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체험 수기⑨] 모범장병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영주권’ 부문 입선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성필아,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말 몰라? 꼭 말을 해줘야 알아?” 선임의 호통에 나는 재빠르게 움직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항상 그랬듯이 나는 눈치가 부족했고, 나는 또 다시 못난 신병으로 낙인찍힌다.
“쟤는 미국물을 먹다 와서 그런가, 왜 이렇게 군대식 센스가 없냐?” 마치 들으라는 듯이 선임은 또다시 내가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미국물을 먹다 온 놈,’ 나는 전입을 왔을 때부터 그렇게 불렸다. 나를 그렇게 정의하는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미국 영주권자다. 인생의 큰 부분을 미국에서 살았고, 아마 전역 후에도 미국에 가서 생활을 계속할 예정이다. 그렇기에 한국식 문화, 그리고 군대식 문화는 내게 낯설게 느껴졌고, 사실 입대 전에는 알아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군대를 가게 될 줄이나 알았을까? 그렇기에 사람들은 나에게 항상 동일한 질문을 한다.
“너는 원래 군대 안 와도 되는데 왜 왔어?”
그러게 말이다. 나는 군대에 왜 왔을까? 며칠 전에 잡지를 보다가 영주권을 가지고도 자원입대를 결심한 어느 용사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이 사람은 거의 평생을 미국에서 살았으며, 29살의 어린 나이로 미국의 한 유명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연기하고 군 입대를 택했다.
그가 군대를 가게 된 이유는 단 하나, 한국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너무나도 멋있었다. 하지만 그뿐 만일까, 군대에서 적응을 잘 한 그는 분대장 견장까지 달고 분대원들의 존경을 받으며 대한민국의 훌륭한 모범장병으로써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얼마나 이상적인가? 나도 군 입대를 결정한 이유가 그렇게 영화 같았으면 어땠을까? 더 열심히 할 마음이 생겼을까? 하지만 내가 군대를 가게 된 이유는 위의 예시보다는 조금 덜 특별하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군대는 한국 남자라면 무조건 가야하는 곳으로 여기셨고, 나는 거의 떠밀려오듯이 입대를 하게 되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없어서였을까, 나의 군 생활 초기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나는 내 훈련소에서의 첫 아침점호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가사도 잘 모르는 애국가와 이해조차 되지 않는 육군 복무신조를 제창하면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군대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고, 솔직히 적응할 마음조차 없었다. 내가 한국 군대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 나가서 쓸 일이 있기나 할까? 원래 안가도 되는 곳이지 않나? 나는 미국에서 살 것인데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 속에서 나는 서서히 군 생활과 벽을 쌓고 있었고, 그럴수록 나는 군대라는 집단에서 조금씩 도태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봄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군 생활에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시간이 빨리 갈까? 어떻게 해야 체력단련을 빠지지? 몸 쓰는 것은 너무 싫다...’ 나는 작업을 피해 창고 한구석에서 정리를 하는 척을 하고 있었고, 하루 일과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방송으로 내 이름이 울렸다.
“채성필 일병, 지휘통제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지휘통제실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열이면 아홉은 내가 잘못한 일이 있거나, 내가 한 업무에 문제가 있을 때 내 이름이 불리기 때문이다. 나는 안 좋은 소식을 예감한 채 힘없는 발걸음으로 지휘통제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를 혼낼 준비를 하고 있던 선임도, 내가 한 일처리 때문에 피해를 본 담당간부님도 아니었다. 나를 불렀던 사람은 나의 분대장, 범수였다.
범수는 비록 나와 동기지만 나보다 10개월이나 군 생활을 더 했다. 그는 업무 면에서 완벽함을 추구했고, 나의 잘못된 행동들과 태도에 대한 지적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범수는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나와 조금 멀게 느껴지는 군기대장 같은 존재였다.
