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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의 눈물

Written by. 김정기   입력 : 2007-03-16 오후 12: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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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공산주의를 한다는 사실이 기적이듯이 한국이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도 기적이다."
 '20세기의 불가사의'라는 제목으로 회자된 이 우스갯소리에는 그냥 웃고 지나치기에는 가슴 한구석을 저미는 교훈이 담겨 있다.

 오늘날 중국이 정치는 공산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기괴한 모습으로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안팎의 기대와 예측 속에 빠른 속도로 비상하고 있는 사실, 그리고 한반도의 절반에서 세상에 보기 드문 시대착오적 신정국가(神政國家)가 존립하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이 농담 아닌 농담이 꼬집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흔히 모택동을 꼽는데 이는 착시현상이다. 모택동은 고대로부터 연면하게 이어져 온 황제, 즉 '인민제국(人民帝國)'의 천자가 되고 싶어 했던 인물로서 사실상 20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그 귀중한 세월에 중국을 후퇴시킨 장본인이다. 그러고도 엉뚱하게 이웃나라와 멀리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으니 모택동 자신도 문제지만 그런 인물을 존경하는 쪽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중국을 실제로 일으켜 세운 것은 모택동 같은 이념형 지도자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비틀어 중국식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낸 실무적 지도자였다. 등소평(鄧小平)이 그 사람이다. 중국 서남부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가면 곳곳에 등소평의 족적이 남아 있다. 원래 사천성 광안현(廣安縣) 협흥(協興)에서 객가(客家) 출신으로 태어난 등소평은 1970년대 문화혁명이 끝난 후 아주 오랜만에 고향땅을 찾아 유서 깊은 촉(蜀) 땅이었던 사천성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청나라 말기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참담한 인민들의 삶'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그곳 관리들이 전했다. 고향 사람들의 피폐한 삶을 보고 대오각성했던 탓일까. 이 눈물이 오늘날 중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밀어올리고 있는 추동력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 속에서 등소평의 외모를 보면 영락없이 오뚝이를 연상케 한다. 작은 신장에 커다란 머리, 그리고 노인답게 통통한 배와 짧은 하체, 부도옹(不倒翁) 그대로다. 흔히 키가 작고 배가 나온 지도자의 전형으로 나폴레옹을 꼽는데 등소평과 나폴레옹의 체형은 전혀 다른 유형이다. 그리고 정치 스타일도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등소평도 나폴레옹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천자처럼 행세하고 싶어 했던 모택동과 달리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중국을 백팔십도로 돌려세운 그의 사고의 저변에는 프랑스 유학 시절에 몸에 익힌 유럽 지성의 합리주의를 익혔기 때문이리라. 주은래도 비슷한 성향이었으나 그는 모택동의 그늘 속에서 2인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역사적 책무를 다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아니었다. 잠시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자.

 193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심각한 노선투쟁에 빠져 있었다. 등소평이 '형님'으로 생각하던 주은래를 비롯해 주덕과 같은 인물들도 이른바 '국제파'와 함께 코민테른의 노선을 따라 대도시 공격의 전략을 앞세우고 있었으나 모택동은 중국의 현실에 맞게 '농촌을 공략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유격전술을 제시했는데 이 때 등은 모택동의 노선을 지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이 지역별로 6개의 행정위원회로 구분되어 군사지도자들에 의해 통치될 때 등소평은 사천성, 귀주성, 운남성, 서강성을 통치하는 서남지구 행정위원회의 부주석이 됐다. 그리고 1952년에는 중앙정치계로 진출하여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됐고 당 기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1954년 당 중앙위원회 비서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1956년 소련 공산당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의 주도로 행해진 스탈린 격하운동, 즉 우상파괴 운동은 중국 공산당에도 영향력을 미쳤고, 필연적으로 모택동과 등소평 간의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대약진운동'을 표면에 내세운 모택동의 급진적인 노선에 유소기의 실용주의적인 노선이 맞섰는데 이 때 등소평은 유소기의 노선에 가담했다. 1962년의 중앙서기처 회의에서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식량의 증산이다. 증산만 된다면 개인경영 방식을 채택해도 좋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이다.'는 발언을 해서 이른바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을 제시했다.

 1965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문화대혁명에서 등소평이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 제2호'로 지목되어 1968년 강서성 생산건설병단으로 하방(下放)된다. 숙청이었다. 이 때 등소평의 나이 62세, 그로부터 1973년 복권될 때까지 5년 동안 지독한 수모와 목숨을 위협 받는 공포를 견디며 살았다.

 모택동 사후 화국봉에 의해 복권된 그는 1978년 열린 제11기 제3차 중앙위원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의 최고 영도적 위치'를 획득했고, 1981년에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을 맡아 군권까지 장악했다. 중국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었다. 이후 공식적인 지위에서 물러나고 당과 국정이 호요방, 강택민의 순으로 이어질 때도 등소평은 '국부'의 자리에서 중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다했다. 1992년 1월 연안지역을 방문했을 때 발표한 '남순강화(南巡講話)'는 이후 중국의 국정 방향을 이끄는 지표가 되었다.

 "지난 날 우리는 사회주의 아래에서만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했다. 그러나 개혁을 통한 생산력 발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주의를 하지 않고 개혁 개방을 하지 않으면 경제가 발전되지 않는다. 또 인민의 생활이 개선되지 않으면 사회주의가 행해지지 않는다. 이론가나 정치가가 남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우(右)가 아니라 좌(左)이다."

 우리는 사회주의 실험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조국을 보면서 이념의 오류를 인식하고 과감하게 노선을 수정해 온 영웅적인 인물들을 알고 있다. 고르바초프가 그랬고 등소평이 그랬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옛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으나 등소평의 '백묘흑묘론'은 중국 공산주의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절묘한 '중국식 사회주의'를 낳았다. 그 차이를 두고 슬라브 문화와 중국 문화의 차이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고르바초프와 등소평의 차이가 더 컸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여 개혁을 이루고 경제 발전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이 모든 정책이 중국공산당 1당 독재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유지해 온 등소평의 통치기술의 전모를 다 이해하기에는 아직도 중국의 개혁 실험이 진행 중인 사항이므로 속단하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이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14억 중국 인민들이 등소평 덕분에 '국가가 발전하고 인민들의 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등소평의 노선과 개혁이 옳았다는 증거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닿는다. 옛 소련의 고르바초프나 중국의 등소평 같은 인물이 한반도 북녘 땅의 조선 인민공화국에는 왜 태어나지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이다.
모두에서 인용한 우스갯소리처럼 한국인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비민주적인 성향의 피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운 그 어떤 변화의 씨앗을 역사가 숨겨두고 있는 것일까. 북한도 키가 작고 배가 나온 지도자 한 사람을 지니고 있으나 그 역할과 그릇의 크기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중국과 북한의 거리는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konas)

 출처:http://www.hanna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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