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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갑산’과 우리의 소원은?

“내 죽기 전 소원의 하나는 고향땅을 밟아보는 거야요”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14-09-23 오전 11: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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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갑산(三水甲山)’에 ‘장진호(長津湖)’.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 물음에 일반인들은 무엇을 먼저 떠올릴리게 될까?
오래 전부터 필자의 귀에 익은 기억에서 ‘삼수갑산’은 첩첩산중에 에워 쌓인 우리나라 최 오지(奧地)이자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16, 18도로 사람들이 살기에는 어려움이 큰 곳이라는 기억이다. 지리적으로 삼수·갑산은 개마고원이 위치한 함경남도 깊숙한 산골로 예로부터 죄인들이 귀양 가던 곳으로 한번 가면 나오기 힘든 오늘날 북한 아오지 탄광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렇다면 장진호는? 우리나라 ‘제1·2의 인공호수로서 자연의 신비와 인공의 웅대함이 겸해진 절경을 자랑하는 호수로 부전고원의 명승 관광자원’이라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절경의 장진호도 순수 자연 절경으로서의 기억보다는 1950년 6·25한국전쟁에서 살을 에는 혹한의 추위 속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리만치 결사적으로 사투를 벌인 최악의 전장 ‘장진호 전투’ ‘장진호 철수작전’을 우선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특히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당시 북한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돼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돼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한 것으로 기록된다.

 미군 전사에도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출처: 위키백과).

 ▲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함경남도도민의 날 대회'에 참석한 삼수갑산 도민과 그 가족들이 서로 모여 행사준비를 하고 있다. 이 날 도민의 날 대회에서는 평양가무 공연과 중다리기, 달리기와 경품추첨 등 다채로운 행사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하루를 보냈다.  ⓒkonas.net

 초가을의 땡볕이 따갑게 내리 쬐이던 9월13일 오전, 서울 잠실보조경기장에서는 6·25전쟁 당시 북한공산당의 학정(虐政)을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진 채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왔던 실향민 1세대로부터 2, 3세대와  그 가족들이 모여 정겨운 만남과 나눔의 시간을 갖는 흥겨운 한바탕 잔치마당이 펼쳐졌다.

 『제41회 함경도민의 날 대회』. 매년 5월에 열렸지만 올해는 세월호 사건으로 9월로 연기해 개최한 것이다.

 연령대에 따라 느낌도 다르겠지만 북청 이원 단천으로부터 삼수 갑산 장진 흥남 고원 문천 원산 등 낯익은 지명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처음 대하는 생소한 이름들도 운동장 객석에 붙여지고 그 주변으로는 지역 출신 인사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해서 필자도 퍼뜩 삼수갑산에 장진(호)가 떠오른 것이다. 모여드는 각 지역민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함경도 특유의 억센 방언도 점차 강도가 세진다.

 6·25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4년. 강보에 쌓인 아이가 흥남부두에서 피난선을 타고 거제도에 도착했다면 이젠 머리가 희끗해진 노년으로 접어드는 연령이다. 이 날 행사장 곳곳에서 만나는 지역민들은 각 군별 지역이나 고향을 떠나 서로가 밝은 얼굴로 인사와 안부를 물으며 초가을 청명한 하늘아래서 즐거운 하루를 만끽하면서도 고향을 그리는 애타는 심정과 통일 염원 기대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모습들이었다.

