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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체험 수기⑥] 나의 조국은 내가 지킨다.

Written by. 양원모   입력 : 2017-09-08 오전 1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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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2017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영주권’ 부문 장려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고요한 새벽은 주변의 이슬람사워들의 기도 소리로 깨어난다. 누구에게는 낮선 이국땅일지 모르는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는 내가 태어나고 20년간 자라온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인도네시아 언어를 사용하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자라며 평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2017년 5월 현재 논산 육군훈련소 30연대 3교육대 12중대 3소대 3분대의 분대장으로 복무하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었다.
 
1) 나의 배경
 나는 인도네시아의 가장 큰 섬인 보르네오섬의 외진 마을에서 태어났다. 제대로 된 산부인과도 없던 빵갈란분 이라는 도시에서 검은 피부의 낯선 외국인 간호사들에 에워싸여 태어났다. 아버지가 인도네시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한국기업에서 일하시게 되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서 신혼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내가 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선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 위치한 본사로 발령이 나게 되어 온 가족이 자카르타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자카르타에는 비교적 큰 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 나의 친구들 중 다수가 한국인들이었지만 생활하는 방식은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다를 것 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길거리에 파는 장난감들을 사서 같이 놀고 근처 와룽(매점)에 들어가 인도네시아의 짜빠게티라고 불리는 미고렝을 먹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쇼핑몰에 놀러가 영화도 보고 근처 싸구려 당구장에 놀러가 현지인들 사이에서 당구도 즐겨 치고 인도네시아의 한강이라 불리는 안쫄에 가 휴식을 취하고 오기도 하였다.

 배고플 때면 집 앞의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현지 음식을 먹고 저녁엔 친구들과 인도네시아식의 포장마차에 삼삼오오모여 앉아 야식을 먹었다. 여느 인도네시아 청소년들처럼 우리도 그들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해왔다.

 이렇듯 나의 모든 부분에서 국적이 한국인 것을 제외하면 한국인들과 공통되는 부분을 찾기 힘들었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주변인들과는 다른,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한국이라는 단어가 내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다만 어린 마음에 한국은 더 좋은 시설들이 있고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내가 할머니라고, 할아버지라고, 그리고 삼촌이라고 부르며 좋아했던 친척분들이 살기 때문에 한국이 좋았다.
 
 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찾게 도와주신 건 다름아닌 부모님 이셨다.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나와 내 형제들을 생각하신 부모님께서는 방학기간 동안 최대한 한국을 많이 접하게 해주셨다. 한국을 방문하는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나 또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었다.

 가끔 주위에 보면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외국에 오랜 기간 머무르다 보니 한국어를 모르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친구들이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모님은 많은 노력을 하셨다. 한국과 친밀해질 수 록 조국이라는 개념이 나의 머릿속에 더욱 더 뚜렷해졌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졌다.
 
2) 입대전 의 나
 나와 같이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오랜 기간 체류한 재외국민이나 해외동포들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행하는 병역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특징이 있다. 어렸을 적 나는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마냥 좋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 입대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정은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20년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게 해 준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 너무 감사하였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게 되어 한국에서 살며 우리나라의 소중함을 느끼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조국을 선물해 주신 선조들의 은혜를 갚고 나라를 굳건히 지켜 미래의 후세대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해주기 원해 나는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결심에 주변의 많은 이들이 반대하였다. 굳이 안해도 될 고생을 자청해서 하냐며 걱정어린 질문을 하였다. 나의 결심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하였고 주변에 비슷한 친구들이 국적을 바꾸어 나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보며 병역의 의무를 기피할 수 있는 유혹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기에 유혹은 커져만 갔다.

 완전히 내 마음을 굳히게 되었던 계기는 평범한 하루 중 생기게 되었다. 한창 시험기간 때문에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온 날이었다. 시계바늘은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고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중 내 앞에 펼쳐진 매우 평범한 장면을 보았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하였고 도로에는 출근하는 사람들, 학교에 가는 학생들, 그리고 햇빛에 비친 건물들이 보였다. 매일 보던 풍경 안에서 나는 저런 평범한 하루가, 그리고 건물들에 쓰인 우리나라의 한글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아름다움이 지속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 곳곳에서 조국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과 함께 우리나라를 지키고 싶었다.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입대의 뜻을 밝히자 매우 좋아하시며 대견해하셨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전부터 군대를 가지않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항상 말씀하셨지만 나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었다. 내가 입대를 결심한 후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군대에 있었을 때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으며 어머니는 입대 절차 밟는 것을 도와 주셨다.

