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범은 낭인 아닌 일본군 미야모토 소위"
광복 70주년이자 을미사변 120주년이 되는 올해, 명성황후를 칼로 참혹하게 찌른 시해범은 지금껏 알려진 익명의 '일본 낭인'이 아니라 당시 일본군 경성수비대 장교였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역사서가 출간됐다.
이종각 동양대 교양학부(한일관계사) 교수는 저서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를 통해 을미사변의 주범이 일본군 현역 장교였음을 밝혀냈다.
이 교수는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던 일본 정부가 왕비 살해라는 막중한 임무를 깡패나 다름없는 낭인패들에게 맡겼을 리가 없다는 의문에서 출발해 자료 탐색에 나섰다.
이 교수가 명성황후의 직접적 시해범으로 미야모토 소위를 지목한 결정적 단서는 을미사변 당일에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가 본국의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우치다 사신'에서,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라고 언급한데서 비롯됐다.
사건 발생 후 뒷수습에 깊숙이 관여했던 우치다 영사는 이 비밀 서한에서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모두 4명의 소위가 있었는데 그중 살해 현장에 난입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미야모토 소위였다고 이 교수는 밝힌다.
우치다 영사는 사건 한 달 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公電)에서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라고 증언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육군사관' 역시 미야모토 소위다.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 뒤 본국으로 소환된 뒤 참고인 조사를 대충 받았고, 다시 1년 9개월 후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마야모토를 (타이완으로) 보낸 배경에는 그가 일본에서 계속 생활할 경우 을미사변에서 자신이 한 역할을 발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야모토는 타이완 항일투쟁자들과 교전중 사망하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웃나라 왕비를 살해한 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다른 전사자와 합사해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으로 모시는 사실이 훗날 밝혀질 경우 국내외로 큰 물의를 빚을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을미사변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미우라 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은 사건 3개월여 만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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