 이는 대회 개회식에서 말씀을 하시는 원로들의 반언 속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박태극 함경남도 중앙도민회장은 대회사에서 실향민세대가 우리사회에 미친 영향력과 역할들을 앞세우면서도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통일에의 비원을 가득 담았다. “60여 년 전 조국의 분단이라는 아픔 속에서 고향을 떠나 남한에 정착하여 혼신의 노력으로 폐허 속에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웠고, 이제는 당당히 세계 경제11위의 국가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고 술회하고 “월남 1세대는 대부분 80세를 넘는 고령자들이 되셨다. 앞으로 2, 3세대의 후손들이 이분들의 가르침과 뜻을 받들어 도민사회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또 이 날 행사가 통일로의 연계와도 맥을 같이 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함남인들이 모여 통일을 소망하는, 통일을 준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통일이 되는 그날, 함경남도의 당당한 일원이 되어 조국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통일』. 우리 국민 누구보다 통일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솟구치는 이가 실향민 1세대들일 것이다. 두고 온 고향산천, 부모형제를 그리며 눈물짓는 마음을 제3자가 아무리 이해한다한들 어디 그분들 마음의 몇 퍼센트, 얼마만큼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 어린 나이 2세대로 이 땅에 둥지를 튼 세대 역시 동일한 심중일 것이다. 그래서 간혹 임진각 망배단을 돌아보고 거기에 엮인 사연들을 접하다 보면 그 시리디 시린 속내 일단을 조금이나마 통하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잠실 행사장 한켠에서 만난 갑산군 출신 실향민 한 분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박강본(경기광주, 71)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은 6·25 피난 시절 당시를 돌이키고 통일의 필연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우리 갑산은 참 아름다운 고장이었어요. 어린 시절 졸졸졸 흘러내리는 시냇가에서 고기 잡고 또래 친구들과 함께 놀던 그저 즐거운 추억뿐인데,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 온 이후에는 말 그대로 거지꼴에 굶어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 수였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박강본 위원은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파죽의 북진이 이어져 통일일보직전까지 도달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장진호 전투 이후 철수를 개시하자 이 때 부친과 가족들이 흥남부두에서 ‘빅토리아호’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왔다. 당시 그의 나이 일곱 살. 1950년 12월 20일 경으로 기억했다. 거제도 도착은 해를 넘긴 1951년 1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때 흥남부두에서 ‘빅토리아호’를 탈 수 있었던 건 천운이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르겠지요.”

 ▲ 갑산군 출신 박강본 위원(왼쪽)과 동료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konas.net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대 작전이다. 흥남 철수 작전의 시작은 또 다른 측면에선 대한민국이 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자 흥남 철수 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다.

 거제도로 도착한 박 위원과 가족은 이후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아버지가 곧 국군부대의 노무대에 징집돼 1선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그런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처럼 그도  죽기 아니면 살기 식 고통을 어린 나이에 너무 쉽게 접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북한만 고난의 행군 시기가 있었던 게 아니다. 피난지 거제도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을 길거리에서 많이 봤다.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결국 가장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 여자나 어린이, 노약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방력이 강해야 하고, 국민의 단결된 힘, 안보가 해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은 평화통일자문위원 활동에 대해서도 “내 자신이 크게 하는 일은 없지만 우리 실향민은 말할 나위 없고, 국민 전체가 통일을 준비하는 마음을 부지런히 다잡아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통일기운이 뻗쳐오면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활동과 함께 통일교육이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며 우리사회와 국민 각자가 통일을 준비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목청을 돋웠다.

 막걸리 잔을 서로 권하며 옛 추억에 빠져드는 연세 지긋한 실향민 1세대 대부분의 말속에도 “내 죽기 전 소원의 하나는 고향땅을 밟아보는 거야요” 였다. 고향을 얘기하는 순간에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모습들이었다.

 정부가 18일 발표한 2015년 예산안에 의하면 통일부의 북한 취약계층에 대한 인도 지원 및 민생 인프라 구축, 남북협력기금 등은 올해보다 10.4% 증가한 1조4752억원으로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이산상봉 시스템 운영 등 대북 인도지원 예산은 73% 인상된 것으로 돼 있다. 특히 북한 영유아 지원, 보건의료 협력, 산림녹화 · 농업협력사업 등 중점사업 예산은 461억8000만원에서 1186억 원으로 156.8% 급등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 후속조치를 위한 대북 인도적 지원 예산이 확대, 통일준비를 위한 본격 행보가 시작됨을 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현오(칼럼리스트, 수필가. 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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