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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⑥]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Written by. 원도현   입력 : 2017-09-15 오후 2: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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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사회복무요원 체험 수기」 공모에서 당선된 글임.(편집자 주)

어제의 나

 “사회복무요원에 대하여 알고 계신가요?” 누군가가 이렇게 의문부호를 던진다. 이 물음에 관한 당신의 답변은 인지의 차이에 관한 2가지의 선택지의 객관식 문항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복무요원의 명칭에 관해 알고 있다는 전제를 두고 질문을 바꿔 보았다. 사회복무요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듣게 된 대상자는 현재 상황에 따라 다양한 대답과 생각이 오고 갈 것이다.

 미래의 국방의 의무를 짊어지게 될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현역으로서 국에 부름에 응답한 누군가에게는 비웃음과 비아냥의 대상이 혹은 선입견이 강한 누군가에게는 사회로부터 질병과 부상 등의 이유로 국방의 책무를 완전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염려와 색안경의 피사체가 되기도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의 생각이 변화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사회복무요원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투영하는 면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이 더욱 커 보이기만 한다.

 이렇게 부정적이고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걷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인 사고에 당당히 “그렇지 않다.”라고 선뜻 말할 수 없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과거의 나는 대중의 무리에 섞여서는 현역으로 복무를 다하지 않는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겁쟁이 마냥 비난했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병역판정검사를 받기 전의 나의 모습은 현역으로 가는 나의 모습이 저들과 다르기에 이해하기보다는 본인의 자존감 향상의 도구로 이용하기에 바빴던 것만 같았다. 병역판정검사를 하고 난 후 4급의 사회복무요원의 판정을 받은 종이를 보고 나서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몇 가지의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말할 변명을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때로는 부끄럽지만, 남들과 다르게 편하게 집에서 자고 이러나며 출, 퇴근 근무를 하게 되어 좋다는 생각도 하였다. 

 그로부터 복무를 시작하기 전 약 1년여 동안 새롭게 대학교에 다니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등의 신선한 경험을 할 때마다 사회복무요원의 사회적 인식이 과거의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군대는 언제 가니?” 라는 물음에 나는 어디서나 선뜻 대답할 수 없었고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 예정이라는 말을 한다면 상대방은 “왜 도대체 얼마나 아프길래......” 혹은  “어디가 많이 안 좋니?” 라는 염려의 답변이 돌아오곤 했었다. 사회복무요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회복무, 첫발을 내밀다

 푸르른 녹음이 짙게 끼고 화창한 하늘은 구름 대신 매미 소리로 가득한 15년의 8월, 나는 대한적십자사 대전, 세종 지사로 첫 복무의 발걸음을 나섰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설레기도 했지만, 훈련소를 다녀온 뒤 포부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나 용돈 벌이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제외한다면 내 인생의 있어서 최초의 사회생활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매우 흥분되었다. 근무지에 도착하여 사회복무요원을 담당하시는 분과 잠깐 인사를 나눈 뒤 각 부서를 돌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근무지 안에 계신 모든 분이 친절하고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RCY 본부라는 청소년 부서에 소속되었다. RCY 본부에서 하는 업무를 들었는데 초, 중, 고, 대학생들의 준거집단 형식으로 학생들의 자원봉사를 이끌어주는 부서로서 행정적인 업무 외에도 학생들과 같이 행사에 참여하여 다른 어려운 이들의 손을 함께 맞잡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학생들이 수행한 봉사활동 입력과 같은 행정 업무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봉사활동을 할 때 같이 하기도 하고 혹은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데에 행여 방해가 되거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도와주는 일을 하였다. 그렇게 2년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의 첫 날갯짓이 시작되었다.

사랑으로 연탄을 피워내다

 지칠 줄 모르듯이 작열하던 태양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코끝을 시원하게 만드는 복무중의 가을, 그날은 간만의 사무실에서가 아닌 야외로 봉사활동을 나갔다. 보통의 사회복무요원은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봉사활동 및 행사가 많은 업무의 특성상 가끔은 주말에 근무하곤 한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시고 졸린 눈을 비비며 집결지인 대전역 광장으로 모였다.

 주말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대전역 동 광장에는 많은 인파가 따뜻한 즐거움에 참여하기 위해 저마다 모여들고 있었다. 이제 막 중간고사를 마치고 연탄 봉사를 하러 온 중,고등학생 친구들부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힘든 발걸음을 해준 초등학생 친구들까지 여러 명의 학생이 있었다.

 PC방, 노래방 등이 아닌 봉사활동을 위하여 대전역으로 발걸음을 옮겨준 학생들이 매우 대견스러워 보이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주말인데 집에서 조금 더 자고 쉴 걸이라는 안이한 생각도 잠시나마 했었던 나 자신이 약간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봉사활동을 위한 모든 사람이 모여들었다.

