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이한응 열사 순국110주년 국제학술회의 개최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으리오. 슬프다 종사가 장차 무너질 것이오 온 겨레가 모두 남의 종이 되리로다. 구차히 산다한들 욕됨만이 더할 따름이라. 이 어찌 죽어짐보다 나으리요. 뜻을 매듭지은 이 자리에 다시 이를 말 없노라」(이한응 열사의 순국 前 유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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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열사 순국 11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구국 외교활동과 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한 국제학술회가 11일 오후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 주관으로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이한응열사의 구국 외교활동과 순국’이라는 대주제로 열린 학술회는 최초의 ‘을사’ 순국열사 외교관 이한응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이한응 열사 순국지 관련 자료와 활용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제기됐다.
이한응 열사는 1901년 주영국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임명되어 풍전등화 앞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영국정부를 상대로 치열한 구국외교를 펼치다가 1905년 5월 12일 영국주재 대한제국공사관의 외교관(대리공사)으로 런던시내에 있는 대한제국공사관에 자결 순국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국제정치의 중심무대인 영국 런던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의 국제관계를 관찰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제물로 전락해 가는 조국의 명운을 구하고자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는 등 탁월한 국제적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04년 러시아와 일본 간에 한반도를 두고 전쟁이 벌어진 것을 예상하고,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를 방지하기 위한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한 것은 국제정치적 안목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시키려는 탁월한 견해였음을 평가받고 있다.
이 열사의 순국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 최초의 순국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자결한 민영환 보다 5개월이나 앞선 것으로 순국 후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이 국내로 옮겨져 용인에 안장돼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었다.
정부는 1962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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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최초의 을사 순국열사 외교관 이한응 연구’ 발제를 통해 최초의 해외 주재 순국 외교관으로 피상적으로 알려져 있던 이한응 열사의 역사적 사실과 인과 관계를 심층적으로 논증해 처절했던 대한제국 외교사의 한 면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이한응의 외교활동과 순국지의 활용방안’ 제하 발표를 통해 “지금까지 이한응에 대한 몇 가지 논문과 책자가 나왔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못한 것 같다”며 “현재 국내에는 이한응 외교활동과 순국을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없고, 대부분의 자료가 영국 현지의 국립문서보관소를 비롯한 여러 곳의 문사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만큼 이들 자료들이 모두 수집되어 연구된다면, 이한응 공사의 외교활동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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