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기념] (40)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 터
서울시 종로구 종각역(지하철1호선) 근처 쉼터에는 ‘조선시대 우물’,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 터’란 안내판과 더불어 작은 정자가 있다. ‘병사구 사령부’에서는 현역 징병 및 제2국민병 등록 등의 업무를 담당했으며, 징집된 청년을 모아 시청 광장 등지에서 입대식을 거행하였다.
이곳에는 6.25전쟁 당시 징병업무를 담당한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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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많은 군인들이 전투에 투입되어 치열한 전투로 전사하고 부상을 당하는 등 말로 표현하지 못할 비극을 겪었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싸웠던 역사들은 많이 접하는데 그럼 그 군인들은 어떻게 형성되어 졌을까?
국방력은 직접 전투행위에 투입되는 군인을 비롯하여 화력이나 장비 등으로 구성되는데, 전쟁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국민의 인적동원(人的動員)이 곧 병역(兵役)이다. 병역이란 병적(兵籍)에 편입되어 군무에 임하는 것을 말한다.
1946년 1월에는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으나 조직적인 병무행정의 싹은 움트지 않았다. 38선 일대에서 북한군에 의한 불법적인 침공 사건이 빈발하고, 6.25동란의 발발로 병력자원의 수요가 증대되자 조직적이면서도 체계적인 모병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49년 8월 6일, 전문 8장 81조 부칙으로 구성된 병역법(법률 제41호)의 발효와 함께 국방부는 육군본부 내에 병무국을, 각 시·도에는 ‘병사구 사령부’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의무병 징집을 위한 병역판정검사까지 실시하였으나(1950년 1월 6일), 이른바 '국군 씰링'(국군 10만명 편제 제한)의 발효로 정기적 징집의 필요성이 없다 하여 1950년 3월 4일 해체되면서 '병무행정 전담기구 부재'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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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6.25동란이 발발하면서 병력수요가 급격히 증대되자 정부는 뒤늦게 해체한 조직의 재건에 착수하여 1951년 4월 20일까지 총 10개의 ‘병사구 사령부’를 재설치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병무행정 업무가 일시 마비상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51년 봄, 아군의 제2차 총 반격전으로 남한 일대가 수복됨에 따라 비로소 정상적인 병무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선이 중공 국경에까지 이를 만큼 확대되자 전선을 커버할 30만명 이상의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제2국민병 등록제를 실시할 수 밖에 없었고,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1950년 8월초에는 20만명 가까운 장정을 소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1년 8월 15일 병무행정의 효율화를 위하여 국방부 내에 병무국을 설치하였으며, 각 도 ‘병사구 사령부’도 국방부 직할하에 두도록 하는 등 휴전 후에도 수차례에 걸친 예속 변경을 거듭한 끝에, 1962년 10월 1일 현행법의 모태인 병역법 개정으로 국방부 산하에 각 시·도 병무청이 발족하여 전담 행정관청에 의해 병무행정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70년 8월 20일 대통령령 제5281호에 의거하여 ‘병무청’이 국방부 외청으로 독립함을 계기로 당시까지 지칭되던 '시·도 병무청'을 '시·도 지방병무청'으로 발전적으로 개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 이전 '병무행정 전담기구 부재'로 약화된 국방력에 대해 반면교사로 삼기위해 이곳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안내판을 세워 관리하고 있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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