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해전】“아빠, 애국심이 막 생기는 같아”
영화 <연평해전> 열기가 뜨겁다. 6·25전쟁 65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개봉한 <연평해전>이 7월 7일 기준 관객 수 3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번 주 400만명 돌파도 당장 초(秒) 읽기에 들어간 격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이런 저런 얘기들이 돌았다. 영화 속 ‘관전 포인트’는 무엇이고, ‘연인들끼리 극장을 찾아 코를 훌쩍이며 본다’ 에서 ‘손수건 준비는 기본’이라는 얘기 등 영화를 홍보하는 말들이 귓전을 간지럽히며 흥미와 관심을 상승시키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투 신, 전쟁영화엔 솔깃해 하는 남자들 세계에서 연평해전은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명량’으로부터 6·25전쟁 상흔과 휴머니즘을 각인시켜 준 흥남철수작전의 ‘국제시장’에 이어 3연타석 홈런을 몰아치는 야구경기와도 같은 영화였다.
영화 개봉소식에 “가슴 아픈 역사가 한편의 영화로 부활 했구나”하고 있는데, 1주일여 전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온 막내딸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자, 영화를 보고 왔다한다. “연평해전 보지 그랬어? 재미있다던데”하니 “아빠, 연평해전 봤어?”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하자, “나 연평해전 보고 왔는데. 아빠도 엄마하고 가서 봐. 연평해전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막 애국심이 생기는 것 같아”하는 게 아닌가? 참으로 뜻밖이었다. ‘영화 한편에 애국심’이란 말까지.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결혼한 딸에게도 말해 우리 가족 모두가 <연평해전>을 관람했다. 초유의 사건(?)으로 기억될 판이다.
<연평해전>. 이제는 국방부장관에서 국무총리, 여·야정당대표들이 참석하는 정부주관 추모행사로 제대로 자리를 잡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 추모제는 장관은 고사하고, 정부관계자들의 그림자 하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만큼 당시 좌파정부로선 북한 눈치 보기에 급급한 드러내놓기 싫은 사건에 불과했었던 것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연평해전의 영웅들과 작지 않은 인연이 있다. 교전(交戰)이 발생한 6월29일 오전, 그 날은 ‘2002 서울 월드컵 축구 대한민국과 터키의 3·4위 준결승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軍 전역 직후 주말을 맞아 직장이 있는 서울에서 내려와 TV를 보던 중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남북 간 충돌이 발생, 우리 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자막이 속보로 떴다. NLL을 월경한 북한 경비정이 무차별 선제기습공격을 감행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였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경직됨을 어쩔 수 없었다.
2002년 6월의 ‘대〜한민국’!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동방의 큰 나라였다.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88서울올림픽에 이어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있는 그 찰나에 깡패·불량집단 괴수 김정일은 기어코 세계의 잔칫집 음식상에 잿더미를 끼얹어 버렸다. 입만 열었다하면 ‘우리민족끼리’와 ‘동포애’, ‘한겨레 한 핏줄’을 노래 부르며 햇볕정책을 앞세운 당시 정권에 구걸행각을 벌이던 집단이 천인공노할 反인륜적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이 해괴한 것은 김정일 집단의 도발 이후 이 땅에서 였다. 교전수칙도 수칙이었지만 해전(海戰)으로 대한민국 영해를 수호하던 국군장병이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해 국가가 상(喪)을 당했음에도 국군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다음날 일본 도쿄에서 열린 결승전을 참관코자 6인의 전사자를 외면한 채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3일 뒤 전사자들은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전우들의 안타까움과 유족들의 오열 속에 영결식이 거행됐다. 그 날 필자도 그 자리에 위치했다. 영화에서 영결식은 실제 장면이 삽입되었다. 외신을 포함해 많은 취재진이 취재하는 장면도 나왔다. 유심히 살펴봤다. 그 중에 필자도 끼어 열심히 취재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아니 내 모습만 못 찾은 게 아니라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총리나 국방부장관, 합참의장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참석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사실이었다.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숨져간 여섯 영웅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이후 6용사를 기리는 추모제가 정부가 아닌 시민단체 주관으로 광화문광장 동화면세점 앞과 서울역 광장 등지에서 열려 빠짐없이 취재에 나서곤 했지만 그 때마다 정부관계자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 2008년에 들어서야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국가 행사로 격상될 수 있었으니, 유족들에겐 참담한 세월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뼈에 사무친 한을 품고 2005년 이 땅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故 한상국(당시 357호정 조타장) 중사의 아내 김한나 씨는 영화개봉을 앞둔 6월24일 한 종편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픈 심정을 토로했다. 당시 김대중 정권하에서 청와대나 국방부 어디에서도 수색작업등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한마디 연락조차 없었다 며 “나 스스로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 지 매일 매일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마다 담당자는) ‘우리 과가 아니다’, ‘우리 담당이 아니다’며 전화를 서로 돌렸다. 나중에는 오히려 화를 내었다. ‘당신 남편 찾다가 다시 NLL에서 전쟁나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 (전화를)끊고 기가차서 한참을 울었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이것이 당시 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 관계자의 태도였고 연평해전에 대한 인식이었다.
6월25일 아침 한 조찬포럼에 강사로 나온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문제의 출발 해결책은 교육으로부터 이며, 가치가 필요한 전사를 만드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게 무너져서 안타깝고 한탄스럽다”면서 “이 자리에 참석한 어르신 여러분부터 아들 딸 손자 손녀에 대한 바른 가치관 교육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 스스로 동화돼 “애국심이 막 생기는 것 같다”는 막내딸의 말에서 예술작품 하나가 인생행로에, 젊은이들의 사고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돌이키며 가정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연평해전’을 관람하던 일요일, 200여석 극장 안은 빈자리가 잘 안보일 정도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20대 남녀 젊은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참수리 357호정과 연평해전 6인의 전사(戰死) 영웅들】
357 참수리정, 한·일 월드컵 4강전이 열리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발발한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 해군함정의 선제 기습공격을 받고 즉각 교전한 바로 그 함정이다. 참수리 357호정은 복귀 중 침몰하여 53일 만인 8월 21일 인양되었다.
고(故)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지만 우리 해군은 신속한 대응으로 북한 해군함정을 응징하고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사수했다. 정부는 2008년 4월 ‘서해교전’으로 불리던 이 전투를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하고, 추모행사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다.
13주년 연평해전 추모식에 참석한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추모사에서 제2연평해전은 ‘승리한 전투’라고 전사자의 명예를 회복했다.(konas)
이현오(칼럼리스트, 수필가 / 재향군인회 안보대응부장. 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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