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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기념] (41) 워커장군 추모비

Written by. 인턴기자 김민   입력 : 2026-03-17 오전 11: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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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역 2번 출구에서 내리면, 길 건너에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작은 비석은, 미국 육군 대장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졌다.  ⓒkonas.net


아버지가 장교였던 군인 집안 출신이었던 월튼 워커 장군은, 1908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것을 시작으로,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하여 뛰어난 무공을 쌓았다. 

특히 워커 장군의 용맹함은 이 때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례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워커 장군이 지휘한, 조지 S. 패튼 대장이 이끄는 제3군 휘하의 제20군단은 적이 누구든지 간에 굴하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진격했기에 “유령 군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독일 남부의 강제수용소였던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해방하고, 1945년 봄에는 오스트리아까지 진격한 워커 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6.25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워커 장군이 처음 도착한 시기 대한민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은 각종 중화기와 잘 훈련된 병력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워커 장군은 일단 먼저 파견된 선봉대를 동원해 대전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병력의 차가 너무 커 일단 후퇴했다. 

그렇게 전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낙동강까지 몰렸다. 상황이 어찌나 좋지 않았는지, 당시 미국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비밀리에 대한민국 망명 정부 수립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워커 장군만큼은 달랐다. 그는 1950년 7월 내려진 미 제8군의 명령서에서 직접 “Stand or die”, “자리를 지키거나 죽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현지 사수를 주장했다. 

이런 워커 장군의 태도를 모두가 좋아하지만은 않았다. 고국 미국에서는 남의 나라를 위해 자국 병사들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며 비난이 쇄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워커 장군은 “부산으로 밀려나면 더 많은 살육이 벌어진다”라고 반박, 국군과 함께 연합해 끝끝내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말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워커 장군은 사령부에 지속적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는 미군 병력을 증원해달라고 호소한 동시에, 후방에서 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인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두 눈으로 전황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연락기를 타고 날며 정찰 활동을 수행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빈번했는지, 보다못한 그의 부관이 연락기에서 대장 탑승기임을 알리는 표식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국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한 워커 장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마침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고, 그때까지 낙동강을 사수한 국군과 미군, 그리고 유엔군은 총 반격에 들어가 북한군을 38선 위로 몰아냈다. 

하지만 그해 겨울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워커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단 후퇴한 뒤 다시 힘을 길러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워커 장군은 무언가를 해볼 틈도 없이 1950년 12월 23일, 의정부에서 탑승한 지프가 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워커 장군이 대한민국 땅을 밟은 기간은 다 합쳐도 채 반년이 되지 않지만 그가 6.25 전쟁에 남긴 영향은 매우 컸다. 

만약 그가 1950년 여름에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함께 기적에 가까운 방어전을 수행하지 못했다면, 혹은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지도상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한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워커 장군이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맥아더 장군은 모두가 기억하지만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밑에서 “자리를 지키거나 죽어라”는 명령까지 내리며 방어에 전념한 워커 장군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워커 장군이라고 하면 그의 공적보다는 그의 이름을 따서 사후에 지어진 워커힐이라는 지명을 먼저 기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우리만큼은 결코 그해 여름 워커 장군이 몸소 보여준 놀라운 투혼과 군인 정신, 그리고 용맹함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존재가 불투명 했을지도 모른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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