 만난지 6개월이 된 여자친구 또한 나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입대를 하게 된다면 21개월동안 자주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그 전과 달리 많이 하지 못해 자신이 힘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잘 기다리고 있겠다고 응원해 주었다.
 
3) 입대 후 의 나
 자원병역이행자들은 입대 날짜를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조그마한 특혜가 주어진다. 나는 날씨 좋은 가을을 입대일로 정하고 논산육군훈련소에 2016년 9월 19일에 입대하게 되었다. 훈련병으로서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있던 나에게 뜻밖의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육군훈련소 분대장 선발자가 되었던 것이다. 육군훈련소 분대장이란 조교를 의미하는데 몇 년전부터 명칭이 바뀌었다. 나에게 조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나에게 조교란 매우 먼 거리의 사람들이었다. 살면서 조교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한적이 없을뿐더러 그러한 기회를 받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건장한 체격에 항상 무표정으로 냉담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오로지 군대와 교육만 생각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훈련소에서는 분대장이라는 보직을 설명해주고 나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터이니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였다. 그 하루 동안 많은 생각을 하였다.

 내가 군대에 들어 온 목적과 어떠한 군 생활을 하려고 하였는지 다시 되새김질 하였다. 오랜 생각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조교가 되는 것이었다. 호기심이나 남들에게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육군훈련소는 우리나라 70%의 군인들이 거쳐 가는 훈련소다. 장차 우리나라를 지킬 군인들의 첫 단추를 내가 잘 꿰어주어 나라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이행해야 되는 보직인만큼 조교가 되는 과정은 체력검정과 소대장님부터 준장이신 훈련소 참모장님까지 여섯분과의 면담을 무사히 통과해야 가능하였다. 그렇게 두 달 정도의 조교 선발 및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는 비로소 30연대 12중대 3소대 4분대장이 되었다.

 교육과정을 통해 훈련병들을 통제하고 교육을 진행하는 방법을 배우고 수도없이 연습하였지만 막상 투입되어 훈련병들을 마주하니 좀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론으로만 배우다 직접 엄청난 수의 훈련병들을 통제하려니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투입되기 일주일 전에 중대 내에서 탈영한 훈련병이 있어 현실을 직시하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내 어깨에 있는 초록색 견장을 보며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투입되고 나서 나는 분대장 선발과정이 왜 그렇게 많고 복잡하며 까다로웠는지 알게 되었다. 분대장이 되면 조교모와 초록색 견장을 부여받는다. 견장의 의미는 내 밑으로 부하들이 있다는 것이며 그만큼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상징이다.

 보직의 명칭은 분대장이지만 통상 모든 분대장들은 한 개의 소대를 통제한다. 한 소대에는 54명의 훈련병이 있고 소대당 4명의 분대장들이 배치되어 훈련병들을 통제하는데 자신의 분대를 넘어 자신의 소대를 신경써야 된다. 막 입학한 학생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54명의 훈련병들을 한명 한명 가르치고 교육하고 통제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역으로 입대한 훈련병들은 총 6주간의 훈련 과정을 밟는다. 군대 예절부터 시작하여 정신교육, 경계, 화생방, 구급법, 수류탄, 사격, 그리고 각개전투까지의 교육을 받는다. 분대장들은 각자의 분대를 책임지고 모든 교육과정을 교관화를 통해 교육하고 훈련병의 모든 생활과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한다.

 매일 같이 훈련병보다 30분 일찍 5시 반에 일어나고 모든 일과가 끝난 후 훈련병들이 자는 것을 확인한 후에 생활관으로 가 취침을 할 수 있다. 아픈 훈련병이 있으면 이른 아침이건 늦은 새벽이건 일어나 훈련병들을 부대내의 병원으로 이송하고 잦은 면담을 통해 훈련병들의 상태를 매일같이 확인한다. 그러므로 분대장들은 개인 정비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나와 모든 분대장들은 모두 전군 1%라는 자긍심을 갖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힘든 경우 나는 초심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54명의 훈련병들은 각각의 살아온 삶의 방식이 다르고 성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유로운 삶을 살다 온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맞이한 나의 모든 행동들에 대한 통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군대에 있는 동안 인내심과 이해심이 태평양 만큼이나 넓어졌다.

 어떠한 지시를 내리면 어떤 훈련병들은 알아서 잘 따라오는 반면 어떤 훈련병들은 무엇을 해야 될지 몰라하며 그저 챙겨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훈련병들도 있다. 우리의 임무는 모든 훈련병들이 전투가 가능한 병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훈련병들까지 모두 이끌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목표를 도달하게 한다. 교육 외에 막사에서의 일상생활에서도 분대장들의 임무는 계속 된다.