사실 나는 범수가 싫었다. 사소한 태도를 가지고 민감하게 지적을 하는 것이 짜증났고, 동기끼리 괴리감 느껴지게 행동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굳이 업무에 관한 일이 아니면 범수와 말을 하지 않았고, 그를 피해 다녔다. 그런 범수가 나를 불렀고, 나는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 하나가 들려있었고, 범수한테 다가가는 그 순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저 종이는 뭐지? 또 업무인가? 아니, 설마 나 영창가나?’ 나는 속으로 온갖 망상을 하며 종이를 보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범수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징계서도, 업무도 아니었다.
“모범...장병 나라사랑 캠프?” 모범장병 나라사랑 캠프는 국외 영주권자나 국외 시민권자 등 해외 자원입대를 결정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캠프였고, 영주권자였던 나는 지원여건에 부합했다.
“너 영주권자잖아, 이거 지원해서 붙으면 전국 방방곡곡 다닐 수도 있고, 휴가도 준대. 한번 가보면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범수는 나한테 캠프 공문을 건네줬고, 나는 이런 기회를 준 범수가 고마우면서도 다른 사람도 아닌 범수한테서 이런 기회를 받는다는 것에 대한 사실에 살짝 의아했다. 캠프의 이름 또한 나와는 맞지 않았다. 모범장병? 나는 모범장병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많은 선임들한테 미움을 받고 있었고, 군 생활에 열심히 임한 적도 없었다. 항상 몸을 쓰는 작업을 피해 다니기 바쁜 나였다. 범수는 무슨 생각으로, 내가 뭐가 예뻐서 이런 기회를 줬을까? 아무튼, 나는 캠프에 지원을 했고, 운 좋게 붙어서 바로 다음 주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는 국방부로 향했고, 그 곳에서 다른 참가자들을 만났다. 참가자들 중에는 나와 같은 국외이주자가 대부분이었고, 모두 자원 입대자였다. 하지만 입대를 결정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같이 아버지에 의해 등 떠밀려 왔고, 어떤 이들은 미래에 한국에서 살고픈 마음에 입대를 결정했다.
참가자 중에는 특전사 또한 있었는데, 그는 잡지에서 보던 남자같이 한국 남자로써 당연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존경스러우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집결 후, 우리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몇 번이나 방문했던 적이 있던 곳이었고, 아주 지루한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귀찮았다. 피곤하고 지루한 경험이 될 것이 뻔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거대한 광장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초록색 군복에 백색 태극기를 붙인 군인들 100여 명이 지나가자, 나는 모두의 시선이 우리한테 쏠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장학습을 나온 초등학생들은 급기야 우리를 보며 군인아저씨라면서 박수를 쳤다. 부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얼른 기념관에 입장했다.
박물관 내부에는 6.25전쟁 때 사용됐던 실제 무기와 그 시절 사용된 물품 등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전쟁 상황을 설명해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전쟁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불리한 상황이었는지, 북한이 얼마나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었는지 설명해주셨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또한 이야기 해주셨다.
정신교육이나 훈련소 때 수없이 접한 내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실제 무기들을 보면서 전문적인 설명을 들으니, 이론으로만 접했을 때보다 훨씬 전쟁 상황의 급박함과 긴장감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군대와 우리나라에 대한 지식이 많이 생긴 후에 방문한 전쟁기념관은 확실히 더 흥미로웠다.
특히 한때 우리 군단의 군단장님이셨던 백선엽 장군님께서 북한군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해 결국 UN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셨던 일화를 들으면서 우리 부대에 대한 자부심이 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람이 끝나고 박물관에서 나오자 또 다시 많은 시선이 우리한테 쏠렸다. 하지만 왜였을까, 더 이상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다.
둘째 날, 우리는 평택에 있는 제 2함대 사령부를 방문했다. 그 곳에서 먼저 제 2연평해전 때 실제로 사용된 참수리호와 그 바로 뒤에 있는 서해수호관을 방문했다. 참수리호에 박혀있는 총알자국을 본 순간부터 나는 내가 하게 될 견학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서해수호관은 NLL에서 우리나라의 해역을 지키다 전사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1999년도에 발발한 제1연평해전에서부터 불과 몇 년 전 있었던 연평도 포격도발, 그리고 천안함 피격사건까지 아찔했던 순간들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이 곳은 북한의 각종 도발에 의해 안타깝게 전사한 선배 전우님들의 유품까지 전시해놓고 있었다.
