까운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으로 이사를 갔다. 우리집 20㎞ 이내엔 육군사관학교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군인을 대하는 게 익숙했다.
생도들과 간부들, 그곳에서 근무했던 병사들과 대위 군복을 입으시고 예비군훈련에 참가하시는 아버지를 통해 ‘군대는 당연히 가야하는 곳’ 이라는 인식이 나의 머리속에 들어가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내가 그곳에 살던 시절에 임관을 하신 분들은 벌써 대위, 소령급 간부가 되셨거나 이미 전역을 하신지 오래일 것 같다. 유치원 시절 위문편지를 썼던 군인 아저씨들이 어느새 형들이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친구들이 어느새 군인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 군대란 이렇게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코앞에 다가온 인생의 위기이자 기회였다.
어학병 시험을 위해서 여름 내내 공부와 준비를 한 후 국방어학원이 있는 장호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서 군대를 가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때도 명확한 답을 내리진 못했다
아마도 나는 군대에 대한 나의 본능적인 이끌림에 대한 답을 찾으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던 콜라, 휴대폰 그리고 옷가지까지 다 빼앗기고 나서야 나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내 것이라고는 양말 한 짝도 용납되지 않던 훈련소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배웠고, 지휘통제실에서 뜬눈으로 지낸 밤들은 내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해답을 내리는 시간이 되었다. 난생 처음 내 필요에 의해 공부를 시작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부대 내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갈망하였지만 그 중 가장 원하고 그리워한 것은 바로 ‘창작의 기쁨’ 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영상 제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입대 전까지도 TV영화학을 전공하고 인디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며 나의 꿈을 쫓고 있었다. 음악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으며 원래 입대를 한다면 정훈병이 되고 싶었다.
허나 대학 선배들의 권유와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어학병에 도전을 하게 되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는 영상도, 영어도 작업할 기회가 흔치 않은 작전병이 되었다. 처음에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 업무 인수를 받고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제한들이 나의 꿈을 더욱 키워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새벽, 한두 줄로 시작한 글들이 소설로, 기사로, 또 영화 시나리오로 커나가고 있었다. 창작에 대한 갈증은 첫 휴가를 나갔을 때도 작업실에 앉아서 밤새 녹음을 하게 만들었다. 군대에서 얻는 건 사람밖에 없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나에게 이 말은 추상적인 명언들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선임들이 전역을 하던 날이면 짧은 기간 동안 그들과 너무나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랐지만 그들이 떠나는 것은 처음에는 너무나 슬펐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맺음이 있다는 옛 말도 있듯이 이런 지나간 시간들은 나에게 왜 군필자들이 군대에 대한 추억을 끊임없이 늘어놓게 되는지 알게 해주었다. 원래도 미래 걱정이 많은 나였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아까운 시간을 쪼개 더욱 더 윤곽이 뚜렷한 인생 설계를 시작했고 나보다 먼저 인생을 경험한 영관급 간부님들과 근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나의 20년은 어떨지 상상을 해보았다.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다는 건 친구들의 군 생활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간부님들을 단순히 상관으로 보지 않고 인생 선배 또는 스승님처럼 모실 수 있었다. 그 결과 간부님들 사이에서 나는 업무상 실수가 많아도 같이 근무하기에 재미있는 병사가 되었고 몇몇 분들은 내가 전투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마주치면 내 경례를 받아주고 웃으면서 안부를 물어주셨다.
정말 신기하게도 군대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이 나에게 너무나도 크다. 군 구조에 대해 인트라넷을 통해 배우고, 각 사단 및 군단, 사령부들의 위치, 역사, 기능과 부대마크에 대해 배우는 것도 나의 취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심지어 휴가를 나가서도 인터넷을 통해 군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거나 정보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인 것 같은데 이런 군대에 대한 나의 애증 관계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될 것 같다.
군단장님의 연혁을 보다 문득 32사단장으로 근무하셨다는 걸 읽고 32사단의 홈페이지에 홀린 듯이 이끌려 역대 지휘관들을 찾아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모부이자 27대 사단장이었던 분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근무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가 나는 할머님께 전화를 드렸고, 근무취침도 포기하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여쭈어 보았다.
자신의 근무병과 운전병을 ‘아들’이라 부르셨다던 이모할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군대에 온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무엇보다도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정” 이라는 개념은 내가 유학을 하면서 느끼지 못한 것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것에 이끌려 군에 온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의 병사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누구보다 병사를 챙기고 대신 싸워주셨던 전 지휘통제반장님은 군대란 조직의 진정한 멋을 느끼게 해주셨다. 영주권 연장 관련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또 고되고 힘든 근무의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해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던 본부대장님은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난 내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남자다움’과 ‘멋짐’에 대한 동경이 컸다. 훈련소에서부터 만난 모든 군인 개개인이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 이상쯤은 있다. 훈련소에서 나에게 군 생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 해주었던 분대장님부터, 빨래할 시간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본인이 대신 빨래를 해결해 주겠다고 했던 선임, 전입 온 다음날 이곳저곳 데려다 주시면서 우리 부대에 대해 알려주었던 선임, 많은 도움이 필요할 때 내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던 내 맞선임까지 내 군생활의 기초를 다져준 선임들이 있었기에 나는 군 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다.
나도 믿고 좋아하기 어려운 내 자신을 따라와 주는 후임들도 있기에 하루하루가 보람차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나니 마치 군 생활이 끝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 내가 여태껏 지내온 것에 비해 앞으로 남은 군 생활은 멀고도 험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내가 왜 군대에 오기로 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못 내린 것 같다.
다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내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또 그 기간 동안 어떤 것을 얻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이제 대충은 실마리를 잡기 시작했으니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으며 나는 나아가려 한다. 입대한 날부터 전역하는 그날까지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나 해답을 바라고 있지도, 기대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떠내려가듯이 나아가다 언젠가는 내가 나라에 희생하고 있는 이 청춘이 보람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키고 있는 이 나라에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수도군단 작전참모처 작전계획과 일병 오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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