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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칼럼] 나라를 살린 한마디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 백선엽 장군과 한미동맹-
Written by. 박춘우   입력 : 2023-07-06 오전 9: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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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이자 6·25전쟁 73주년이다. 7월 10일이면 6·25 전쟁영웅이자 “영원한 노병”, “호국의 별”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이 100세의 나이로 서거한지 3주년이 된다. 73년 전의 전쟁을 회고하면 먼저 백선엽 장군과 같은 이들의 희생이 떠오른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그들이 바친 생명의 대가다. 

 故 백선엽 장군은 평남 강서 출신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몹시 가난한 시절을 보내다가 만주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5년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를 마친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 ’49년 5사단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30살의 젊은 나이로 제1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백 장군은 1,129일간의 전쟁에서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탁월한 공적을 세웠다. 국면을 전환시킨 주요 전투는 서울 방어작전(문산, 고랑포), 다부동지구전투, 평양탈환작전, 현리전투, 금성지구전투,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등이다. 그는 6·25전쟁에서 기념비적인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불세출(不世出)의 장군이다.

 전쟁 초기, 백 장군은 서울 방어와 지연전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최후방어선이며 워커라인으로 불린 낙동강 전선은 “지키느냐! 죽느나!(Stand or Die)”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이었다. 이때 백 장군은 제1사단장으로서 1950년 8월 대구 북방의 다부동지구전투에서 3개 사단의 북한군을 저지해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백 장군은 이 전투에서 공포에 질려 후퇴하는 부하들에게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며 돌격에 앞장서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희생과 헌신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백 장군이 미 제27연대장 존 마이켈리스 대령에게 “같이 공격합시다”라고 한 말과, ’51년 2월 맥아더 장군에게 “we go together” 라고 한 말은 오늘날 한미동맹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적 구호가 되었다.

 1950년 10월, 국군 제1사단은 평양탈환 작전에서 중요한 도로와 요충지를 점령해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다. 정전협정 체결 1개월 전인 1953년 6월 금성지구 돌출부 전투에서는 미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의 요청으로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전략적 방향을 설정하며 직접 참전하여 중공군의 금성지구 공격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백 장군은 두 차례의 육군총장 역임, 지리산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 구성, 2군단의 재창설, 휴전 회담시 한국측 대표단 등으로 활동했으며, 꾸준하게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 한국군 증강계획을 추진했다. ’53년 1월 33세의 나이에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54년 2월에는 동양 최초로 제1야전군사령부를 창설하여 미8군으로부터 155마일 휴전선을 인수받아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백 장군은 부산 5연대 근무때부터 1,000쪽이 넘는 미 군사교범을 읽고 미군과 소통했다. 미군은 그런 그를 신뢰했다. 백 장군은 6·25전쟁 간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맥아더, 리지웨이, 벤플리트, 밀번, 테일러 등 세계 최고의 지휘관들과 함께 작전을 벌이면서 군사작전과 치밀한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미군의 부대 운용방법을 배워 그들과 폭넓은 접점을 형성했다. 그랬기에 미군도 백 장군을 존경했다. 2013년 8월 주한 미 육군은 그를 미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에 취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가 일종의 ‘전입신고’를 하는 게 관례가 될 정도로 그는 한미 군사동맹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6·25발발 60주년이던 2010년 백 장군의 ‘원’수 계급으로의 추대는 무산됐고, 사망 이후 현충원 안장을 두고 논란이 발생한 것은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백 장군이 일제의 강압적 체제 하에서 일본군에 잠시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 존폐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역사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정권에 따라 영웅에 대한 대우가 달라져서도 안된다. 그나마 한미동맹 70주년이자 6·25전쟁 73주년을 맞아 한-미 양국 정부가 백 장군을 6·25전쟁 10대 영웅으로 선정하여 그의 공적을 재조명하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지난 6월 30일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출범한 것도 다행한 일이다.

 3년 간의 치열했던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한미동맹 시대를 여는 데에도 백 장군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53년 5월 미군 초청으로 방미시,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해 "전후 미군 철수 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아이젠하워로부터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해도 좋다"는 언급을 받아냈다. 전쟁에서는 미군과 함께 싸워 적을 막고, 전후에는 미군과 끈질긴 교섭으로 대한민국 안보의 기틀을 다진 그에게는 '최고의 승부사'라는 지칭이 어울린다.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과 70년 역사의 한미동맹을 만들어 낸 것이다.

 1·2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의 최고 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영국의 처칠 수상은 “함께 싸울 연합이 없는 것은 그들과 함께 싸우는 것보다도 더 나쁜 일이다”라고 말했다. 하나의 화살은 쉽게 부러지지만 여러 개의 화살은 잘 부러지지 않는다. 6·25전쟁의 포화를 뚫고 혈맹으로 태동한 한미동맹은 지난 70년에 걸쳐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으로 발전해 왔다. 한미동맹은 과거 안보 위주의 수혜적인 군사·안보동맹에서 한미 FTA를 기점으로 한 경제동맹으로, 기술패권과 혁신이 국력을 좌우하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사이버·우주·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기술동맹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북핵, 팬데믹, 교역질서 변화, 기후위기 등 글로벌 복합 위기 속에서 파트너십을 발휘하며 자유·민주주의·인권 등 핵심가치 공유하는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진화,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미동맹은 가치동맹의 주춧돌 위에 안보·경제·기술·문화·정보동맹의 다섯개 기둥을 마련했다. 이는 한미 양국이 21세기 다양한 도전과제에 함께 대응하면서 전 세계의 자유와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동맹으로 새로운 70년을 향해 전진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미동맹은 지구상 가장 성공적인 혈맹이다. 앞으로도 한미동맹이 국익을 증진하고, 나아가 북핵문제, 미중관계의 변화 등 다양한 위협에 공동으로 협력을 강화하면서 ‘미래로 전진하는 행동하는 동맹’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박춘우 화신사이버대학 교수(재향군인회 안보교수)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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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rusader(crusader)   

    @ 좌빨-MH정권시절...6.25날 아침 9시에인가...KBS에선~??ㅎ == [노근리-양민학살 사건~!] 뭐? 이런~ 반미-방송선동전이...625날 아침에 버젓이~ 나오니...적화됫구나~ 생각햇단다!!ㅎ P.S) [반-서방파] == "우리-민족 제일주의파"-애들은...조아라 한거 아닐까~???ㅎㅎㅎ

    2023-07-06 오전 11: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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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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