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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선생이 꿈꾼 북한의 '넬라 환타지아'

그는 김정일에게 충격을 주고 그 충격이 체제 변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조성 되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Written by. 이병호   입력 : 2010-10-20 오후 1: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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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장엽 선생이 그의 기구한 삶을 마감한 날인 2010년 10월 10일의 북한의 모습은 그의 죽음을 더욱 덧없고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주민과는 달리 거만한 모습으로 김정일 옆에 서있는 기름지고 뚱뚱한 26세의 애숭이 김정은은 높은 단상에서 히틀러 나찌 군대식으로 걷는 인민군이 뿜어내고 있는 광기의 열병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넓은 김일성 광장에 울려 퍼진 거친 군화 발 소리는 마치 북한 주민을 짓밟는 위압의 소리였으며 한국을 향한 무력 위협의 신호인듯 했다.

 13년 전 황장엽 선생은 이런 모습의 북한이 되어서는 결단코 안되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300만 명의 북한 주민을 굶어 죽이는 천인공노할 체제 범죄에 침묵 할 수 없었고 전쟁이라는 더 큰 재앙마저 준비하는 김정일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민족적 양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던졌던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으로 넘어 와야 할 다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일부 국회의원을 포함, 비판론자 들이 당시 황 선생이 권력 투쟁에 밀려 망명한 것뿐이라고 그의 탈북 동기를 폄훼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제 담당 비서로서 김정일의 신임은 여전했고 평양 고급 간부 아파트에서 귀여운 손녀와 함께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안기부가 김정일에 대한 그의 환멸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베이징에 있는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암담한 북한의 현실에 절망한 답답한 심정을 안기부에게 연락해 왔을 뿐이었다. 그 이후 황장엽 선생은 자신이 북한에 머물러 있으면서 할일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망명을 통해 김정일에게 충격을 주고 그 충격이 체제 변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조성 되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그런 의사를 안기부 에게 알려 왔다. 이는 가족의 생명을 포함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 시키는 모험이었다. 안기부는 즉시 망명 작전에 돌입했다. 실패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어 극도로 정교하게 작전을 추진해 나갔다. 북한의 감시가  엄중했고 황 선생에게 우리의 준비사항을 알려주고 연락하는 일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상세 사항은 아직도 기밀로 유지되어 공개되는 것이 적절치 않지만 결론적으로 황선생의 망명은 안기부 역사상 가장 성공적 정보작전 사례가 되었다. 정보적 측면에서 황선생은 수천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정보 자산이었다.

 안기부, 미 CIA를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은 북한을 알기위해 매년 수천억을 쏟아 붓는다. 그렇게 해서 수집한 정보도 내용 면에서 결코 황 선생을 능가할 수 없었다. 그는 김정일의 속내까지 꿰뚫어 볼 정도로 북한을 속속들이 아는 독보적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황선생의 망명은 전대미문의 강압 속에서 터져 나온 불의에 대한 분연한 항거였다. 이 항거가 북한 지도층의 양심을 건드려 도미노 현상을 야기하고 이것이 북한의 변모를 초래하는 역사적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도 당시 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 이후 정부는 그런 역사적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지닌 북한에 대한 귀중한  정보와 지혜를 모두 사장시켰다.

 이제 우리는 황 선생이 “그 까짓 놈” 이라고 표현한 철부지 김정은이 위협적으로 펼쳐지는 열병식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광경을 목격 하고 있다. 이런 반문명적인 기가 막힌 북한의 작태는 황선생의 생애를 더욱 덧없고 슬프게 만들고 있다.

 그는 이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어 영면하고 있다. 황장엽 선생이 북한의 강압 체제를 도와준 사람이고 또 한국 사회 기여한 바 없음을 들어 국립현충원 안장을 적절치 않다는 비판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고양시킨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측면만 보아도 현충원 안장은 과도한 예우가 결코 아닐 것이다. 현충원은 궁극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다 산화 하거나 이를 위해 공헌한 분들이 영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 황 선생은 북한 체제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출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북한에서 태어나 열심히 살아서 그 체제에서 출세한 것을 독재 체제에 기여한 것으로 재단하고 비판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북한에서 산 모든 사람을 작으나 크나 북한 독재체제에 기여한 사람으로 싸잡아 평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황 선생은 그 체제에서 끊임없는 양심의 갈등을 느끼며 살다가 종국에는 우리 민족의 미래는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있다고 확신하고 망명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의 망명 결단으로 대한민국의 체제 가치는 크게 고양되었으며, 특히 2300만 명의 북한 주민의 의식을 일깨우는 충격의 역할을 했다. 자신의 안위를 희생 하면서 그는 자유의 씨앗을 북한 주민의 의식 속에 뿌린 것이다. 지금은 억압 속에서 그 씨앗이 잠재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분명 싹을 틔울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사람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 행복의 증진을 꿈꾸어 온 사람이었다.

 최근 “남자의 조건”이라는 TV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노래가 있다. 과거 “미숀” 이란 영화에 삽입되어 있던 “넬라 환타지아” 라는 노래다. 그 노래는 환상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춤추고 인간애가 가득한 바른 세상을 꿈꾼다는 노랫말을 가지고 있다.

 결국 황 선생은 북한의 “넬라 환타지아”를 꿈꾸어 온 사람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던졌다. 그의 이러한 염원, 열정, 희생은 마땅히 기려져야 한다. 1970년대 미국으로 망명한 솔제니친은 소련의 폭압정치의 실태를 지속적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망명자의 과장일 것'이라는 일부 서방 세계 사람들의 비판에 절망하여 그는 “믿기지 않는 것을 믿는 데는 용기(Courage to believe)가 필요하다”고 한탄했다. 황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솔제니친과 같은 실망을 경험하면서 지냈다.

 그가 떠난 지금 솔제니친이 말한 “믿는 용기”를 다시 떠 올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북한의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북한에 “넬라 환타지아”가 실현되도록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그가 남긴 유지(遺志)일 것이다.(konas)

이병호(전 안기부 차장/울산 대학교 초빙 교수)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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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국인    수정

    지금 대한민국이야말로 '믿는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10-10-21 오전 6:10:01
    찬성0반대0
  • hrc42    수정

    황장엽선생의 넬라 환타지에의 꿈은 이루어질것이다. 소위 친북좌파와 종북세력들은 3대에 걸친 북한의 세습 폭악 독재정권에 맹종하는 허망의 꿈에서 깨어나야 할것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10-10-20 오후 2:29:31
    찬성0반대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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