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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기념] (42) 영국 런던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Written by. 인턴기자 김민   입력 : 2026-03-24 오전 9: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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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수도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궁전을 따라 템스강변을 걷다 보면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그 공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군인의 조각상과, 그 뒤로 커다란 비석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념물은 바로 런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이다. 

 ▲ 런던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 기념비 ⓒkonas.net

 

흔히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외국 군대에 대해 물으면 미군만을 떠오르지만, 영국은 6.25 전쟁에 제일 먼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한 뒤, 6월 26일, 그리고 6월 28일 열린 영국 하원 질의응답에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야당 당수 윈스턴 처칠은 초당적으로 북한의 침공이 “적나라한 공격”이고 “이유 없는 폭력행위”이며, 민주적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위협하는 행위라는 데에 동의하였다. 

 ▲ 런던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 기념비 ⓒkonas.net

 

그렇게 영국 행정부와 입법부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영국은 대단히 신속하게 움직였다. 6월 29일 참전이 결정되었고, 7월 초 선두부대를 실은 배가 영국 본토를 떠났으며 8월 중순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는 바로 옆 일본에 주둔 중이던 주일미군을 선발대로 배치한 미국을 제외하면, 6.25 전쟁에 참전한 모든 국가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 땅을 밟은 영국군은, 한국 전쟁 내내 “정예 부대”로서 독특히 활약했다. 

대표적으로, 1951년 4월 22일 벌어진 설마리 전투 당시 영국군은 단 600명으로 구성된 일개 대대가 무려 3만 명이 넘는 중공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단 59명의 인명 피해만 입고 무려 1만 명이 넘는 적 병력을 물리쳤다. 이후 대대는 결국 적에게 포위되어 1개 중대를 제외한 대대원 전원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분투가 남긴 영향력은 엄청났다.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은 중공군은 서울 3차 점령을 목표로 했던 1951년 4월 공세를 중단해야만 했고, 이는 장기적인 6.25 전쟁의 판도를 뒤바꿔 놓음과 동시에 같은 해 봄부터 벌어진 유엔군의 반격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렇게 전쟁 내내 활약한 영국군이었지만, 너무 많은 전투를 치뤘던 탓에 결과적으로 1078명이 전사하고 2000여명이 부상당하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3년간 지켜준 영국군은 종전 이후 4년간 주둔하다 최종적으로 1957년 모든 부대가 귀국했다. 

오늘날 영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 영국군, 특히 6.25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영국은 미국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6.25 전쟁에 파병한 국가이자, 이들이 없었다면 1951년 다시 한 번 서울을 적의 손에 잃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konas)

향군 대학생 인턴기자 김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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