중사, 병장 그리고 심지어는 이등병의 계급으로 전사한 안타까운 이들의 사진을 보고 그것이 나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들은 많은 궁금증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을까?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그것도 아직 앞날이 창창한 20대에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故 한주호 준위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구조작전을 펼친 것일까? 서해수호관에서 접했본 NLL에서의 치열한 전투와, 그런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선배 전우님들을 보면서 군인으로써 나의 태도를 다시 한 번 성찰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우리는 피격된 천안함의 선체를 보았고, 나는 선체의 웅장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분 전에 봤던 참수리호 보다는 몇 배는 더 큰 크기, 하지만 그런 천안함은 북한의 도발로 인해 무자비하게 두 동강이 나 있었다.
그리고 발견된 증거물들, 어뢰의 표기법, 선체가 터진 방향, 그리고 외부에서의 충격 등은 모두 천안함의 침몰을 북한의 소행으로 가리키고 있었으나, 북한은 이를 뻔뻔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뻔뻔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우리나라와 국제사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만행을 참을 수가 없었고, 그런 북한에 의해 대한민국의 아들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나는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채 천안함을 뒤로했다.
마지막 날에는 아침부터 대전 현충원을 가는 일정이 잡혀있었다. 빡빡한 스케줄에 모두가 체력적으로 지쳐있었지만, 그들의 발걸음만큼은 힘차고 묵직했다. 버스에서 하차하자 웅장한 기념비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고, 군복을 입은 100여명의 모범장병은 현충문을 통과해 선배 전우님들을 맞이했다.
우리는 묵념을 드렸다. 훈련소 첫날에 내가 드렸던 묵념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진실된 묵념이었다. 6.25전쟁에서 싸우다 전사하신, 서해를 수호하다 전사하신, 그리고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다 전사하신 수많은 선배 전우님을 위한 묵념이었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부신 대한민국의 아들, 모범장병으로 성장해 있었다. 더 이상 군대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군대가 있기에 현재 나와 내 국가가 존재하고,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Freedom is not free라는 메시지를 기억한 채 짧지만 깊었던 캠프는 막을 내렸다.
캠프가 끝나고 휴가를 나온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대구로 내려가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산소를 방문했다. 6.25전쟁 참전용사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15년을 근속하시고 현재 국립 영천 호국원에 안치되어 있으시다. 사실 나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가 군대에서 15년을 근속하셨는지도 몰랐고,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군대에 몸을 담으셨는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알던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연구를 하셨고, 나는 그 사실이 더 멋지다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군복을 입고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뵌 순간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신 분들 중 한분이셨다는 사실은 어느새 나의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로 남아있었다. 나는 절 대신에 절도 있는 경례로 고마움을 표하기로 했다.
입대한지 6개월이 지난 지금, 아직도 군 생활은 쉽지 않고, 아직까지도 나는 ‘군대식 센스’를 완벽하게 터득하지는 못한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전역 후 미국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높고, 군대에서 내가 배운 기술이나 정보를 훗날에 사용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상관없는 듯싶다.
나를 위해 박수치던 아이들, 나의 할아버지께서 안치되신 아름다운 호국원, 그리고 나의 존재는 모두 선배 전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내가 미래에 살 곳이 어디든, 병역의 의무는 한국인으로써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복무로 인해 선배 전우님들께서 목숨을 바쳐 지켜나가신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을, 그리고 내 오른쪽 어깨에 붙어있는 태극기가 지켜진다고 생각하면,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군복의 무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진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항상 힘찰 것이다.
(육군 제3야전군 1군단사령부 141정보대대 본부중대 정작과 일병 채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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