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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체험 수기⑧]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 군대를 간다

Written by. 손윤   입력 : 2017-09-08 오전 11: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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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영주권’ 부문 입선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매일 밤 어둠이 짙게 내려앉던 2015년 말, 나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어쩌면 내 인생 전체를 뒤바꿔 놓을 수 있는 결정, 바로 군 입대였다. 13세 때 온 가족이 필리핀으로 이민을 가 고등학교 졸업까지, 그 후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UC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공부하던 내게 군 입대란 그저 막막했다.

 어언 10년 가까이 된 유학생활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소속감이 조금은 결여된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온실 속 화초 마냥 공부만 하며 자란 내가 군인이 된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랬던 내가 군 입대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내 주변사람들을 보고 얻은 간단명료한 깨달음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건아로서 국방의 의무는 틀림없이 선택 아닌 필수이지만,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유학생 친구들 대부분은 군 입대를 막연히 피하려했다. 사전에 국외영주권을 취득한 후 시민권이 나올 때 까지 입영 연기를 신청하는 수단은 물론이고,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미국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행위까지. 내가 속해 있던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라 그런 사람들을 폄하하거나 딱히 손가락질 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그 중 하나가 되고 싶진 않았다.

 몇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고로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군 입대를 해야 하는 것은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간단한 논리였다. 더군다나 군대를 갔다 온다고 해서 내 앞날에 불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망상 같았다.

 그렇게 나는 급하게 휴학을 하고 무더운 더위가 기승하던 2016년 8월 16일,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했다. 논산 육군훈련소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함께해 준 우리 아버지는, 약 30년 만에 다시 와보는 육군훈련소에 감회가 색다르다고 상기하셨다. 그러면서 군 입대를 결심해준 내게 슬쩍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을 돌려서 표한하기도 하셨다.

 헤어짐 직전에는 그동안 자주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보았다. 아버지의 눈가 주름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처음 보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정신없이 입영하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저 잠시 멀어졌을 뿐인데, 새삼스럽게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내 주변인들의 존재가 더욱 소중히 느껴졌다. 이때가 내가 군에 입대하길 잘 했다고 생각한 첫 번째였다.

 훈련소 생활은 말 그대로 신세계 그 자체였다. 일단 예상했던 대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집합해 있었다. 내가 입영한 훈련소 기수에는 나와 같은 국외영주권자 및 재외국민 자원병역이행자들이 많았는데, 그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다른 이유로 왔지만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멋진 전우들이 많았다. 군대라는 또 다른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단체생활이 가진 고유한 특성들까지. 모두들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서서히 적응해가는 우리는 서로를 보며 감탄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훈련소의 체계적인 훈련병 육성 시스템에 많이 놀랐다. 인터넷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군에 관한 부정적 이야기들이나, 8-90년대 군대를 다녀온 아버지 지인들에게 내가 입대 전 들었던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첫 1-2주차에는 신체검사 및 정신교육을 통해 스스로 정체성과 안정감을 확립할 수 있는 적응기간을 가졌고, 그 이후에도 수준에 맞는 훈련을 차차 받다보니 어느새 기본기가 탄탄한 군인이 되어있었다. 사실 고등학생 때 앓았던 기흉 병력으로 인해 신체등급 3급을 받아 체력적인 면에서 걱정이 많았었지만, 간부님들의 지도와 전우들의 배려가 큰 힘이 되었다.

 이런 신체적 결함을 알고 있던 나는 일부러 ‘분대장 훈련병’이라는 직책에 지원하여 다른 훈련병들을 따라가려고 조금 더 노력한 결과, 큰 고난없이 수료할 수 있었다. 분대장 훈련병을 하며 어깨너머로 본 조교들과 간부들은 안 보이는 곳에서 하는 일이 더 많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병들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조치하며, 지속적인 면담을 통해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느꼈다. ‘아, 군대는 우리를 단순히 전투력의 일부분이 아닌 국가의 재산으로 생각해 주는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주 동안 정이 쌓인 동기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또 다시 긴장하며 전입 간 곳은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제102기갑여단 기갑수색중대였다. 전산추첨으로 4.2" 박격포 주특기를 부여받은 것도 모자라, 설상가상 유난히 힘들다는 수색중대로 배치되었을 때는 다시 입대 전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대장님과 행정보급관님을 비롯한 간부님들이 신병인 나에게도 가족같이 대해주어 한결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바다에서 여의주를 품고 올라온 해룡을 내 오른쪽 가슴에 새겼을 때, 나는 비로소 진정한 군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내가 입대할 때 훈련소에서 품었던 뜻을 되새기며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좌절하지 않고 내 주특기 실력 향상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서먹했던 동기들에게도 먼저 말을 걸고, 선임들에게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서서히 문화적 차이와 다른 관념으로 인한 마찰을 줄여나갔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흉장의 무게를 견뎌내기란 힘들었다. 바로 기흉의 여파, 지니고 있던 신체적 아픔의 벽은 끝내 넘지 못했다. 수차례의 훈련 간 장갑차 탑승 때마다 가슴통증을 동반한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간부님께서는 바로 중대님께 보고를 해주셨고, 추후 행정보급관님과의 상의 후에 보직 변경이 결정되었다.