 항상 어딜 가든 훈련병들이 전우조를 잘 지키며 다니고 있는지, 군대 예절에 맞게 수건이나 세면백을 왼손으로 파지하고 다니는지, 그리고 상급자에게 경례는 규범대로 하는지 쉴새없이 확인한다. 이렇게 6주간 반복되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찾아오기 마련이고 분대장을 하며 훈련병들에게 화가 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럴때마다 나도 많은 실수를 했던 옛 훈련병 시절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인내심을 갖고 상황을 이해시키고 조언이나 충고를 주곤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것은 당연 하였기에 초심을 잃는 상황이 가끔 발생하였다. 실제로 내 동기중 한 명은 이것을 이기지 못해 분대장을 그만두고 야전으로 전출가기도 하였다. 항상 내 초심을 다시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훈련병들 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훈련병들이 훈련을 통해 사격을 12발 이상 명중하고, 신원 미상의 인원에게 수하를 실시하고, 심폐소생술과 지혈을 할 줄 알며, 수류탄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표적을 향해 정확히 던질 수 있으며, 방독면 착용을 9초안에 완벽히 하고, 각개 전투장의 지형지물과 장애물들을 내가 교육한 내용을 토대로 능수능란하게 통과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느껴보지 못했던 뿌듯함을 느낀다.

 이동 중에 발도 맞추지 못하고 오합지졸이 따로 없던 훈련병들이 군기가 들어 제식을 맞추고 이동하는 것을 보며 아빠 미소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나와 같은 분대장들에겐 자신의 훈련병들이 제대로 된 군인이 되었을 때 보다 더 보람찬 것은 없다. 그렇게 한 기수를 끝내며 훈련병들이 이등병이 되고 그들을 열차에 태워 보낼 때에 나는 서운함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내 조그마한 능력으로 우리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 것 같아 매우 기쁘다.

 자원병역이행자로서 나의 군생활은 매우 만족한다. 입대하기 전 나는 과연 선임들이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여태껏 자라온 나를 선입견이나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을지 걱정도 하였다. SNS나 주변인들을 통해 들은 군대는 부조리가 난무하고 선임들 때문에 매일 눈치 보고 살아야 되는 곳 이었다.

 하지만 자대에 와 보니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대로 전입하게 되었을 때 모든 선임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다 비슷한 질문인데 주 내용은 나의 국적과 군입대를 하게 된 이유였다. 나의 배경을 다 소개하고 나면 다들 나를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내가 재외국민인 것을 알고 나서 선임들은 외국에서 살다온 나에게 생소하거나 이해하지 못 하는 한국의 문화나 현상들을 모두 차근차근 설명해주었고 이해시켜 주었다. 그러하여 고마운 선임들의 배움으로 나는 별다른 이질감 없이 완벽히 자대의 분위기에 흡수될 수 있었다.

 나는 재외국민으로서 군대에 와서 배운 것이 참 많았다. 분대장으로 근무를 하면 두 달에 한번씩 중대에 216명 정도의 훈련병들이 들어 온다. 현재 나는 네 개의 기수를 했으니 대략 864명의 훈련병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면담을 하면서 나는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각각의 인생 이야기를 듣거나 행동을 보며 각기 다른 한국인들이 사는 방식, 그 지역의 특성, 말투 등등의 다양한 한국인들을 배울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각기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후에 한국에서 취직을 하며 살 계획인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재외국민으로서 내가 군대에서 얻은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애국심과 자긍심이다. 재외국민들에겐 애국심이 생소한 개념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있을 수 는 있지만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발견되기 극히 드물다. 군대에 들어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우고 어떻게 지켜져 왔는가, 그리고 왜 지켜져야 되는가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도 배우고 몸으로 직접 느끼면서 배울 수 있다. 내가 있음으로, 내 옆의 전우들의 있음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안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4) 나의 동료들에게
 많은 동포들이나 재외국민들은 분명 나와 같이 군 입대를 앞두고 많은 갈등을 할 것이며 몇몇은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갈 것 이다. 나는 밑으로 남동생이 두 명이 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입대를 두고 고민하는 중이다. 나는 그들에게 입대를 강요하거나 내 주관적인 생각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군대를 경험해보고 더 일찍 그러한 고민을 한 선배로서 그들에게 했던, 그리고 입대를 두고 고민하는 재외국민 동료들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조국과 선조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한다면 입대는 현명한 선택이다” 라는 것이다.

(육군훈련소 30연대 12중대 일병 양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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