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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그 고토에 서서

Written by. 김종해   입력 : 2013-10-17 오전 1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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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국방일보 10월17일자 16면 ‘오피니언’란에 게재된 글임.(편집자 주)

  이제 북간도(北間道)에는 이른 겨울이 몰려 올 것이다. 거의 없다시피 한 봄 턱을 넘어서면 맹렬한 여름의 초록이 점령군처럼 몰려왔다가 몇 번의 소나기와 함께 변모를 재촉하다 짧은 가을과 함께 길고 긴 북국의 겨울이 꼬리를 물고 들어와 침잠의 계절로 들어서게 된다.

 북간도의 겨울은 일찍 왔다 늦게 간다. 해서 짧은 여름의 일상은 그 긴 겨울나기의 준비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북간도 토인들이 영위한 삶은 그래서 척박했다.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여세를 몰아 멀리서 부럽게 바라만 보던 남쪽으로 남쪽으로 종족을 옮겼고 이윽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제압하고 산해관을 넘는다.

 이는 영토 확장에 앞서 노마드의 DNA를 지닌 여진족(만주족)의 이동으로 봐야 하고 그 이동은 삶의 안락을 담보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강희제는 만주 전역에 대해 ‘봉금령(封禁令)’을 내리고 고향 땅마저 비운다. 물론 핑계는 조상의 발흥지(勃興地)이므로 성스러운 곳이기에 함부로 우마지변(牛馬之)으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나약했던 조선 조정도 ‘월강금지령(越江禁止令)’을 내려 청의 입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200여 년간이나 비워졌던 북간도에 엄청난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굶주림과 가렴주구를 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월강(越江)을 감행한 조선인(한인 韓人)들의 이주로부터였다.

 조선인에게 북간도는 봉금해야 할 먼 나라가 아니고 예전부터 살아왔고 뼈를 묻은 고토였다. 하지만 200년을 비워 뒀던 북만의 동토는 황무지와 툰드라의 밀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긴 겨울은 추웠고 굶주린 식솔은 짐승의 모습보다 못했다. 함에도 종자주머니 하나만 달랑 차고 건너 온 그들은 봄을 기다렸고 그 기다림의 다른 이름은 희망이었다.

 ‘1860년대’로 일컫는 북만의 변화기에 조선인들이 바라본 북만의 겨울은 지금보다 더 차갑고 서러웠을 것이다. 그들이 그 추위를 뚫고 삶의 터전을 일구는 과정은 말 그대로 대지의 넓이만큼 피땀이 스몄을 것이고, 한(恨)으로 더께를 보탰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동토를 차고 오르는 알곡을 거두었고, 학교를 세워 어린것들의 미래를 개척해 내고야 말았다.

 그래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상의 안일을 내던진 항일투사들에게 북간도의 동포는 군량미와 군자금의 산실이 됐고, 그들의 희망을 이어받은 2세들은 기꺼이 항일투사가 돼 전장으로 나갔다.

 차렵처럼 펼쳐진 구릉 위로 옥수수와 붉은 수수는 익을 대로 익었다. 거둬내기조차 쉽지 않을 듯하지만 겨우내 눈밭 위로는 수수대만 남아 멋대로 방목되는 가축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명증(明證)한 것은 이 황량한 북간도 겨울의 초입에는 조선인의 질긴 삶과 항일투사들의 의지와 희망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종해 (사)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한중우의공원 관장 (gkjh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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