 나를 중대본부 ‘인사행정병’ 이라는 직책을 중대 자체적으로 부여하시면서, 행정보급관님은 내가 단순히 아파서가 아닌, 내 잠재력을 더 발휘할 수 있어서라며 격려의 말도 빼놓지 않으셨다. 이렇게 누구라도 신체조건을 고려하여 중대 자체적으로 유연한 보직 변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중대원들 모두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그 후 나는 중대원들과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전투소대원들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한 발짝 뒤에서 지원하며 협동과 소통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깨우치게 되었다.

 지난 3월 한 달 동안은 매우 새로운 경험을 했다. 새로 전입한 분대 후임 중 한 명이 검정고시 공부 및 응시를 희망하였는데, 중대 내 멘토로 내가 선정 된 것이다. 여단에서는 필요한 교재와 학습 자료를 제공했고, 중대에서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과 여건을 보장했다. 덕분에 후임병과 나는 시험 날짜인 4월 초에 대비해 3월 전체를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 안에 7가지 과목을 모두 준비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여단 차원에서의 지속적인 관리와 중대 자체적 중간 점검 등을 통해 결국 후임병은 평균 80점대라는 훌륭한 점수로 짜릿한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다. 좋은 결과로 우리가 얻은 포상휴가도 기분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루지 못했던 오랜 바람을 군에 와서 달성한 후임병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매우 보람차고 뿌듯했다. 군인임에 동시에 사회원으로써 진정한 자기계발과 정신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 바로 군 생활이었다.

 지난 5월, 나는 가족이 아직 거주하고 있는 필리핀으로 첫 정기휴가를 다녀왔다. 처음에는 과연 내가 군인 신분으로 국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이 있었지만, 여단 인사처와 국군재정관리단의 적극정인 지원으로 휴가여비까지 전액 지급받으며 수월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이는 국방부 훈령으로 명시가 되어있으며, 매 정기휴가 때마다 보장이 되기 때문에 필리핀 재외국민인 나로서는 상당히 안심되는 부분이었다.

 13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휴가를 다녀오면 흔히 말하는 ‘후유증’이 있을 것 같았지만, 막상 다녀오니 내 정체성과 내 현재 본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입대전의 나를 잊지 말고, 입대 한 후 현재의 나로써 최선을 다하며, 전역 한 후의 나를 그리며 현 임무의 충실한 내가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우리는 연평도 포격도발과 천안함 피격사건, 5차 핵실험을 겪으면서 북한의 대남 적화야욕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UN안보리의 7차 대북 제재 채택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열악한 경제 상황을 개의치 않고 비대칭전력 증강에 혈안이 돼 있다.

“ 知彼知己 百戰不殆 ”

 우리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의 당부를 잊지 말고 적의 실체와 의도, 능력을 명확히 알고 완벽한 대비 태세를 갖춰 국가와 국민을 수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39조에 명시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이다.

 지금 내 주위에도 내가 2015년 말에 섰던 기로에 선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내가 그들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현재 오른쪽 어깨에 태극기를 단 국가대표로써 진정한 국위선양을 하며 느끼는 이 자긍심은 가히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21개월이라는 청춘을 국가와 국민을 지키며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나게끔 바치는 일보다 더 값진 일이 있을까? 군에 오면서 내 미래에 대한 비전은 더 확고해졌고, 수많은 배움과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의 끝은 대한민국일 것이다.

(육군 제1야전군 제8군단사령부 제102기갑여단 일병 손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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