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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라 위해 목숨 바쳐 싸울수 만 있다면...”

‘언제쯤이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내 나라말을 원없이 실컷 말하고, 내 나라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며 대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Written by. 채혜미   입력 : 2013-11-17 오전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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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군복을 입는 사람들’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사는 싱가포르에서 최근에 용병으로 취업을 온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국민소득이 낮은 모국을 등지고 가족과 함께 직업 군인으로 싱가포르에 취업을 한 그는 지금 좋은 대우를  받으며 만족하며 지내고 있지만, 장기간 용병생활을 하고 난 후 모국으로 돌아가야 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장기 계약을 마친 후 본국으로 돌아갈 그에게서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정체성과 적응 문제인데, 외국의 군대생활에서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누구를 위해서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그간 받아온 정신훈련이 가져올 정체성의 혼란이 언젠가 모국에 돌아가서 생활을 해야 할 자신을 무척 힘들게 할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군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전투의 기술만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조국애를  바탕으로 한 정신교육이 수반 되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용병이라 할지라도 그간 다른 나라에서 받은 교육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정체성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그의 고뇌에 대해 나는 깊은 이해와 공감을 하게 되었다. 군대 근처에도 안 가본 내가 그를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가서 싸워야 했던 나의 아버지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그를 통해서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경우는 다를지라도 적국의 군대 생활을 했던 아버지에게 있어서 일본 군복은 단지 옷만을 의미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마음 한편에 묻어두고 일본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을 강요당했다는 것이 평생 동안 아버지를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눈물

 지금은 고인이 된 아버지는 평소에 밝은 성품과 유머러스한 면을 가진 분이셨다. 그렇지만 약주 몇 잔을 드신 날은 가끔 울먹이시면서 젊은 날의 가슴 아팠던 기억들을 쏟아 놓곤 하셨다. 목이 메어 끝까지 다 부르지도 못하던 노래 ‘울 밑에선 봉선화’와 ‘선구자’를 부르던 40여 년 전의 아버지의 모습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오늘날 나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나의 아버지가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강요받으면서 받은 고통은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이었는지를 아버지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서 익히 들어왔다.

 한국 이름 석 자를 가슴에 묻어두고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 일본인 교사가 교단에서 한국을 비하하는 말을 서슴없이 해대어도 묵묵히 참고 들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학창시절의 아픔들... 독립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대한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애썼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조차 한국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친구들끼리라도 서로 한국말을 쓰는 것이 눈에 띄면 누구를 막론하고 일본인 선생한테 고자질을 하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단지 한국말을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무실에 불려가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호된 벌을 받아야만 했던 아버지는 그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통해  나라 잃은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그때 소원은 ‘언제쯤이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내 나라말을 원 없이 실컷 말하고, 내 나라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며 대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이었다고 한다. 하긴 태극기마저도 가슴 졸이며 남몰래 꺼내어 봐야 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의 해방의 염원은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일본 군복을 입어야 했던 아버지

 일제강점 초기인 1917년에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중학교 때부터 고향을 떠나 서울의 보성고보(현 보성 고등학교의 전신)에 유학을 와서 학업을 마친 후 가업을 잇기 위해 다시 고향 원산으로 귀향을 했다.

 낮에는 과수원을 돌보고 밤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할 날을 꿈꾸며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야학과 한국인의 얼을 되살리는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러한 행적이 드러나 일본 순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유일한 탈출구로 일본으로 도피성(?) 유학을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보다 뒤늦게 시작한 일본 유학이었지만 법을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서러움을 당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변호하겠다던 꿈을 가지고 고학을 하며 졸업을 앞둔 아버지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2차 대전의 발발이었다. 긴박한 전시상황에서의 징집명령은 유학생들에게 결코 예외가 있을 수 없었기에  아버지는 ‘학도병’이라는 이름하에 일본군복을 입고 전장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꿈이 산산 조각이 나 버린 채 강제징집을 당하여 신체검사를 마친 후에 만주 벌판으로 배치를 받은 아버지는 일본 군복을 입고 일본 군가를 부르며 행진을 하는 그토록 자신이 증오했던 일본 군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고백은 당시 한국인이 일본의 군복을 입고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내 나라 군복을 입고 내 나라를 위해 싸운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며  당장이라도 벗어 버리고 싶었던 일본 군인으로서의 삶이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수치심과 죄책감과 자괴감은 아버지를 평생토록  괴롭혔다.

 일본으로 떠난 막내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할머니는 아버지가  ‘학도병’에 끌려가 만주벌판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앓아 누우셨다고 한다.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죽지 못해 이곳저곳의 전쟁터로 끌려 다녔던 아버지.... 또 그 때 함께 했던 한국인 학도병들이 일본 군인으로서의 전장에서 맞이한 의미 없는 그러나 가슴 아픈 동료들의
주검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2차 대전이 일본의 참패로 끝나는 바람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없애고 싶었지만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의 모든 삶속에 녹아 있는 일본과의 연결된 기억들은 쉽게 지울 수 없었다.

 또한 눈과 귀와 입이 있어도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로 살아야 했던 그때의 아픔은 평생토록 가슴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뼈아픈 기억으로 평생 안고 사셨던 아버지의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이는 다음 세대로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쓰라린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은 성인이 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 나라 군복을 입은 사람들

 나의 아버지에게는 군복무를 해야 할 단 한명의 아들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입대를 한 오빠가 대한민국의 군복을 입고 첫 휴가를 나왔다. 그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얼마나 흐뭇해 하셨는지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가는 군대이지만 아버지는 남다른 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내 나라를 위해 싸우는 대한의 군인이 된 아들을 보며 느끼는 남다른 감회는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맺혀 있는 한을 풀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 아들은 ‘남의 나라 군인이 아니라 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싸우는 대한의 군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감격의 마음은 그간 묻어 두었던 아버지의 아픔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불과 2세대 전에 겪었던 아픔들,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지키려 했던 내 나라, 내 땅, 내 언어와 민족혼을 과연  이시대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내 할아버지가 목숨을 다해 되찾은 나라 대한에서, 내나라 대한의 군복을 입고 당당히 내 땅 대한을 지키는 것은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이 이어 받아야 할 귀중한 정신이자 또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일 뿐 아니라 미래의 후손을 위해 남겨줄 가장 위대한 유산이 아니겠는가!

 최근에 내 주변에서 아들을 싱가포르 군대에 보낸 지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출퇴근 하면서 군대 생활을 너무나 편하게 하는 그분의 아들은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다른 나라 군대를  보내서 마음에도 없는 애국심을 강요받게 합니까? 몸은 편하지만 내 마음은 얼마나 괴로운지 아세요?”라며 부모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반면 싱가포르의 영주권을 포기하고 아들을 한국군대에 보낸 부모는 ‘이제 완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줄 기회로 평생 그가 한국인으로 각인될 가장 값진 유산인 군대를 경험하는 것을 고국의 선물로 받게 되었다’며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은 해외에 살다가 입대한 군인들을 위한 문화적응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논산 훈련소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내나라 군복을 입는다는 것은 단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그리고 내 나라를 지키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역할을 위해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당당함과 자존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 우리를 도왔던 우방을 향해 은혜를 되돌려 주는 보은의 마음을 실천하는 것은 세계 속의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며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인류애를 실천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해외에 사는 대한의 아들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konas) 출처: 월간자유

채혜미 (싱가포르거주 재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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