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名人]방짜유기 달인 이봉주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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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짜유기 달인 이봉주 옹= 방짜유기 분야에서 국내 유일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봉주 옹이 경북 문경의 작업장에서 유기를 다듬고 있다. |
"일을 계속하니 늙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를 잇고 있는 아들도 저만큼은 못하지요."
중요무형문화재 77호인 유기장 기능보유자 가운데 유일하게 방짜유기를 만들고 있는 이봉주(82) 옹.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어느날,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방짜유기촌에서 이 옹을 만났다. 세월이 20여년 전 쯤에서 멈춘 듯 이 옹은 꼿꼿한 허리를 세운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작업장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구리에 주석 등을 섞은 놋쇠로 만든 그릇을 가리키는 유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방짜, 반방짜, 주물로 나뉜다.
방짜의 경우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 반방짜는 전남 순천, 주물의 경우 경기 안성이 각각 유명한 산지로 꼽히고 있다. 금형에 놋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물유기나 반제품 형태의 주물유기를 두드려 만드는 반방짜유기에 비해 방짜유기는 처음부터 달궈진 놋쇠덩어리를 두드려 만드는 탓에 제작이 까다로워 으뜸으로 친다.
방짜유기는 과거에는 지휘자격인 원대장 등 11명이 한 조를 이뤄 만들곤 했으나 근래 들어 각종 도구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적은 인원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도 이 옹은 조교격인 아들을 비롯해 이수자 3명, 전수장학생 6명 등 10명의 제자 이외에 여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원대장을 중심으로 앞망치대장, 가질대장, 네핌대장, 겟대장 등이 역할을 나눠 구리와 주석을 용해하고 일정한 모양의 덩어리를 만든 뒤 다시 불에 달구고 망치로 쳐서 그릇을 만들어 낸다.
담금질을 통해 변형된 재료는 바로잡는 벼름질과 깎아 내는 가질, 윤 내는 작업까지 거치면 비로소 반짝반짝 빛나는 그릇이 된다.
유기가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이미 유기를 제작하던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던 점으로 미뤄 역사는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유기가 널리 사용됐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며 군수품으로 공출되면서 제작 기술이 퇴보했다.
유기산업은 광복이 되면서 다시 활성화됐지만 1960년대부터 값싼 양은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식기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다 유기는 1980년대 이후 쇠독이 오르지 않고 살균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된다.
이 옹은 방짜유기의 고장인 평북 납청 출신이다. 어머니가 유기 행상을 했지만 공장 문턱이 높아 어렸을 때는 유기제작 기법을 배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옹은 광복 이후 월남한 뒤 22살이 되던 1948년이 돼서야 동향인 탁창여씨 아래에서 방짜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탁 씨는 38선을 수차례 넘나들며 김찬규.김보근씨 등 납청의 장인들을 월남시켜 방짜유기의 명맥이 이은 남한 유기의 대부격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유기로 된 요강이나 식기 없이는 시집도 못갈 정도였으니 당연히 벌이도 좋았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산림법이 강화돼 일반 가정의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면서 일산화탄소에 변색이 잘 되고 보관이 어려운 유기는 수요가 현격히 줄었다.
이 옹 역시 막노동과 호떡 장사로 생계를 이었을 정도로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다.
그는 "아이들 연필 사줄 형편도 못될 정도로 안팔렸다"며 "그때 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이 옹은 형편이 어려울 때 모든 걸 내다 팔아도 언젠가는 다시 쓸 일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연장만은 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이 옹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유신 정국을 맞아 집회와 시위가 늘어났고 '데모꾼'들이 유기로 만든 꽹과리를 많이 찾게 됐다.
한 달에 꽹과리만 1천500개씩 팔릴 정도였다.
특히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부터는 탄탄대로였다.
1994년엔 지름 161㎝, 무게 98㎏에 달하는 세계 최대 징을 만들었으며, 청와대에도 납품해 유기장으로서의 최고봉의 위치에 우뚝섰다.
세월이 흘러 요강이나 대야에서 밥그릇이나 악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고, 손망치 대신 기계망치가 대신하고 있지만 유기의 합금 비율과 정성만은 변하지 않았다.
줄곧 경기도 안양 일대에서 작업하던 이 옹이 문경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2004년.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그 옛날처럼 유기공장을 만들려던 그가 마음을 바꿔 남쪽에라도 기법을 전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키로 하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정착한 곳이 문경이다.
이 옹은 12만여㎡에 달하는 부지에 방짜공장을 만들어 일을 하면서 사택과 기숙사, 교육관, 수련장 등을 짓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고향 납청마을처럼 유기공장이 가득찬, 그야말로 마을을 만들고자 이름을 방짜유기촌이라 지었다.
그에게 요즘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일부 백화점이나 홈쇼핑에서 주물유기를 방짜유기라고 속여 팔고 있기 때문이다.
비전문가들이 언뜻 보면 방짜와 주물을 구분하기 어렵고, 오히려 주물유기가 모양이 미끈해 더 좋게 보이지만 수백차례 두르려 만든 방짜유기와는 조직 치밀도에서 차이가 난다는게 이 옹의 설명이다.
방짜유기는 잘 휘어지거나 깨지지 않고 비교적 색이 잘 변하지 않을 뿐더러 망치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어 수공제품의 멋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옹은 "기법과 내용물이 다른 데 어떻게 방짜유기라고 할 수 있느냐"며 "좋고 나쁨을 떠나 후손에게 제대로 넘겨줘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장남 형근(49)씨가 뒤를 이어 경기 안양에서 유기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둘째 며느리가 서울 인사동에서 유기 판매업을 해 그를 흐뭇하게 하고 있다.
이 옹은 요즈음도 매일 젊은 사람들을 이끌고 우두머리인 원대장을 맡아 집게를 들고 유기를 망치로 두드려 형태를 만드는 우김질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대구에 최근 그의 작품 위주로 전시되는 방짜유기박물관까지 조성하고 있는 그에게 남은 바람은 방짜유기촌에 기념관을 만드는 일이다.
젊은 사람들이 의욕을 갖고 유기일을 배울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 옹은 "기계화가 되더라도 장인 정신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면서 공장으로 발걸음을 총총 옮겼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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