 곧 이어 적십자사 직원과 쪽방촌 상담소 직원들의 말씀이 이어졌다. 우리가 오늘 해야 할 막중한 임무는 연탄배달 트럭이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작은 쪽방촌 집에 연탄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6개 조 10명 내외의 인원수로 편성되어 양손에는 비닐장갑과 목장갑을 착용하고 일회용 우비를 입은 뒤 연탄 배달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쪽방촌으로 이동하면서 처음에는 신이 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같은 조가 된 학생들과 여러 재밌는 얘기도 하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어색한 분위기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첫 번째집 – 골목길에 햇살을 비추다

 대전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가에 연탄 회사에서 트럭 내려놓고 간 연탄이 보였다. 이제 ‘이 연탄을 옮기는구나’ 생각하며 주위의 집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 주위에는 오래된 상가들과 칙칙한 회색 벽들만 있을 뿐 우리가 평소에 거주하던 가정집 형태의 집은 볼 수가 없었다.

 쪽방촌을 관리하시는 직원께서는 우리가 연탄을 놓아야 할 집을 알려주시겠다며 우리를 인도하였다. 회색빛의 벽과 벽 사이에 성인 남성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너비의 조그마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골목길 안은 햇빛이 항상 건물의 가려져 있어 더욱 서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몇 걸음을 옮긴 뒤 반지하로 된 하나의 집 앞에서 멈추셨다. 문을 두들기고 “어르신 연탄 갖다 주러 왔습니다.” 라고 직원분께서 말씀하셨다. 몇 초 뒤 문 앞에서 딸각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백발의 할아버님 한 분께서 나오셨다. 그리고서는 “아이고, 감사드립니다.”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며 연탄을 놓아야 할 장소를 말씀해 주셨다. 10명 남짓의 아이들은 일렬로 서서 하나씩 하나씩 연탄을 전달하며 옮겼다.

 혹시나 할아버님의 소중한 연탄을 떨어뜨려 깨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우리의 마음도 같이 옮겼다. 아이들의 이마에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가고 있었다. 어느덧 회색빛의 삭막한 쪽방 앞의 골목길은 아이들의 환한 웃음으로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첫 번째 집이 끝나고 아이들은 이 정도는 거뜬하다면서 어깨를 한층 치켜세우고 다음 연탄을 옮겨야 할 집을 찾고 있었다.

두 번째 집 –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히다

 두 번째 집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2층의 집이었다. 경사는 매우 가팔라 성인인 나의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여간 힘들었다. 집에는 할머님 한 분께서 사셨는데, 연로하신 몸으로 이런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심란하였다. 계단 안은 어둡고 습한 지하실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빛이라고는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나지막한 작은 한 줄기 햇살뿐이었다. 아이들은 할머님을 위해서 서로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더 어두운 곳으로 가 그곳에 미소라는 이름의 촛불을 밝히려 하였다. 이번에도 한 줄로 서서 앞쪽에 친구들이 힘들면 뒤쪽의 친구들이 바꿔주며 하나하나 연탄을 옮겼다. 그렇게 할머니에게도 따듯함을 선물하였다.

 그 뒤로 두세 집 더 연탄을 배달해 주었다. 쪽방촌 근처에 사시는 다른 어르신 분들께서는 “학생들이 주말에 나와 좋은 일들 하네.” 라면서 칭찬도 해주셨다. 우리의 모습을 보며 길을 걸어가고 있던 다른 학생들도 본인들도 이 봉사에 참여하고 싶다고 혹시나 다음번에 이런 뜻 깊은 활동이 있으면 불러달라고 요청하였다. 순수한 아이들의 날갯짓이 공공선에 행복의 태풍이 되는 순간이었다.

연탄, 아이들의 마음이 하얗게 만들다

 어느덧 시간을 흘러 해가 가장 높이 솟아 내 머리 위에서 바라볼 시간이 되었다. 아침의 추위는 눈 녹듯이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는 따스한 햇볕이 대신하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뽀얗던 아이들의 얼굴은 어느새 연탄의 검은 얼룩으로 까맣게 색칠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뭐가 그렇게 재밌고 우스운지 사진을 찍으며 정답게 놀려댔다. 얼굴 전체에 연탄재를 칠해 마스크 팩을 만들거나 볼에 두 줄씩 그어 군인인 척 상황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봉사 활동이 끝난 후에 마지막 인사를 위해 다시 대전역에 모였다. 연탄 2,000장을 옮긴 후에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전혀 힘들다거나 하는 표정을 그 누구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밝은 표정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인가 친구들과 하나가 되어 같이 떠들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즐거운 봉사활동을 마무리하였다.

 처음에 사용하지 않은 연탄을 본다면, 그 연탄은 매우 까맣다. 하지만 그 연탄이 추위에 떨고 있는 누군가에게 따스함을 나누어 줄 때, 연탄은 점차 자신의 검은 옷을 벗고 하얗게 변해간다. 아이들의 마음이 연탄처럼 모두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었다.

오늘의 나

 아이들은 봉사 활동을 하면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알아봐 주길 원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수행해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보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하나씩 배워 나가게 된다. 사회복무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복무 생활을 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면 언젠가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그들의 필요성을 알고 함께 걸을 것이다.

 올해 여름 소집해제를 앞두고 있는 나는 이제 어느덧 사회복무요원으로서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많은 이들과 함께 울고 웃었고 함께 즐거워하며 같이 슬퍼하였다. 2년의 사회복무요원으로서 복무를 하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였고 이제는 다시 사회로 돌아가 건강한 대한민국을 위해 이바지 할 것이다.
 
원도현 / 대한적십자사 대전세종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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